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현황에 대한 업계의 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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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4-10 00:00 조회3,8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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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앙일보의 <죽비소리>에 대한 지호 출판사 사장님의 댓구를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잡지 <텍스트> 4월호에서 중앙일보 죽비소리를 다루었네요. 길지만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관된 리뷰정신이 있어야
지난 2월 22일자 중앙일보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지면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책과 나> 코너 대신 “단순 다이제스트식 리뷰를 넘어 출판물을 비판적으로 읽어보자는 의도”로 <죽비소리>를 신설한 것이 그것이다. ‘북섹션은 리뷰를 가장한 제2의 홍보지면’이라는 뼈아픈 얘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북섹션과 홍보 사이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겠노라 하는 그 시도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죽비소리>가 맨 먼저 정색하고 나선 문제는 부실한 번역이었다. 그 동안 몇몇 전문가들이나 눈밝은 독자들 사이에서는 ‘○○ 출판사와 ○○○ 역자의 외서는 사 보지 않는다. 번역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얘기가 공공연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지난 3월 8일자 한겨레는 참담한 번역의 현장을 보도한 바 있기도 하다. 영미문학연구회(공동대표 전수용·윤지관) 산하 번역평가사업팀(팀장 김영희 한국과학기술대 교수)이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영미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의 ‘샘플평가’결과는 사실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평가팀은 우선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 「오만과 편견」의 11개 번역본을 검증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평가팀을 이끌었던 김영희 교수가 “믿고 추천할 만한 번역본을 추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할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비문非文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는 정도의 심각한 오역이 부지기수이고, 기존의 판본을 거의 베끼다시피 해 번역자와 출판사의 불량한 양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판본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책마저도 ‘기초공사 전면부실’에서 예외가 아님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일보의 <죽비소리>가 신간 번역서의 부실을 꼬집었다는 것은 정당한 북리뷰라는 차원에서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오역 투성이 교양과학책 당장 리콜해야”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의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하자면; “부실한 번역으로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문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붉은 여왕」(김윤택 옮김, 김영사)과 「루시의 유산」(한상희·윤지혜 옮김, 한나)을 꼽을 수 있다. 외국에서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저’로 이름을 떨친 책들이다. 하지만 번역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요령부득의 표현이 가득하다.” 게다가 기사는 원문대조―올 2월에 나온 「루시의 유산」보다는 지난 해 8월에 출간된 「붉은 여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를 통해 오류판정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고 있기도 하다. 기사에 따르면 원서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한 대목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반박의 여지가 없을만큼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던만큼, <죽비소리>의 파장은 꽤 컸다. 3월 8일자 보도에 의하면, 「루시의 유산」을 출판한 한나출판사가 약 1천부 이상 팔린 이 책에 대해 환불조치를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환불조치는 국내 출판 사상 처음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붉은 여왕」을 펴낸 김영사는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바로 잡아 개정판을 내 교환을 해 주거나 환불조치를 시행하는 등의 후속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중앙일보에 이어 한국일보 역시 번역서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나섰다. 한국일보는 3월 1일자 <책갈피>라는 내부칼럼을 통해서 최근에 출간된 「도시계획」(르 코르뷔지에 지음, 정성현 옮김, 동녘)이 북리뷰 대상에서 제외된 사연을 공개했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 탓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직접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어느 대목이 문제인지를 페이지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 본문뿐 아니라 역주 또한 문제라는 지적을 덧붙이고 있다. 더불어 2월에 발간된 「미국은 영원한 강자인가」(장 프랑수아 르벨 지음, 조승연 옮김, 일송북) 역시도 번역과 표기법에 있어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번역서를 이렇게 황당스런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학계와 출판계 모두 비슷한 의견을 내 놓는다. 대표적으로는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3월 18일자 한국일보가 중계한 좌담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출판인들의 모임인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소속된 인문·사회과학 출판인들은 번역서를 홀대하는 풍토를 부실번역의 주범으로 꼽는다. 번역작업이 학계에서도 합당한 대우와 인정을 받는다면 자연히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에 관심을 갖게되고, 따라서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수준높은 번역결과물이 출판될 것이라는 얘기다.
