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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1993년 UR협상 “영어 못해 입열기 겁나”(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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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9-07-20 11:34 조회3,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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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교섭본부 두 과장을 통해 본 협상력의 진화

《3월 말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 오전 9시에 시작된 한국과 유럽연합(EU)의 자유무역협정(FTA) 원산지 분과 협상은 밤 12시를 넘겨 계속됐다. 기계, 전기전자 분야에서 어느 정도 국내산 부품을 써야 ‘메이드 인 코리아’로 인정해 줄지를 놓고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됐는데….’ 김희상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FTA 협상총괄과장(39)은 상대방이 서서히 지쳐가는 모습에 그동안 갈고닦았던 협상 스킬을 구사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미리 준비한 양보안을 제시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오히려 요구 수준을 높였다.》

1993년 UR협상 “영어 못해 입열기 겁나”
2009년 FTA협상 “풀었다 죄었다… 능수능란”

김 과장은 이때다 싶어 지체 없이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이럴 거면 더 협상하지 맙시다!” 상대방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잘못되면 협상 자체가 깨질 수도 있는 상황. 의연한 겉모습과는 달리 가슴은 심하게 떨렸다. 1년 넘게 계속된 협상에서 한 번도 냉정을 잃지 않던 그가 흥분하자 상대방은 당황하며 “시간을 달라”고 한발 물러섰다. 김 과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대는 10분 후 다가와 “당신이 말한 대로 해보겠다”며 사실상 손을 들었다. 그날 협상을 마치고 귀가한 김 과장은 잠자리에 누워 혼잣말을 했다. ‘이제 나도 협상가 흉내는 낼 수 있게 됐구나….’

굵직한 대외 협상이 있을 때마다 한국 정부의 협상력은 어김없이 도마에 올랐다. 부실한 현장조사로 논리 싸움에서 뒤져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한일 어업협정협상, 이면합의 논란 속에 굴욕적인 결과를 감수했던 한중 마늘협상 등은 아마추어 수준의 협상력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한-EU FTA 타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협상능력은 ‘분명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협상의 바보’가 ‘협상의 우등생’으로 변신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통상교섭본부에서 협상의 고수(高手)로 성장한 김 과장과 홍영기 북미유럽연합통상과장(43)을 통해 한국 협상능력의 진화 과정을 살펴봤다.

○‘UR협상’ 거치며 중요성 깨달아

 홍 과장은 1991년 외무부 통상1과에서, 김 과장은 1993년 통상기구과에서 각각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외무부에서 통상 협상을 담당하는 인력은 둘을 포함해 25명 남짓에 불과했다.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벌일 때는 전담 인력이 부족해 각 과에서 긴급 차출한 직원들이 협상에 나섰다. 협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문외한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적도 있었다. 홍 과장은 “협상장에서 영어 실력이 부족해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돌이켰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역량 부족을 절감한 두 과장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홍 과장은 런던대에서 국제관계사와 개발경제학을 공부했고, 김 과장은 옥스퍼드대와 에든버러대에서 각각 외교관 과정과 법학을 공부했다. 김 과장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국제법과 통상법을 알아야 유능한 협상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UR 협상을 치르면서 대외 교역협상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1994년 상공자원부를 통상산업부로 개편했고 1998년에는 통상협상을 전담하는 통상교섭본부를 만들었다.

○협상의 바보엔 미래가 없다

 각 부처의 통상 기능을 모은 통상교섭본부가 출범하고 전문 인력이 배출되면서 한국의 협상 실력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03년 갈등조정협상센터를 만들어 정부의 협상 인력을 본격적으로 양성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000년대 들어서는 협상단의 전문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어졌다”며 “통상에 관심이 있는 공무원들이 유학을 다녀와 현장에 배치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통상협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2000년 한중 마늘협상에서 중국산 마늘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2002년 말에 끝내기로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정부의 통상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이 커졌다.

1999년부터 농업 협상을 담당했던 김 과장은 2004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쌀 협상에 참여했다. 그는 “농민단체에 설명하러 가면 ‘외교통상부 공무원은 싫다’는 말을 대놓고 하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놓았다. 스트레스를 받고 무리한 탓에 2006년에는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정부가 한-칠레 FTA 협상을 1999년 말 시작한 뒤 타결까지 3년이나 끌었던 데는 협상 실력을 의심하는 시선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최초의 FTA여서 혼선도 적지 않았지만 발효 이후 5년 만에 양국 교역량이 4.5배 증가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김 과장은 “다자간 협상은 처지가 비슷한 국가가 여럿 있어 서로 논리를 보완하면 되지만 양자간 협상인 FTA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국가를 상대로 FTA 협상을 벌이면서 협상기술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한국 협상팀은 끈질기고 터프하다”

한미 FTA와 한-EU FTA 협상을 거치면서 한국 협상팀은 대외적으로 ‘끈질기고 터프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김 과장은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고 죽기 살기로 협상을 하는 이미지라고 하더라”고 소개했다. 실제 EU 협상단은 한국의 협상력에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1990년대 협상 테이블에서 ‘하수(下手)’ 취급을 받았던 한국의 협상팀이 세계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FTA 협상이 큰 힘이 됐다. 현재 한국은 걸프협력회의(GCC)와 캐나다, 멕시코, 일본, 호주, 뉴질랜드, 페루 등과 동시에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각각의 협상팀은 개별 협상 과정에서 부실했던 점과 효과가 있었던 협상 기법 등의 노하우를 서로 공유한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배우는 경험들이 어느 협상 교과서에서도 나오지 않는 생생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높아진 대외 협상력과 달리 아직 갈 길이 먼 대내 협상력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2007년 4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됐지만 이후 국내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가 열리는 등 논란은 계속됐다. 지난해 쇠고기 추가협상에도 관여한 홍 과장은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국민과의 소통, 국민을 향한 진솔한 설득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고 말했다.

한-EU FTA 협상에서 원산지 부문을 맡았다가 막판에 협상을 총괄한 김 과장은 “농업 부문을 지금까지 10년 동안 담당했지만 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다”며 “그래도 늘 협상에서 최선을 다했고 이번에는 어디에 내놓아도 큰 흠이 없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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