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금 무게를 갖는 대통령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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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04-29 14:48 조회3,3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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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일자 : 2005/04/27(수) 18:39 동아일보
[최정호 칼럼]억만금 무게를 갖는 대통령의 말
올해 들어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對日) 발언이 달라졌다. 지지난해나 지난해 일본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가진 뒤 나온 말들을 들었을 때엔 ‘왜 저러시나’ 하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올해 들어 대통령이 한 말은 그 표현이야 어떻든 그 뜻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 대일 정책에선 나도 대통령 편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렇기에 ‘같은 편’에 선 한 국민의 충정에서 한마디쯤 훈수해도 큰 결례는 안 될 듯싶어 이 글을 적는다.
나는 3월 23일자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한일관계와 관련해 대통령이 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힘들여 읽었다. 힘들여 읽은 까닭은 4700자나 되는 글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건 200자 원고지로 24쪽 분량이요, 신문 사설 셋을 합친 분량이다. 일상 생업에 쫓기는 ‘국민 여러분’께서 몇 분이나 그 글을 읽었을지.
송구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노 대통령의 글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TV 방송을 연상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TV에 나왔다고 하면 담화가 보통 한 시간, 기자들의 질의 응답이 또 한 시간, 그러고 나선 ‘대통령 담화의 의의’에 관한 단골 어용학자들의 시시콜콜한 좌담이 다시 한 시간…. 참으로 딱한 것은 생업에 바쁜 국민이 만사를 제쳐 놓고 섹스어필도, 재미도 없는 대통령의 ‘특별방송’을 오전 내내 세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서 들어 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처럼 신문이나 TV를 ‘집단적으로’ 본다면 몰라도 유신 독재 때에도 말은 마음대로 못해도 대통령의 특별방송을 안 들을 자유는 있었다.
▼국가원수의 말은 곧 국가 행동▼
하물며 요즘처럼 신문 간지마다 재미없는 기사가 없고 TV마다 재미없는 드라마가 없는 세월에 대통령의 말씀이라 해도 ‘존경하는 국민’에게 신문 사설 셋쯤의 장문을 읽도록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좀 무리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집권 당시 방송 채널을 독점했다고 비난 받았으나 방송 연설은 5분 이상 끌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말의 길이보다 알맹이다. 공을 들여 홈페이지의 글을 읽어 봤으나 그 내용은 5분의 1로 줄여도 좋을 만큼 지루했다. 중복이 많고, 말의 피루엣(제자리돌기)이 많고, 안 해도 좋을 너스레가 많다. 레토릭의 기본은 짧게 줄이는 생략이다. 가령 “사람은 죽는다. 김정일도 사람이다. 고로 김정일은 죽는다”는 것은 ‘논리학적 추론’의 진부한 진리다. 그러한 삼단논법에서 자명한 한두 명제를 생략하는 것, 예컨대 “나 드골도 사람이오. 영생할 수는 없소” 또는 “나 드골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오” 하는 것을 ‘수사학적 추론’ 또는 수사학의 ‘생략 삼단논법’이라고 한다.
좋은 글은 짧은 글이다. 짧게 글을 쓰려면 시간이 걸리고 공이 든다. “시간에 쫓겨 글이 길어지겠습니다”고 한 것은 어느 유명한 고전주의 작가의 서한 서두의 말이다. 필부의 글도 그럴진대 하물며 국가원수의 글은 아무리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도 장황해서는 안 된다. 장부의 한마디가 천금의 무게를 갖는다면 4000만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한마디는 억만금의 무게를 갖는다. 스스로 레토릭의 대가였던 빌리 브란트는 총리 재임 시 자기보다 많은 연봉을 주며 명문장가인 클라우스 하프레히트를 연설문 작성자로 초빙했다. 총리의 말이 갖는 무게 때문이라 할 것이다. 국가 정상의 말은 곧 국가의 행동이다. 전시에는 포탄으로 말을 한다면 평시에는 말로 대결한다.
▼말 길어지면 실수하기 쉬워▼
말이나 글이 길어지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국가원수나 일개 필부나 매한가지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하기 쉽고 적어도 말하는 사람의 속이 들여다보여 깊이가 없어진다. ○, × 시험문제로는 제대로 헤아릴 수 없던 학생들의 실력이 긴 글을 쓰게 해 보면 사고력 표현력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격 품성 교양까지 드러난다. 그게 사제지간(師弟之間)에선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의 대외 관계에 있어선 다르다. 상대국에 우리나라의 국가원수가 그 속내를 다 드러내 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나는 내가 대일 관계에서 대통령 편이라고 생각한 다음에는 대통령의 긴 글, 많은 말을 대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최정호 객원대기자
[최정호 칼럼]억만금 무게를 갖는 대통령의 말
올해 들어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對日) 발언이 달라졌다. 지지난해나 지난해 일본 총리와 정상 회담을 가진 뒤 나온 말들을 들었을 때엔 ‘왜 저러시나’ 하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올해 들어 대통령이 한 말은 그 표현이야 어떻든 그 뜻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 대일 정책에선 나도 대통령 편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렇기에 ‘같은 편’에 선 한 국민의 충정에서 한마디쯤 훈수해도 큰 결례는 안 될 듯싶어 이 글을 적는다.