학문 및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은 번역의 위태로움을 낳는 구조라는 지적은 분명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북섹션 또한 부실한 번역서가 양산되는 구조 속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엉터리 반역을 도모하는 번역서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북섹션은 줄곧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묵인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부실 번역으로 지목된 「붉은 여왕」 「루시의 유산」 「도시계획」 등은 출간당시 한결같이 여러 신문에 의해 ‘적극추천’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표적으로 「붉은 여왕」의 경우를 보자.
출간 당시 「붉은 여왕」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눈부실 지경이다. 지난해 9월 조선일보는 「붉은 여왕」을 ‘이달의 책’에 선정했으며, 연말결산에서는 ‘올해의 책 베스트10’에도 올려놓았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은 2002년 9월 14일자 조선일보를 통해 “어려운 과학개념들을 쉽고 흥미롭게 서술한 저자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한다고 쓰고 있다. 부실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쉽고 흥미로운 서술’이 읽힐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번역서가 아니라 원저만을 보았던 것일까.
중앙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교적 전문가 외고를 아끼는 편에 속하는 중앙일보 역시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의 외고를 받아 비중있는 리뷰를 내보낸 바 있다. 이인식 소장의 리뷰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금 들춰보자면 다음과 같다; “근래 잡다한 낡은 지식을 긁어모은 과학책을 펴내는 국내 일부 필자들은 옮긴이의 지적처럼 ‘훌륭한 과학서적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 이 책 앞에서 한번쯤 심호흡을 해볼 필요가 있다. 끝으로 지난 달 펴낸 졸저 「성과학탐사」를 집필하면서 이 책에 신세졌음을 밝혀두고 싶다.” 물론 원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앞섰을 테지만, 번역자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하면서도 정작 그 번역의 치명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의외다. 이는 분명히 전문가들의 ‘책임방기’에 해당될 터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정확히 책의 가치를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들이 정말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의 「붉은 여왕」에 대한 지지가 외고에서만 끝난 것은 아니다. 2002년 11월 8일자 <숨은 책 찾기> 코너를 보자. 1995년에 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를 반추하는 이 기사에서 김성희 기자는 「붉은 여왕」에 대해 추천의 변으로도 읽힐 법한 개인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붉은 여왕」이)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참신하다고 봅니다”라고 말이다. 전문가들이 추천했고, 여러 기자들이 인상적으로 읽었다던 「붉은 여왕」, 왜 당시에는 아무도 번역의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이래저래 의문이다.
이런 정황들을 놓고 보자면, 신문 북섹션은 분명 ‘오역의 책’을 확대재생산하는 ‘중간책’으로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간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속보’ 위주의 시스템 속에서 번역의 문제까지 꼼꼼하게 따져볼 객관적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출판사와의 미묘한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보태진다면 비판의 태도는 더욱 움츠러들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 ‘깨어진 침묵’은 반갑지만, ‘책과의 긴장’뿐만 아니라 ‘북섹션 스스로의 긴장’ 또한 북섹션에 반영되길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죽비소리>와 같은 코너에 거는 기대는 크지만, <죽비소리> 코너 하나가 출판계의 현실을 모두 감당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궁극적으로 북리뷰 시스템 자체가 개선돼야만 진정한 ‘비판의 힘’이 살아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은 ‘한건주의’로 매도당하거나 ‘누워서 침뱉기’로 조소받을지도 모른다. ‘밖’을 향한 비판이란 그렇게 ‘안’을 동시에 챙기지 않으면 맥빠지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늘 어려운 그 무엇이다.
북리뷰의 공공성 회복을 기대하게끔 만든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반겨 맞으면서, 더불어 그 비판이 더욱 건강한 것이길 기대한다.
