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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평양서 울린 미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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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5-07-04 18:39 조회3,4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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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평양서 울린 미국 국가


 엊그제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을 가득 메운 북한 관중들은 착잡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북한 선수와 미국선수가 맞붙은 세계여자권투평의회(WBCF)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장내에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국가인 ‘애국가’(한국 국가와는 다른 것)도 흘러나왔다. 링 위에는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인공기와 함께 나부꼈다. 관중들은 미국 국가가 연주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한다.

▶북한 관중들이 미국 국기와 국가에 대해 깍듯한 매너를 보인 것은 사전에 당국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관중들이 자발적으로 그랬다면 아마 북한 당국은 지금쯤 평양 시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검열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미국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북한 경기장의 모습은 북한 당국이 미국을 향해 보내는 또 하나의 연출된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의 면담 때 부시 미국대통령을 ‘각하’라고 호칭했던 의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북한주민이 평소 미국 국기를 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학교 미술 시간에 도망가는 미군 탱크를 그리면서 옆에 찢어진 성조기를 그려넣기는 한다고 한다. 북한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 ‘공산주의도덕’ 교과서 29과의 제목은 ‘살인마 미국놈’이다. 여기에는 남한의 10살 된 구두닦이 소년 창호가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 쓴 승냥이인 양키 두 놈’에게 구두 약칠 값을 달라고 하다가 살해당해 바닷속에 던져진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 생활 속의 미국에 대한 적대감도 여전하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만든 평양 개선문 가운데로는 자동차들이 다닌다. 그런데 미국산 자동차만은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한다. 미국제 낡은 지프를 타고 이곳을 지나려다 인민보안원(경찰)의 제지를 받고 개선문을 빙 둘러 가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탈북자도 있다. 독일차 일본차는 괜찮지만 미국차만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래도 미국 달러가 북한의 시골 구석구석에서까지 북한돈보다 더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에게 미국은 이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북한 정권이 미국 때문에 자신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주민 교육을 시키면 시킬수록, 주민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살 길도 결국 미국을 통해서 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평양 경기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준 현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김현호 논설실장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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