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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건성건성 박수 친 罪(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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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3-12-16 15:13 조회2,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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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건성건성 박수 친 罪
입력 : 2013.12.16 02:37
 13일의 금요일에 날아든 충격
'속마음'까지 단죄하는 북한, '찍소리 할 생각'도 허용 안 해
 막말 넘쳐도 자유로운 한국, 새삼 南과 北의 거리감 확인… 북한에 '자유' 전파 새 숙제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그 동안 북한에 언론의 자유가 없는 줄 알고 지낸 건 큰 착각이었다. 언어의 자유뿐 아니라 '비언어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13일의 금요일 새벽에 날아든 장성택 처형 소식이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삐딱하게 앉은 죄,
건성건성 박수 친 죄,
왼새끼 꼰(딴생각한) 죄,
김정은을 앞질러 걸은 죄,
김정은이 허리를 펴기 전에 악수한 손을 내린 죄…. 정상적인 국가라면 일반 회사에서 징계하기도 겸연쩍은 이런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항목이 북한에서 사형수의 죄목으로 거론되는 걸 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40년간 2인자로 알려졌던 사람이 공개 석상에서 끌려나간 지 나흘 만에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모골이 송연해진 까닭이 처음에는 기이한 사법제도 때문인가 했다. 미국 국무부 성명처럼 '극단적인 잔인함extreme brutality' 때문인가도 했다. 집안 어른이 사고사를 당했대도 가슴이 벌렁거릴 판에, 조카가 고모부를 죽이고 하루 만에 공식석상에 웃으며 나타나는 모양은 아무리 '내재적 접근법'을 동원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면 29세 지도자 손에 있는 핵무기 때문인가 했다. 그러나 그래도 설명이 부족했다. 절차적 정당성, 반인륜성, 안보위협 같은 이유만으로는 장성택 처형 소식이 준 인지적 불편함이 좀 더 깊고 저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조선중앙통신의 면도날 같은 레토릭 뒤에 숨죽인 북한 '자유'의 현주소였다. 북한 통신이 거론한 장성택의 죄목 중 '오만불손'은 태도의 문제요, '동상이몽'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말과 행동도 모자라 생각과 무의식을 공식 죄목으로 거론하며 통제하는 곳이 북한이다. '찍소리'는커녕 '찍소리 할 생각'을 '꿈에도' 못 하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숨이 막힐지 생각하니 가슴이 막혀왔다.

인간은 소통하며 사는 동물이다. 언어가 없어도 인간은 소통을 해야 산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란 동물학에서의 소통을 인간에 적용한 분야이다. 옆에 앉는 사람은 대개 가까운 사이다(공간학). 비공식적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은 비공식적 관계다(시간학) 등등처럼 사람들은 말 없는 신호로 소통하고, 또 그 신호들을 통해 관계를 읽는다. 이런 신호들은 비교적 정확하다. 말은 거짓말을 해도 비언어 신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읽는 데도 '비언어 기호학'이 제법 쓸모 있다. 얼마 전 북한 기록물에서 장성택이 지워진 것을 통해 실각을 짐작한 것, 장성택의 묶인 손의 멍 자국을 보고 신체적 고문을 유추한 것, 처형 하루 만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이 최룡해 장정남 황병서 3인방과 함께 수행한 것에서 새로운 권력 지도를 읽을 수 있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 신호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추론하는 데 유효할 뿐이다. 표현을 하고 행동을 해도 처벌하기 힘든데, 드러내지도 않은 '속마음'을 단죄하거나 처벌할 수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막말과 욕설조차 크게 처벌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 국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언론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손마다 휴대폰을 들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검색하며 산다. 사전 검열은 사라진 지 오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콘텐츠는 사후 심의를 통해 제재한다. 그조차 의견 진술의 기회를 주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당사자는 결과에 불복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같은 꿈만 꾸지 말고 제발 창업 같은 '딴 꿈'을 꾸라고 독려한다. 새끼줄을 꼬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보라는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삐딱한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에 감동받는다. 말이 넘쳐나는데도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생각을 읽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 그래서인지 선거철만 되면 각종 여론조사 기관이 성업한다. 그리고 누가 무슨 장난을 쳐도 결국엔 민심이 정권을 낳는다.

흔히 통일 비용이라면 천문학적 숫자의 금액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건성건성 박수 친 자'가 처형되는 사회의 사람들과, 인터넷 댓글에 대통령을 비방하는 글을 날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화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바른말을 쓰는 캠페인을 벌이는 사회와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서 설설 끓는 보이라에 처넣고 싶다'는 표현을 뉴스 언어로 쓰는 사회가 함께 소통할 수 있을까? 북한이 자유를 학습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미세 먼지 날리듯 자유를 남풍에 실어 보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새삼 너무 귀하게 느껴진다.

