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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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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12-05 11:19 조회2,7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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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12.04 22:39

신라는 당나라 유학에 관심이 많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은 재위 27년(728) 동생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신라 학생들의 당나라 국학(國學) 입학 허가를 요청했다. 현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신라 학생들은 대거 당나라에 갔는데, ‘동사강목(東史綱目)’은 ‘l0년을 기한으로 귀국하게 했다’라고 10년이 유학기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서적 구입비는 신라에서 은화로 지급하고 양식은 당나라의 관청인 홍로시(鴻寺)에서 지급해 ‘오고가는 학생이 끊이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국비 유학생이었던 셈이다. 무려 100명의 신라 학생이 국학에 재학했는데, 이는 당나라 유학생 중 최대 숫자였다.

이들은 당나라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당나라는 외국인을 위한 빈공과(賓貢科)를 두었는데 신라인 최초의 급제자는 당나라 목종(穆宗) 장경(長慶) 원년(821)에 급제한 김운경(金雲卿)이었다. 김운경은 당나라에서 연주도독부사마를, 최치원은 도통순관(都統巡官)을 역임했다. 빈공과의 신라인 급제자는 모두 58명이었는데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후량(後梁)·후당(後唐)에 가서 31명이 급제했다. 고려는 송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김행성(金行成)·왕림(王琳) 등이 급제했다. 빈공과 급제자는 방(榜) 끝에 이름을 써 한 등급 낮은 것으로 쳤으나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 때부터는 금방(金榜)에 이름을 같이 써 차별을 없앴다.

유학 과정에서 비극도 있었다. 공민왕 22년(1373) 향시(鄕試)에 합격한 김잠(金潛)·송문중(宋文中)·조신(曺信) 등을 남경으로 보내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했는데 바닷길에서 태풍을 만나 김잠과 조신이 빠져 죽은 것이다. 이곡(李穀)·이색(李穡) 부자는 대를 이은 수재였다. 이곡은 원나라 제과(制科)에 2등인 이갑(二甲)으로 급제했고, 이색은 시험관 구양현(歐陽玄)이 장원으로 급제시키려 했으나 외국인을 장원으로 뽑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대가 많아 역시 이갑으로 급제시켰다. 대원외고와 민족사관고가 미 명문대 진학률 고교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것은 전통적으로 인재가 강한 민족의 면모를 되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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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철 (2007-12-05 11:31:33) 
 
‘동사강목(東史綱目)’은 ‘l0년을 기한으로 귀국하게 했다’라고 10년이 신라 학생들의 당나라 유학기간이었음을 밝히고 있단다. 10년이면 그 외국의 언어로 생각할 수 있는 기간이라했던가? 2년이면 그 언어가 귀에 들리고...
최근 우리 주위의 조기유학도 따라서 2년 미만이 아니라면 10년을 목표로 해야 결딴이 난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당나라 유학은 현대의 미국 유학이다. <서적 구입비는 신라에서 은화로 지급하고 양식은 당나라의 관청인 홍로시(鴻寺)에서 지급했는데> 이 자금을 오늘날은 기러기 아빠들이 다 부담한다. 당 나라를 ‘오고가는 학생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과 무려 100명의 신라 학생이 국학에 재학했는데, 이는 당나라 유학생 중 최대 숫자였던 것은 현재 미국 유학생들의 현황과 같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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