/조은영 기자 dorazzang@texttata.com
일관된 리뷰정신이 있어야
지난 2월 22일자 중앙일보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지면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책과 나> 코너 대신 “단순 다이제스트식 리뷰를 넘어 출판물을 비판적으로 읽어보자는 의도”로 <죽비소리>를 신설한 것이 그것이다. ‘북섹션은 리뷰를 가장한 제2의 홍보지면’이라는 뼈아픈 얘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북섹션과 홍보 사이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겠노라 하는 그 시도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죽비소리>가 맨 먼저 정색하고 나선 문제는 부실한 번역이었다. 그 동안 몇몇 전문가들이나 눈밝은 독자들 사이에서는 ‘○○ 출판사와 ○○○ 역자의 외서는 사 보지 않는다. 번역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얘기가 공공연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지난 3월 8일자 한겨레는 참담한 번역의 현장을 보도한 바 있기도 하다. 영미문학연구회(공동대표 전수용·윤지관) 산하 번역평가사업팀(팀장 김영희 한국과학기술대 교수)이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영미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의 ‘샘플평가’결과는 사실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평가팀은 우선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 「오만과 편견」의 11개 번역본을 검증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평가팀을 이끌었던 김영희 교수가 “믿고 추천할 만한 번역본을 추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말할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비문非文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는 정도의 심각한 오역이 부지기수이고, 기존의 판본을 거의 베끼다시피 해 번역자와 출판사의 불량한 양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판본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책마저도 ‘기초공사 전면부실’에서 예외가 아님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일보의 <죽비소리>가 신간 번역서의 부실을 꼬집었다는 것은 정당한 북리뷰라는 차원에서는 뒤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오역 투성이 교양과학책 당장 리콜해야”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의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하자면; “부실한 번역으로 원저의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문제다. 대표적인 예로는 「붉은 여왕」(김윤택 옮김, 김영사)과 「루시의 유산」(한상희·윤지혜 옮김, 한나)을 꼽을 수 있다. 외국에서는 ‘명쾌하고 논리적인 명저’로 이름을 떨친 책들이다. 하지만 번역판은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요령부득의 표현이 가득하다.” 게다가 기사는 원문대조―올 2월에 나온 「루시의 유산」보다는 지난 해 8월에 출간된 「붉은 여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를 통해 오류판정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고 있기도 하다. 기사에 따르면 원서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한 대목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반박의 여지가 없을만큼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던만큼, <죽비소리>의 파장은 꽤 컸다. 3월 8일자 보도에 의하면, 「루시의 유산」을 출판한 한나출판사가 약 1천부 이상 팔린 이 책에 대해 환불조치를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환불조치는 국내 출판 사상 처음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붉은 여왕」을 펴낸 김영사는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바로 잡아 개정판을 내 교환을 해 주거나 환불조치를 시행하는 등의 후속조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중앙일보에 이어 한국일보 역시 번역서의 문제점을 언급하고 나섰다. 한국일보는 3월 1일자 <책갈피>라는 내부칼럼을 통해서 최근에 출간된 「도시계획」(르 코르뷔지에 지음, 정성현 옮김, 동녘)이 북리뷰 대상에서 제외된 사연을 공개했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 탓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직접적인 이유를 제시하면서, 어느 대목이 문제인지를 페이지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 본문뿐 아니라 역주 또한 문제라는 지적을 덧붙이고 있다. 더불어 2월에 발간된 「미국은 영원한 강자인가」(장 프랑수아 르벨 지음, 조승연 옮김, 일송북) 역시도 번역과 표기법에 있어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번역서를 이렇게 황당스런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학계와 출판계 모두 비슷한 의견을 내 놓는다. 대표적으로는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3월 18일자 한국일보가 중계한 좌담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출판인들의 모임인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소속된 인문·사회과학 출판인들은 번역서를 홀대하는 풍토를 부실번역의 주범으로 꼽는다. 번역작업이 학계에서도 합당한 대우와 인정을 받는다면 자연히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에 관심을 갖게되고, 따라서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수준높은 번역결과물이 출판될 것이라는 얘기다.
