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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중국전문 외교관 여소영씨(dongA.com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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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3-10-20 18:20 조회2,6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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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전문 외교관 여소영씨(dongA.com에서 펌)    2013/10/20 13:04 
중국전문 외교관 여소영씨
 기사입력 2013-10-19 03:00:00 기사수정 2013-10-19 14:33:56
토종 한국인인데… 아버지가 데려간 곳은 화교학교였다

 여소영 외교부 1등서기관(한반도평화교섭본부 평화체제과)이 서울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중국 관련 서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옆에 놓인 ‘중국 이야기’는 여 서기관을 아꼈던 김하중 전 주중대사가 올해 초 출간한 책이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화교도 아니면서 화교학교에서 초중고 과정을 모두 마쳤다. 외무고시를 치르지 않았지만 중국 담당 외교관이 됐다. 전문 통역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중국어 통역까지 맡고 있다…. 여소영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 평화체제과 서기관(38) 얘기다. 이 모두를 가로지르는 공통 화두로 ‘중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왜 ‘중국’에 파묻혔을까.

화교도 아니면서 화교학교에 다녔던 어린 시절

 여 씨라는 성(姓) 때문에 ‘화교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본관이 경남 함양인 ‘토종’ 한국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여운일 목사)는 그녀를 화교학교로 보냈다. “앞으로는 달걀 장사를 하더라도 중국에 가서 해야 한다.” 1 8년간의 화교학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중 수교도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 초의 일이다. 혜안일까, 무모함일까. 아버지는 어린 소영이를 ‘화교 소학교’에 데려간 뒤 “이 아이를 중국 전문가로 키우고 싶다”고 설득해 입학허가를 받아냈다. 아버지가 4남매 가운데 자신만 화교학교로 보낸 이유를 그녀는 지금도 모른다. “너는 앞으로 크게 될 거야. 네가 귀한 사람이라는 걸 항상 기억해라”던 말로 짐작만 할 뿐이다.

학교생활은 혹독했다. 특히 중고교 과정은 화교학교가 있던 대구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며 견뎌야 했다. 당시 화교학교는 20명이 같은 기숙사 방을 쓰고 한겨울에도 온수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나머지 가족 추스를 겨를도 없는 부모님에게 기댈 수는 없었다. 일부는 장학금으로, 나머지는 새벽부터 학교 교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와 용돈을 스스로 벌어 썼다. 당시 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써 준 구절(吃得苦中苦 方爲人上人·고생 중의 고생을 해봐야 비로소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은 두고두고 힘이 됐다. 다행히 성적은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1993년 고등학교 졸업 때는 외국인(한국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졸업생 대표 답사를 할 수도 있었다.

대학은 중국 본토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기 때문에 베이징(北京)대에 응시해 입학허가도 받았다. 하지만 양국 간 절차가 덜 정비돼 합법적인 유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곳이 국립 대만대 정치학과다. 대학에서는 장학금과 생활비도 받게 됐다. 하지만 마음까지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는 단교(斷交)한 한국 출신의 학생을 곱게 볼 리 만무했다. 마치 그녀가 단교를 결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국 신문을 구해 읽고 시사 잡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서 대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수업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필기하고 수업을 전부 녹음한 뒤 밤새 녹취를 풀어 공부하는 그녀의 열정에 한두 명씩 마음을 열었다. 공책을 빌려 달라는 동급생도 생겨났다. 그때 몸에 익은 필기 실력은 외교부에 들어온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통역에게는 하이힐도, 물 많이 마시는 것도 사치다


6월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대화를 통역하고 있는 여소영 1등서기관(박 대통령 왼쪽). 동아일보DB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어학에 재능이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글은 스스로 깨쳤다. 화교학교 생활 2년째가 되자 중국어가 불편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공중파 방송용 다큐멘터리를 번역하기도 했다.

대전 엑스포는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당시 일당 1만 원짜리 자원봉사를 하던 그녀였지만 출중한 통역 솜씨는 돋보였고 곧 오명 조직위원장의 통역 겸 의전 담당으로 정식 발탁됐다. 소영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93년의 일이다. 그때 통역한 인물로는 리란칭(李嵐淸) 중국 부총리, 톈지윈(田紀雲)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제1부위원장 등이 있다.

대만대를 졸업하고 대만중앙방송국(CBS)에서 아나운서 겸 기자로 일하던 1999년, 한국 정부에서 대통령 통역 겸 중국 전문가를 특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창 시절부터 중국 담당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그녀는 공모에 응했고 비로소 외교관이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외교부 본부와 주중 한국대사관을 번갈아 근무하며 외교 일선에서 뛰기 시작했고 장관급에서 시작된 통역은 국무총리, 국회의장을 거쳐 정상회담을 담당하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그녀의 통역 실력은 원자바오(溫家寶) 전 중국 총리가 “전 세계 중국어 통역 가운데 가장 잘한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우다웨이(武大偉) 6자회담 중국 수석대표는 “여 서기관의 중국어를 듣고 있으면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아 감동이 온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직접 들은 김하중 전 주중대사는 2008년 통일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파격적으로 그녀를 장관정책보좌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통역을 3D 업종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통역이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통역이 말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협상이 성사될 수도,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한 통역도 필요하지만 말투와 감정, 뉘앙스까지 전달할 수 있게 화자와 일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화자가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표시하는데도 상대방을 배려한답시고 톤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도 통역으로서는 금기다. 이해가 안 간다고 마음대로 ‘유창하게’ 통역을 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보안 유지는 필수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여 서기관은 박근혜 대통령과는 두 번의 인연이 있다. 박 대통령이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와 올해 6월 한중 정상회담 때 중국어 통역을 맡았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비공개 오찬 때 있었던 뒷얘기를 알려 달라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너무나 중요한 통역이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틀간 가방에 넣어둔 바나나 1개를 먹은 게 전부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통역은 화장실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만큼 물을 많이 마셔도 안 되고 지나치게 굽이 높은 신발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대통령 등 통역을 맡게 될 사람과는 다른 차로 이동한 뒤 행사장까지 뛰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화자보다 주목을 받으면 안 되니 튀는 색깔의 옷을 입는 것도 삼가야 할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해당 분야의 최신 동향이나 신조어 등을 꾸준히 공부해야 함은 물론이다.

외교관 생활도 올해로 15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통역은 물론이고 중국 전문가로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대학원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논문 작성만 남겨둔 상태다.

앞으로 중국 말고 어떤 일이 하고 싶으냐고 여 서기관에게 물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겠죠.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일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했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후배들이 꿈과 희망을 갖도록 돕고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해 애쓸 겁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시종일관 모범생이었던 여 서기관의 모범생다운 대답이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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