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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오역과 반역에 무심한 영어교육(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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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11-17 11:05 조회3,1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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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역과 반역에 무심한 영어교육
 정확한 이해보다 답 맞히기만 강조 점수 높아도 오류없는 소통엔 한계
 이윤재 번역가·영문 칼럼니스트

 입력 : 2007.11.16 22:40

얼마 전 서울대 규장각에서 영미문학연구회 주최로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에서 화초(잘된 번역)를 키울 것이냐 잡초(잘못된 번역)를 골라낼 것이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잡초를 골라내는 것은 수험생이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과 같다.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주요 중앙 일간지에 실린 잡초를 몇 개 골라보자.

 (잡초1) 어느 영문학자가 번역한 밴더빌트의 시구 ‘Love quietly comes / Long in time / After solitary Summers / And false blooms blighted’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외로운 여름과 / 거짓 꽃이 시들고 나서도 / 기나긴 세월이 흐를 때)에서 ‘solitary summers’를 ‘고요한 여름’으로, ‘false blooms blighted’를 ‘꽃들이 일시 피었다가 시들고 나서’로 바꾸어야 시인의 의도와 합치한다. false에는 ‘not permanent(일시적인)’란 의미가 있다.

 (잡초2) 학자들의 칼럼을 보면 장애인을 지칭하는 physically challenged를 ‘신체적으로 도전받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도전이란 ‘자기보다 나은 수준의 강자 또는 어려움에 싸움을 거는 것’이다. 이 번역대로 하면 ‘장애인이 정상인에게 신체적으로 도전받는’이라는 주객전도가 된다. 이러한 번역은 이른바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사회적으로 불쾌감을 주지 않는 공정한 표현이나 어구 사용)를 말하면서 그 정반대 결과를 불러오는 ‘반역’(反譯:원래의 의미와 반대되는 번역)이다. 바른 번역은 ‘신체적 결함에 스스로 도전하는’ 또는 ‘신체적 결함을 스스로 극복하는’이다. 생략된 부분을 살리면 ‘the disabled who are physically challenged by themselves’가 되어 주체도 객체도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인의 도전의 대상은 자기의 삶에 던져진 운명이다.

 (잡초3) 얼마 전 신문 문화면에 번역가들의 좌담이 실렸다. 오역의 대표적 예로 성경 마태복음의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을 들었다. 성경의 고본(稿本)을 옮기는 과정에서 ‘밧줄’이 ‘낙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어야 ‘바늘귀’와 어울린다는 주장을 들이대니 합리적인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고본은 희랍어로 쓰였다. 낙타(camel)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kamelon이고 밧줄(thick rope)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kamilon이다. 고본 대다수는 kamelon으로 기록하고 있고 극소수의 고본만이 kamilon으로 되어 있다. 오랜 역사를 이어 온 성경에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다면 진작 고쳤을 것이다. 수많은 영어 버전 중 어느 것도 ‘thick rope’라고 번역되어 있지 않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성곽 정문 이외에 낙타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별도의 작은 쪽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바늘귀’라 했다! 해진 후에 성문을 들어가려면 낙타를 억지로 밀어 넣어야 했다.

항상 문제되는 것은 출판사의 날림 번역이다. ‘다빈치 코드’에 오역이 많다고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얘기다. 훌륭한 번역은 source language(번역되기 전의 원문 언어)와 target language(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 간의 아름다운 조화이며, 해당 2개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번역은 오역이 되거나 반역이 되고 만다. 교정자가 전치사로 끝낸 처칠의 문장을 감히 바꾸어 놓자 처칠은 This is the kind of impertinence up with which I shall not put!(무례하게도 내가 참지 못하는 그런 짓을 하다니!)라고 메모해 놓았다. put up with는 강하게 결합된 숙어인데 put과 up with를 분리해 놓았으니 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답게 이 간단한 메모로 교정자의 잘못을 질타했다. 귀감이 된다.

문제는 앞으로다. 국민의 교양과 정신을 살찌울 지식 인프라에 투입될 대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걱정스러울 정도다. 현행 수능 영어는 감(感)으로 어림잡아 답을 찾는 문제 일색이다. 그러니 만점을 받는다 해도 그 영어는 별로 쓸모가 없다. 교육 당국은 현재의 출제 패턴을 과감하게 파괴해야 한다. 그래야 영어교육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오역과 반역의 해결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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