학문 및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은 번역의 위태로움을 낳는 구조라는 지적은 분명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북섹션 또한 부실한 번역서가 양산되는 구조 속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엉터리 반역을 도모하는 번역서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북섹션은 줄곧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묵인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부실 번역으로 지목된 「붉은 여왕」 「루시의 유산」 「도시계획」 등은 출간당시 한결같이 여러 신문에 의해 ‘적극추천’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표적으로 「붉은 여왕」의 경우를 보자.
출간 당시 「붉은 여왕」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는 눈부실 지경이다. 지난해 9월 조선일보는 「붉은 여왕」을 ‘이달의 책’에 선정했으며, 연말결산에서는 ‘올해의 책 베스트10’에도 올려놓았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은 2002년 9월 14일자 조선일보를 통해 “어려운 과학개념들을 쉽고 흥미롭게 서술한 저자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한다고 쓰고 있다. 부실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쉽고 흥미로운 서술’이 읽힐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번역서가 아니라 원저만을 보았던 것일까.
중앙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교적 전문가 외고를 아끼는 편에 속하는 중앙일보 역시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의 외고를 받아 비중있는 리뷰를 내보낸 바 있다. 이인식 소장의 리뷰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금 들춰보자면 다음과 같다; “근래 잡다한 낡은 지식을 긁어모은 과학책을 펴내는 국내 일부 필자들은 옮긴이의 지적처럼 ‘훌륭한 과학서적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 이 책 앞에서 한번쯤 심호흡을 해볼 필요가 있다. 끝으로 지난 달 펴낸 졸저 「성과학탐사」를 집필하면서 이 책에 신세졌음을 밝혀두고 싶다.” 물론 원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앞섰을 테지만, 번역자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하면서도 정작 그 번역의 치명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의외다. 이는 분명히 전문가들의 ‘책임방기’에 해당될 터이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정확히 책의 가치를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그들이 정말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중앙일보의 「붉은 여왕」에 대한 지지가 외고에서만 끝난 것은 아니다. 2002년 11월 8일자 <숨은 책 찾기> 코너를 보자. 1995년에 발간된 「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를 반추하는 이 기사에서 김성희 기자는 「붉은 여왕」에 대해 추천의 변으로도 읽힐 법한 개인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붉은 여왕」이)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참신하다고 봅니다”라고 말이다. 전문가들이 추천했고, 여러 기자들이 인상적으로 읽었다던 「붉은 여왕」, 왜 당시에는 아무도 번역의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이래저래 의문이다.
이런 정황들을 놓고 보자면, 신문 북섹션은 분명 ‘오역의 책’을 확대재생산하는 ‘중간책’으로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간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속보’ 위주의 시스템 속에서 번역의 문제까지 꼼꼼하게 따져볼 객관적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출판사와의 미묘한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보태진다면 비판의 태도는 더욱 움츠러들 수도 있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 ‘깨어진 침묵’은 반갑지만, ‘책과의 긴장’뿐만 아니라 ‘북섹션 스스로의 긴장’ 또한 북섹션에 반영되길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죽비소리>와 같은 코너에 거는 기대는 크지만, <죽비소리> 코너 하나가 출판계의 현실을 모두 감당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궁극적으로 북리뷰 시스템 자체가 개선돼야만 진정한 ‘비판의 힘’이 살아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은 ‘한건주의’로 매도당하거나 ‘누워서 침뱉기’로 조소받을지도 모른다. ‘밖’을 향한 비판이란 그렇게 ‘안’을 동시에 챙기지 않으면 맥빠지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늘 어려운 그 무엇이다.
북리뷰의 공공성 회복을 기대하게끔 만든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반겨 맞으면서, 더불어 그 비판이 더욱 건강한 것이길 기대한다.
/조은영 기자 dorazzang@texttat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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