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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영어광(狂) 시대(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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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12-19 09:28 조회3,1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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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영어광(狂) 시대
 선우 정 도쿄특파원 su@chosun.com

철학(哲學)'은 일본이 만든 말이다. 계몽가 니시 아마네(西周)가 메이지시대(1868~1912년) 초기 '백일신론(百一新論)'이란 저서에서 서양 개념인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것이 처음이었다.

 '사회(社會)'도 마찬가지다. 신문기자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郞)가 1875년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사용하면서 서양 개념인 'society'에 해당하는 동양 한자권의 언어로 정착됐다.

니시는 해외 유학파였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면서 유럽 지식인들의 결사(結社)인 '프리메이슨'에도 가입했다. 그는 "국어(일본어)를 로마자(字)로 표기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초대 문부장관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 함께 급진적 영어 사용론자로 꼽힌다. 미국 유학파인 모리는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선 국어를 영어로 해야 한다"며 1885년 초등학교 영어 의무교육을 관철한 인물이다.

이들 영어광(狂)이 일생을 걸고 주력한 것은 서양의 근대적 개념을 국어로 대체하는 일이었다. 니시와 모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1873년 메이로쿠샤(明六社)란 학술 모임을 결성해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근대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언어들을 만들어냈다.

 '사회'란 말을 만든 후쿠치는 국내파였다. 막부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시찰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모리야마 에이노스케(森山榮之助)란 통역사에게 2년 동안 영어를 사사(師事)하고 전문용어를 번역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모리야마 역시 국내에서 라날드 맥도널드라는 일본 최초의 '네이티브 스피커' 교사에게 영어를 배운 뒤 1854년 일본에 상륙한 페리 제독의 통역을 담당할 만큼 전문가로 성장했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시대 일본의 영어 열기는 요즘 한국에 비견되는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 국어사전인 고지엔(廣辭苑)의 편저자인 신무라 이즈루(新村出)는 1889년 입학한 시즈오카(靜岡)중학교(지금 학제로는 고등학교에 해당)의 풍경을 회상기에 이렇게 묘사했다. "당시 영어 교육은 상당히 진전돼 있었다. 지리, 역사 등 교과서도 쉬운 영어로 제작돼 있었다."

시마네(島根)현 마스다(益田)시에선 이코지(醫光寺)란 사찰이 학원을 만들어 1887년부터 3년 동안 주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마스다 해안에 표류한 러시아 병사에게 일본 어부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고 하니, 100년 전 일본의 영어 열풍은 서민들에게까지 파급된 모양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반론은 있었다. 민권론자였던 바바 다쓰이(馬場辰猪)는 영어국어론에 대해 "영어를 할 수 있는 상층과 못하는 하층계급으로 국민이 분열된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과격한 영어 사용론에 대한 견제 논리로 유명하지만, 바바 스스로는 영국에서 유학했고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

얼마 전 본지 '기자수첩'에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가 영어를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기사를 쓴 뒤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들었다. 비정상적인 '영어 광풍'을 위대한 노학자까지 끌어들여 두둔한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비판의 내용보다는 영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민감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영어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논란이 된 노벨상 수상자 마스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 교수의 말이다. 자신 때문에 '영어를 못해도 괜찮다'는 풍조가 일본 사회에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든, 일본과 한국을 근대화시킨 주역들은 영어광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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