박성희 |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곽중철 (2013-12-16 15:26:33) 
 
나는 이대 박성희 교수의 팬이다. 몇 달에 한 번씩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글이 그렇게 똑 부러질 수가 없다. 나도 (방송)기자를 했고 언론학 박사지만 박교수만큼 언론학 용어와 이론을 실생활에 보란듯이 정확하게 적용해 풀어내는 학자가 또 있을까? 그의 기사를 읽은 아침은 기분이 좋다.
그의 필력은 (조선일보) 기자 경력에 기초한 그의 학력에서 나온다. 기자를 하면서 몸 전체로 체득한 세상사를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그대로 학문에 적용해 박사학위를 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다.
나는 약 10년 전 우리 통대 학술대회에서 꼭 한번 박교수를 봤지만 통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사를 경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통역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에게 "많이 아는 것이 통역에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언론학에 박성희가 있다면 심리학에는 김정운 박사가 있다. 역시 조선일보에 나오는 그의 기고문들은 "진리는 간단하고 쉬운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게한다.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말로 글을 쓰는 사이비 개똥 철학자들은 물럿거라...!! 
 
 
 

곽중철 (2014-01-16 18:54:14) 
 
朝鮮칼럼 The Column 2014.1. 16
박성희 |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읽지 말고 말하세요"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를 맡은 가수 박진영은 "말하듯이 노래하라"는 주문을 자주 한다. 말하듯이 노래하라, 그래야 감동이 전달된다는 그의 지적에는 말과 음악의 사회성에 대한 이해가 묻어난다. 박진영은 또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라"는 주문도 심심치 않게 한다. 남의 목소리나 스타일을 따라 했다가는 혹평을 면치 못한다.

글이 사유(思惟)의 영역이라면, 말은 소통(疏通)의 영역이다. 글은 혼자 쓰지만, 말은 듣는 사람을 상정하는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박진영이 주문하는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 행위로서의 노래이다. 남의 목소리와 생각으로 소통할 수 없듯, 자기 소리를 찾아내 대화하듯 노래해야 사람들이 감동한다. 음악가에게 '사운드(sound)'가 중요하다면, 일반인에겐 자신의 정립된 견해나 주장 같은 정돈된 색깔의 '보이스(voice)'가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연이어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모처럼 서울말을 쓰는 세 정치인이 잘 다듬어진 문구의 모두 발언에 담은 비전과 다짐을 들으며 나도 주문하고 싶어졌다. "읽지 말고 말하세요." 그리고 "대화하듯 정치하세요."

우리나라 정치 연설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좌중을 웃기는 유머, 의회 연설의 경우 정파를 뛰어넘는 청중의 박수, 기자회견의 경우 기자와의 상호 공방. 정치인과 직접 소통할 일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은 그들끼리의 상호작용을 지켜보며 '소통'이냐 '불통(不通)'이냐를 짐작한다. 수염도 못 깎은 얼굴로 천막에서 항의하던 야당 대표, 실제 목소리(보이스)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여당 대표, 국무회의 때 늘 혼자 말씀하시고 장관들은 뭔가 열심히 적는 장면 속의 대통령. 이들은 '지도자'임은 분명하지만 '대화하는 지도자'의 품새는 아니다.

 '숭문어눌(崇文語訥)'의 전통을 지닌 우리는 말 잘하는 지도자를 썩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레와 같은 언어로 대중을 흔든 웅변가를 지도자로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반면 서양에서는 말이 진리 탐구와 리더십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둘(dia)' 사이의 '말(logos)'로 이루어진 '변증법(dialectic)'을 통해 진리를 구하고, 아고라의 자유발언대에서 청중을 설득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어찌 되었건 우리도 서양식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정치와 말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정치제도와 더불어 말의 문화가 함께 발달했더라면 계속되는 불통 논란도 조금은 덜했을지 모른다.

이번 신년 기자회견에서 야당과 여당 대표가 나란히 말에 대해 언급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비방과 막말을 마감하고 고품격·고효율 정치를 하겠다"고 했고,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막말과 저주를 하지 않고 언어 순화에 정치권이 앞장서겠다"고 했다. 막말이 사라지면 몸싸움도 사라질 것이다. 바른말로 치열한 설전(舌戰)을 벌이는 바람직한 국회의 모습이 기대된다.

몇 가지 팁을 드리자면, 연설을 할 때는 청중과 시선을 맞추는 것이 기본이다. 눈앞의 프롬프터에 초점을 두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면 눈의 초점이 흐려져 자연스럽지 않다. 말은 편하게 대화할 때처럼 높고 낮음이 있어야 하고, 표정과 동작이 살아 있어야 한다. 가급적 원고는 외우는 것이 좋다. 고대 그리스 수사학자들은 웅변술로 '기억법'과 '연기법'을 가르쳤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원고 없이 거의 한 시간을 매끄럽게 연설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국 의원들도 대정부 질문을 할 때 외워서 질문한다.