나는 3월 23일자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한일관계와 관련해 대통령이 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힘들여 읽었다. 힘들여 읽은 까닭은 4700자나 되는 글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건 200자 원고지로 24쪽 분량이요, 신문 사설 셋을 합친 분량이다. 일상 생업에 쫓기는 ‘국민 여러분’께서 몇 분이나 그 글을 읽었을지.
송구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노 대통령의 글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TV 방송을 연상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 TV에 나왔다고 하면 담화가 보통 한 시간, 기자들의 질의 응답이 또 한 시간, 그러고 나선 ‘대통령 담화의 의의’에 관한 단골 어용학자들의 시시콜콜한 좌담이 다시 한 시간…. 참으로 딱한 것은 생업에 바쁜 국민이 만사를 제쳐 놓고 섹스어필도, 재미도 없는 대통령의 ‘특별방송’을 오전 내내 세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서 들어 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처럼 신문이나 TV를 ‘집단적으로’ 본다면 몰라도 유신 독재 때에도 말은 마음대로 못해도 대통령의 특별방송을 안 들을 자유는 있었다.
▼국가원수의 말은 곧 국가 행동▼
하물며 요즘처럼 신문 간지마다 재미없는 기사가 없고 TV마다 재미없는 드라마가 없는 세월에 대통령의 말씀이라 해도 ‘존경하는 국민’에게 신문 사설 셋쯤의 장문을 읽도록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좀 무리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집권 당시 방송 채널을 독점했다고 비난 받았으나 방송 연설은 5분 이상 끌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말의 길이보다 알맹이다. 공을 들여 홈페이지의 글을 읽어 봤으나 그 내용은 5분의 1로 줄여도 좋을 만큼 지루했다. 중복이 많고, 말의 피루엣(제자리돌기)이 많고, 안 해도 좋을 너스레가 많다. 레토릭의 기본은 짧게 줄이는 생략이다. 가령 “사람은 죽는다. 김정일도 사람이다. 고로 김정일은 죽는다”는 것은 ‘논리학적 추론’의 진부한 진리다. 그러한 삼단논법에서 자명한 한두 명제를 생략하는 것, 예컨대 “나 드골도 사람이오. 영생할 수는 없소” 또는 “나 드골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오” 하는 것을 ‘수사학적 추론’ 또는 수사학의 ‘생략 삼단논법’이라고 한다.
좋은 글은 짧은 글이다. 짧게 글을 쓰려면 시간이 걸리고 공이 든다. “시간에 쫓겨 글이 길어지겠습니다”고 한 것은 어느 유명한 고전주의 작가의 서한 서두의 말이다. 필부의 글도 그럴진대 하물며 국가원수의 글은 아무리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도 장황해서는 안 된다. 장부의 한마디가 천금의 무게를 갖는다면 4000만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한마디는 억만금의 무게를 갖는다. 스스로 레토릭의 대가였던 빌리 브란트는 총리 재임 시 자기보다 많은 연봉을 주며 명문장가인 클라우스 하프레히트를 연설문 작성자로 초빙했다. 총리의 말이 갖는 무게 때문이라 할 것이다. 국가 정상의 말은 곧 국가의 행동이다. 전시에는 포탄으로 말을 한다면 평시에는 말로 대결한다.
▼말 길어지면 실수하기 쉬워▼
말이나 글이 길어지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국가원수나 일개 필부나 매한가지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하기 쉽고 적어도 말하는 사람의 속이 들여다보여 깊이가 없어진다. ○, × 시험문제로는 제대로 헤아릴 수 없던 학생들의 실력이 긴 글을 쓰게 해 보면 사고력 표현력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격 품성 교양까지 드러난다. 그게 사제지간(師弟之間)에선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사이의 대외 관계에 있어선 다르다. 상대국에 우리나라의 국가원수가 그 속내를 다 드러내 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나는 내가 대일 관계에서 대통령 편이라고 생각한 다음에는 대통령의 긴 글, 많은 말을 대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최정호 객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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