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강의 확대, 그 불편한 진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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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2-06-07 18:22 조회2,9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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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강의 확대, 그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입력 2012년 06월 04일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이쯤 되면 유행을 넘어 대세다. 각 대학이 앞 다투어 비중을 높이고 있는 영어강의 얘기다. 요즘 분위기대로라면 10년 내에 영어강의의 비중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심화교육으로 완벽한 영어소통이 가능한 학생들을 배출해 세계화라는 도전에 대응해 나간다는 목표는 분명 의미심장하다. 해외로 유출되는 우수한 한국 학생들을 국내에 붙들어두는 한편 다른 나라 유학생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쟁력 있는 글로벌 대학’이 교육 분야의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를 해소하는 데도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취지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그늘은 있는 법이다. 특히 상당수 대학들이 무분별하게 영어강의를 늘리는 과정에서 두고 있는 무리수는 이런 명분을 무색하게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공계 분야의 영어강의는 충분히 가능할 테고, 또 학문의 성격상 그렇게 돼야 할 것이다. 경제·경영학처럼 계량적인 방법을 주로 쓰는 분야에서도 영어강의는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영어강의 의무화는 얘기가 다르다. 오히려 기대와 달리 그 폐해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어강의의 가장 큰 맹점은 교수와 학생들을 ‘무지의 공모자’로 만든다는 데 있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지 대학에서 10년 이상 교편을 잡았던 필자도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강의를 할 때는 머릿속에 담긴 지식의 70~80% 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끼곤 한다. 하물며 국내나 비영어권 국가에서 학위를 받은 신임교수들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를 영어로 진행한다는 건 지식전달체계에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더욱 난감한 건 학생들의 처지다. 아무리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친 학생이라면 영어로 된 강의내용을 50~60% 이상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달자의 한계와 수용자의 한계가 겹치면서 학습내용의 절반 이상이 전달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명확한 지식의 전수와 진지한 토론이 가능할까. 필자가 ‘무지의 공모자’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도 바로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런 엔트로피 현상 때문이다. 일부 교수들이 ‘한영 대역(對譯) 교수법’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영어의 수월성이란 도구적 이유가 과연 체계적 지식전달이라는 대학교육의 고유 목적을 손상해도 좋을 만큼 중차대한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달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영어로만 이루어진 강의는 사유의 폭도 제약하기 마련이다. 인문사회과학은 열린 사유와 치열한 토론을 기본전제로 한다. 그러나 외국어로 생각하고 발표할 때 학생들의 두뇌회전 속도나 즉응적인 토론실력은 모국어로 사고할 때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충분히 체화되지 못한 언어로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국의 역사와 정치·문화·사회·문학을 영어 교과서로 사유하고 토론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래서야 상상력과 논리력, 경험적 구체성과 토론의 기술로 무장한 우수한 인재를 사회에 배출해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영어로만 학문을 익힌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현안을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해 공론장에 제시하는 작업을 과연 수행할 수 있을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자 삶의 양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형평성 문제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 자녀들처럼 해외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거나 특목고에서 영어 심화훈련을 잘 받은 학생들은 곧바로 의무 영어강의의 최대 수혜자가 된다. 평범한 학생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동안 ‘부모를 잘 만난’ 학생들은 토론이나 질의응답에서 자연스레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성적을 독차지한다. 외국어의 수월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영어강의 의무화로 대부분의 학생이 출발선에서부터 뒤로 밀리는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셈이다.
