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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통역사 이야기: 그 은밀한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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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4-05-06 17:18 조회1,6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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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da Gadomska

통역이라는 일의 어려운 점과 고생스러움을 얘기하는 한 익명의 통역사 얘기가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통역은 정말 어려운 직종이다. 금전적 보상도 없고, 번듯한 경력 개발 기회도 없다. 통역사는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듣는다. 뭔가 잘못될 때에만 주목을 받는다. 우습게도 통역이 아주 잘 되었다는 증거는 통역이 있었는지 느껴지지 않을 때이다. 그렇다, 통역사는 통역을 할 때마다 그 통역 주제에 대해 새롭게 배워야 하면서도 마치 다 아는 듯 잘난 척 해야 한다. 통역사들은 실제로는 배추와 젖소를 구별도 못 하면서 그 날 회의가 열리기 전에 모든 지식을 머리에 급히 때려넣고 회의장에 가서는 비료전문가 둘을 상대로 나는 퇴비만 쓴다는 둥 열심히 설득을 하는 말을 전한다. 실상이 이런데도 나는 이 직업을 사랑한다. 왜 그럴까? 여기 그 이유들이 있다.

 (1) 내가 마치 비밀 조직에 속한 것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남몰래 악수를 나누지는 않지만, 우리 통역사들에게는 우리 나름의 관습과 규칙이 있다. 우리는 늘 어떤 모임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늘 이방인이다. 닫혀진 문 사이로 유령처럼 통행한다. 일대일 대화에서 우리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제3자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 말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이 할 말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아니, 그 사람보다 더 멋지게 말하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우리 통역을 듣고 매료된 한 연사는 마치 통역사들이 마스터앤마가리타에 나오는 볼랜드 교수같다고 한다. 약간 외국인 액센트가 섞인 발음을 하는 그 박사 말이다. 그리고 또 회의에 참석했던 어떤 의학박사는 통역한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신경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말을 하거나 들을 수는 있지만 그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고 배웠다고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우리 통역사들은 아주 수상한 능력을 가진 소수 집단인 셈이다. 우리도 우리끼리 비밀리에 악수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2) 나는 커서 무엇이 될 지, 한 가지를 정할 필요가 없다.
일주일 만에 나는 쵸콜렛 공장에도 가고, 국가 원수들의 말도 통역했다. 카타마란이라는 배를 만드는 방법도 알았으며, 노조의 협상에도 따라붙고 경제단체 총회도 통역했다. 흔히 갈 수 없는 장소들에 가기도 하고, 통역사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만날 기회라곤 전혀 없을 사람들을 만났다. 또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대화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금세 전혀 다른 새 배경에서 일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3) 모든 것이 다 지나가버려서 좋다.
하나님은 내가 그 쵸콜렛 공장에서 전속으로 통역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셨다. 노조 간부들의 싸움을 날마다 들어줄 필요도 없다. 늘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고 새 장소가 나타나고, 나는 아드레날린이 솟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고 이 호르몬 수치가 하강하면 나는 흐뭇해진다. 무리하지 않아서 좋고, 그러면서도 매번 내 임무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전력투구하는 것이 좋다. 물론 아주 지루하고 괴로운 회의도 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랴? 일과가 끝나고 나면 마이크가 꺼지고 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괴로운 동료 통역사들도 있다. 그런들 또 어떠랴? 그 회의 통역일이 끝나고 나면 각자 자기 길을 가고, 더 이상 안 만나도 되는걸. 은퇴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같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사무실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 것을…

(4) 나는 특출난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 후 그것을 발설해버리는 놀라운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정보는 잊어버린다. 안 잊어버리면 내 머리가 터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정보도 많이 있다. 그렇긴 해도 아주 가끔씩 놀라운 일이 생긴다. 한 번은 고향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운전기사와 디젤 엔진 이야기를 신나게 했더니 같이 탄 공대 출신 친구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변호사 친구와 유럽의 사법제도에 대해 즐겁게 토론하기도 한다. 한 번은 디너 파티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마약 제조법에 대해 신이 나서 얘기를  했더니 초청자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경찰관 훈련 강좌를 통역하고 온 길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통역 말고, 택시 기사와 변호사를 모두 감동시킬 직종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5) 가끔씩 나는 세상을 바꾼다.
분명히 사람들은 나 없이도 어떻든 소통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대부분의 만남, 회의, 청문회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내 마이크를 끄고 노트북을 닫으면서 중대한 무엇이 방금 일어났고, 일부 해묵은 장애물이 방금 제거되었으며, 정의가 구현되었음을 분명히 느낀다. 내가 그 과정에 눈곱만치라도 기여했고, 내가 촉진제였음을 느낄 때,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이 이야기는 자랑이 아니다. 지금 시작하는 젊은 통역사들이나 통역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나와 같은 경험들을 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약속하지 않는다. 동료통역사들 중에라도 몇 명이나 내 말에 동의할는지 모르겠다. 그래, 회의 통역사가 되기도 힘들고, 회의 통역사로 버티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통역사 되기를 지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다 받아 들인다면, 통역계는 어떤 류의 비밀결사조직이 될까? 하하, 그렇다고 걱정은 마시오, 그 조직에 검은 수탉을 잡아 올리라는 통과의례는 없을 테니 말이오. (끝)

 *Ms Wanda GADOMSKA(여)는 파리 거주 프리랜스 통역사(폴란드어 A, 불어 B, 영어 C), AIIC 회원이며 ESIT를 졸업했다. EU 전문 통역사며 ESIT와 ISIT에서 통역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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