말의 내용은 이성과 논리를 갖춰야 하고(로고스), 말하는 사람의 인품이나 성실성·전문성에 하자가 없어야 하며(에토스), 청중의 감성과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해야 한다(파토스). 이 세 가지를 갖춰야 대중을 설득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했다.

정치인은 무엇보다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색깔을 '말'하는 데 거침이 없어야 한다. 원고를 충실하게 읽는 것으로는 청중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리더(reader)가 리드(lead)한다'는 책 제목에 현혹되지 마시라. 그건 사고의 폭을 지칭한 제목이지, 연설문을 읽으라는 뜻이 아니다.

지방선거와 신당(新黨) 출현이 기대되는 올해는 '말하는' 정치인이 늘어나고, 그들의 말이 노래처럼 들렸으면 한다. 희망찬 신년이니 그런 기대도 가져볼까 한다. 
 
 
 

곽중철 (2014-04-28 21:18:40) 
 
朝鮮칼럼 아이들 지킬 룰에서 출발하라
 조선일보 2014.04.28 05:25

어른들은 안 지키고 강요만 했던 룰 탓에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
 거창한 국가 改造 주장하기보다 우리 미래인 어린 세대 우선하고
 아이 보호하는 문화 정착해 가면 安全 사회 실현 앞당기지 않겠나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검푸른 바다에 잠긴 세월호가 온 나라를 눈물에 젖게 한 지 열흘이 넘었다.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목숨이 없지만, 특히 수학여행길에 올랐다 변을 당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탈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한 학년 전체를 한 배에 태운 것도 어른이요, 그 배를 몬 것도 어른이요, 버리고 도망간 것도 어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룰을 따르다, 그 룰조차 지키지 않는 어른들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세월호 참사는 시간이 갈수록 열두 갈래로 진화하며 매일 새로운 소식을 쏟아낸다. 지옥에서 온 듯한 선장과 선원들은 구속되었고, 해양수산부는 대형 선박의 항해를 1급 항해사만 할 수 있도록 규정을 고치고 있다. 국회에서도 '해상안전법안'을 소위에서 서둘러 처리해 본회의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신비로운 선주(船主)의 과거 행적과 국내외 은닉 재산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며 '성인판' 세월호 스토리는 거의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땅 위에서 성인 버전의 세월호 드라마가 진행되는 사이에도 100명이 넘는 아이들은 여전히 검은 바닷속에 있고, 그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도 검게 타들어가고 있다.

이번 참사가 그 흔한 어른들의 뻔한 비리 이야기로 끝나지 않도록, 그리고 한심하고 무책임한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각종 룰을 처음부터 다시 짤 것을 제안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아닌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정책과 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세월호 참사를 '희생자 중 아이들이 섞여있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한 뼈아픈 사건'으로 기억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돈만 밝히는 악덕 업주나 직업의식이 결여된 어른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일부 어른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거친 상상이긴 하지만, 만약 단체 여행이 갖는 위험성을 고려해 애초부터 아이들의 단체 인원을 제한했다면 어땠을까. 가격이 아닌 안전 위주로 운송 수단을 택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선박을 이용할 경우, 안전 수칙을 사전에 철저히 학습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조난 시 구조되기 쉬운 선실에 아이들을 배치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선진국은 농촌이 잘살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으며 약자가 존중받는 사회다. 그래서 선진국은 대개 아이들을 끔찍하게 여긴다. 같은 범죄라도 아이들 대상은 가중 처벌한다. 스쿨버스는 절대 추월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자녀를 학대하면 부모라도 격리한다. 아이용 치약은 삼켜도 문제없도록 개발되며, 의약품은 용기 뚜껑 디자인까지 신경 써 불의의 사고를 막는다. 불법 유해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적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 관련 안전 규정이 셀 수도 없이 많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이들을 배려한 정책이나 철학이 있기는 한가? 매년 바뀌어 누더기처럼 변한 교육 제도에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있는가? 계모(繼母)한테 맞아 죽고, 친부(親父)에게 방치되어 죽는 끔찍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초점은 주로 '못된 어른'을 사후에 처벌하는 데 모였다. 그런 일을 예방할 정책이 있었는가? 아이들 관련 정책을 어른들의 이기심을 조정하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아이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래서 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보았다면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가 되었을지 모른다.

세월호 참사가 나자 쏟아져 나온 해결책 속에는 '국가 개조론' 같은 거창한 것도 있었다. 아무도 어떠한 부정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적 사회라면 이런 인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역적 해결책을 기다릴 수는 없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철저한 예방책을 실시하면 그 아이들이 자라나서 자신들이 보호받은 기억대로 우리 사회를 개조해 나갈 것이다. 이런 귀납적 방법이야말로 안전 사회를 앞당기는 방책이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해양 운수업의 부조리를 고치는 재료로만 활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이번 참사가 아이들 관련 룰을 새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망 또는 실종 302명'이라는 숫자는 그런 바람을 웅변하기에 너무나 넘치고 가슴 아픈 숫자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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