영어강의의 중요성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수반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영어지상주의에 빠져 모국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모국어로 충분한 사고 훈련을 마친 학생들이 영어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옳은 방식이고, 이를 위해서는 영어강의를 강제화하는 대신 선택적으로 탄력성 있게 운용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에서조차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는 영어강의 의무화가, 특히나 이를 대학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무조건적인 영어지상주의가 감추고 있는 부작용을 대학과 교육당국, 기타 평가기관들이 냉철히 분석하고 그 개선책을 마련해 나가길 바란다.(끝)
[중앙일보]입력 2012년 06월 04일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이쯤 되면 유행을 넘어 대세다. 각 대학이 앞 다투어 비중을 높이고 있는 영어강의 얘기다. 요즘 분위기대로라면 10년 내에 영어강의의 비중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심화교육으로 완벽한 영어소통이 가능한 학생들을 배출해 세계화라는 도전에 대응해 나간다는 목표는 분명 의미심장하다. 해외로 유출되는 우수한 한국 학생들을 국내에 붙들어두는 한편 다른 나라 유학생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쟁력 있는 글로벌 대학’이 교육 분야의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를 해소하는 데도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취지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그늘은 있는 법이다. 특히 상당수 대학들이 무분별하게 영어강의를 늘리는 과정에서 두고 있는 무리수는 이런 명분을 무색하게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공계 분야의 영어강의는 충분히 가능할 테고, 또 학문의 성격상 그렇게 돼야 할 것이다. 경제·경영학처럼 계량적인 방법을 주로 쓰는 분야에서도 영어강의는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영어강의 의무화는 얘기가 다르다. 오히려 기대와 달리 그 폐해가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어강의의 가장 큰 맹점은 교수와 학생들을 ‘무지의 공모자’로 만든다는 데 있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지 대학에서 10년 이상 교편을 잡았던 필자도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강의를 할 때는 머릿속에 담긴 지식의 70~80% 정도밖에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끼곤 한다. 하물며 국내나 비영어권 국가에서 학위를 받은 신임교수들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를 영어로 진행한다는 건 지식전달체계에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더욱 난감한 건 학생들의 처지다. 아무리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친 학생이라면 영어로 된 강의내용을 50~60% 이상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달자의 한계와 수용자의 한계가 겹치면서 학습내용의 절반 이상이 전달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명확한 지식의 전수와 진지한 토론이 가능할까. 필자가 ‘무지의 공모자’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도 바로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런 엔트로피 현상 때문이다. 일부 교수들이 ‘한영 대역(對譯) 교수법’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영어의 수월성이란 도구적 이유가 과연 체계적 지식전달이라는 대학교육의 고유 목적을 손상해도 좋을 만큼 중차대한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달의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영어로만 이루어진 강의는 사유의 폭도 제약하기 마련이다. 인문사회과학은 열린 사유와 치열한 토론을 기본전제로 한다. 그러나 외국어로 생각하고 발표할 때 학생들의 두뇌회전 속도나 즉응적인 토론실력은 모국어로 사고할 때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충분히 체화되지 못한 언어로는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국의 역사와 정치·문화·사회·문학을 영어 교과서로 사유하고 토론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래서야 상상력과 논리력, 경험적 구체성과 토론의 기술로 무장한 우수한 인재를 사회에 배출해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영어로만 학문을 익힌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현안을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해 공론장에 제시하는 작업을 과연 수행할 수 있을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자 삶의 양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형평성 문제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 자녀들처럼 해외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거나 특목고에서 영어 심화훈련을 잘 받은 학생들은 곧바로 의무 영어강의의 최대 수혜자가 된다. 평범한 학생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동안 ‘부모를 잘 만난’ 학생들은 토론이나 질의응답에서 자연스레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성적을 독차지한다. 외국어의 수월성이라는 게 그리 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영어강의 의무화로 대부분의 학생이 출발선에서부터 뒤로 밀리는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셈이다.
영어강의의 중요성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수반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영어지상주의에 빠져 모국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모국어로 충분한 사고 훈련을 마친 학생들이 영어로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옳은 방식이고, 이를 위해서는 영어강의를 강제화하는 대신 선택적으로 탄력성 있게 운용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에서조차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는 영어강의 의무화가, 특히나 이를 대학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무조건적인 영어지상주의가 감추고 있는 부작용을 대학과 교육당국, 기타 평가기관들이 냉철히 분석하고 그 개선책을 마련해 나가길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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