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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악마는 외국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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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11-14 15:30 조회1,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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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외국어를 좋아한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중철 010-5214-1314

아무리 생각을 말자 해도, 시간이 흘러도 답답한 가슴은 더 옥죄어온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사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순실, 죽은 최태민, 우병우, 김기춘, 이정현, 차은택, 문고리 3인방의 얼굴을 매일 언론에서 마주하다 보면 저들이 사탄이란 확신이 더 짙어진다. 박근혜의 얼굴은 사탄이라기보다 사탄의 꾐에 빠진 자기 생각 없는 바보 공주의 모습이지만 보기 싫기는 마찬가지다. 언론에 매일 등장하는 최순실의 옆 모습을 보라! 그의 눈빛을 보라. 바로 사탄이다. 대검 포토라인에서 기자를 노려보는 우병우의 눈빛은 바로 가장 사악한 사탄의 것이다. 모든 세상을 적대시하며 비웃는 독사의 눈이다.

이 사탄들은 모두 다른 눈빛과 표정을 갖고 있다. 다 사탄이지만 그 역할에 따라 조금씩 다른 느낌을 준다. 그들은 변신에 능하다. 이름 바꾸기도 잘하지만 차은택의 대머리에서 보았듯이 외모도 변화무쌍하다. 모두가 쉽게 자신이 사탄임을 인정하고 물러갈 귀신들이 아니다. 특히 가장 끝까지 버틸 사탄은 우병우다. 그의 눈빛과 몸짓을 보라. 죽을 때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천재”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물리칠 유일한 방도는 밴 헬싱 박사가 뉘우칠 줄 모르는 흡혈귀 드라큘라에게 그랬듯이 그들의 가슴에 쇠말뚝을 박는 것이다. 드라큘라가 쇠말뚝에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했다는 대목은 없다. 저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일단 그들의 가슴에 하나씩 쇠말뚝을 박아라! 그것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터질듯한 가슴을 진정시킬 유일한 방도다.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더블루K, 포레카, 비덱, 아프리카… 최순실 일당이 국정을 농단하고 피 같은 국가예산과 재벌들의 눈먼 돈을 횡령할 때 도구로 쓴 조직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외국어로 되어있다. 악마들이 입고 신는다는 프라다같은 명품들 덕분에 외국어가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려서 일까?
필자는 2015년 6월 17자 한겨레신문 [왜냐면] 난에 기고한 [유체이탈화법 치유책]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박 대통령이 취임 뒤 몇 차례 해외 순방여행에서 영어와 중국어, 프랑스어로 연설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을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외국어는 자신의 모국어와 똑같다. 모국어 억양과 속도와 똑같이 외국어를 한다. 또박또박 한마디 실수 없이 하지만 웅변과 감정이 없어 국민들은 곧 싫증을 느낄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이제 국민들은 싫증을 넘어 ‘유체이탈’이라는 표현으로 대통령의 말을 미워하고 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박대통령이 읽은 외국어 연설들은 과연 누가 썼으며 대통령은 의미나 알고 읽었을까 의문이 든다. 모국어든 외국어든 의미를 머리로 다시 생각하며 읽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발음만 신경 쓰며 낭독하는 것은 전달력과 설득력에서 큰 차이가 있다.

최근 사태로 다시 팔리기 시작해 대박이 났다는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쓴 김대중·노무현 정부 연설문 담당 강원국 전 비서관은 지난 8월 16일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답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를 들었을 텐데 느낌이 어땠나?

“본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냥 써준 대로 읽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말을 들어보면 생각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은 생각도 있어야 되고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글과 말로 표현 못하는 경우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있다는 거다… 정리가 안 돼있는 것은 생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시는 몰라도 위기가 닥치면 위험해진다. 평소에 생각이 정리돼 있지 않은 지도
 자는 남에게 의존하게 되고 다급하면 허둥댈 수밖에 없다.”

지금 박대통령은 얼마나 허둥대고 있을까? 아. 이제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생각도 없었고, 있어도 직접 정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 두뇌 없는 봉을 잡고 사익을 챙긴 측근들이라고 자신들의 조직 작명에 쓴 외국어를 올바로 쓸 줄이나 알았을까? 아니다. 작당하러 해외 나갈 때, 1등석이나 비즈니스 석을 타고 가서 고급호텔에 머물면 알아서 대우해주니 애써 외국어를 잘 할 필요도 없다. 현지에서 사업얘기는 적당히 돈 주고 통역을 쓰면 되니까. 외국어 명칭은 다만 자신들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는 우매한 동포들을 살짝 현혹하는데 동원됐을 뿐이다.

차기 대통령은 외국어에 신경 쓰지 않고, 쉬운 우리말로 자신의 연설문을 직접 쓰거나. 바쁘면 연설작성 비서관의 힘을 빌더라도 ‘자신의 말”을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을 다시 뽑아야 한다. 이런 글을 써놓고 봐도 이번 사태로 전국민과 함께 받은 가슴 속 멍울은 가실 줄을 모르니 어이할꼬? (끝) 
 



 

 
 
 

곽중철 (2016-11-15 15:31:02) 
 
노무현: 말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리더가 된다.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곽중철 (2016-11-16 12:01:18) 
 
동아일보[광화문에서/전승훈]대통령의 말과 글쓰기
 전승훈 문화부 차장 입력 2016-11-16 03:00:00

  ‘상생’ ‘문화’ ‘창조’ ‘융합’ ‘콘텐츠’….

 설마 이런 단어가 나쁜 의미로 쓰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이 말을 들으면 권력을 등에 업은 자들의 후안무치한 날도둑질만 떠오르게 됐다.

 시작은 ‘상생과 공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내걸면서 자주 쓰던 용어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대통령 취임식 행사부터 중소기업 대행사에 맡겼다.

 이랬던 박 대통령이 임기 중반 대기업 총수들과 직접 독대하며 수백억 원 규모의 재단을 만들고 나선 것은 아이러니다. ‘상생과 공존’은 최순실과 차은택이 급조해 만든 ‘K’자로 시작되는 신생 기업들도 나랏일을 싹쓸이 수주할 수 있다는 말로 변질됐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차은택이 포스코 계열의 광고사를 강탈하려 했을 때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 인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거들기도 했다.

  ‘문화융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역대 정부 최초로 문화 정책이 4대 국정기조에 포함되자 문화계의 기대는 컸다. 프랑스의 문화대통령으로 칭송받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10분의 1만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미테랑은 1981년 취임 후 문화 진흥을 위한 ‘그랑프로제’를 내걸고 오늘날 파리의 관광명소가 된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초현대식 미테랑 국립도서관, 라데팡스 등을 건설했다. 이후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를 넘어 세계의 문화수도로 거듭났다.




 그러나 현 정부의 ‘문화융성’은 비선 실세의 가족과 친구만 융성시키는 정책이었다. 분야도 케이팝, 한식, 영상 콘텐츠 등 돈 되는 문화산업에만 집중됐다. 한 출판인은 페이스북에 “출판계는 돈이 안 돼서인가 차은택, 최순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자조했다. ‘문화창조융합본부’ ‘국가브랜드’ ‘케이스타일 허브’ 등 거창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문체부 담당 직원조차도 무슨 뜻인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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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실 게이트 이후 서점가에는 ‘대통령의 말하기’와 ‘대통령의 글쓰기’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했다. 대통령의 말과 글이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국정 농단 세력에 의한 자의적인 해석이 난무할 때 얼마나 부패의 악취가 진동하는지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하기’ 책에서 저자는 ‘생각이 곧 말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도자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표현은 끊임없는 사색의 결과이며, 철학에서 나온 말이어야 진정한 내 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박 대통령이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즉각적으로 판단·결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화융성’ ‘창조경제’와 같은 국정기조도 자신의 철학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비선 실세의 개입을 필요로 했고 그들의 농단에 휘둘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몰린 촛불시위의 민심은 분노에 앞선 부끄러움이었다. 대통령이 진짜가 아닌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의 기본적 말과 글조차 믿을 수 없다는 국가적 신뢰 붕괴에 대한 절망이었다. 그러나 100만 시민은 분노를 절제하고, 축제와 같은 평화시위를 해냈다. 외신들은 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위라며 놀라워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통령에게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을 더 이상 추락시킬 수 없다는 결의가 느껴지는 집단적 자각의 현장이었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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