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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대통령의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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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01-21 14:50 조회2,6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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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장 곽중철(011-214-1314)

최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영어 실력에 대한 기사가 잇따르고 있다. 당선인이 통역 없이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고 연설까지 영어로 하는데 과연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호기심에서 나오는 보도들이다. 필자의 결론은 당선인이 통역 없이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1990년대 초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의 통역을 해본 적이 있다. 그는 영어를 직접 구사하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영어를 ‘눈치’로 거의 다 알아듣는 듯 했다. 특히 공사금액 같은 숫자가 나오면 통역을 확인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그에게는 <미사여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업>이 중요했다. 이 당선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수많은 해외여행을 하면서 현장에서 영어를 익혀 직접 구사하게 됐을 것이다. 많은 기업인이 해외여행 때마다 공항에서 영어회화 책을 사서 지루한 비행 시간 동안 한 권을 다 외워버린다고 하는 소문도 있듯이…

이 당선인 영어의 비결은 <자신감>이다. 그는 자신의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통한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영어로 농담을 해도 웃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지위가 높을수록 상대방의 말에 더 큰 주의를 기울여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 당선인은 현대그룹의 회장직을 거쳐 서울 시장, 이제는 대통령까지 되었기에 그의 말은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못 알아들으면 자기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당선인의 영어에는 특유의 억양이 있다. 한 사람의 외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모국어의 거울이다. 모국어를 들어보면 외국어 수준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모국어만큼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고, 모국어의 억양이 대부분 외국어에 그대로 묻어난다. 이 당선인의 영어에도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영어에는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강하다.  그가 고교 시절 미국에 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을 때 하던 영어와 거의 차이가 없다. 결코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막중한 유엔 사무총장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과 자신감이 있으면 외국어에도 그 자신감이 나타나고 약간 이상한 발음과 억양이 오히려 그의 언어적 <카리스마>가 되어 상대방을 휘어잡는다.

히딩크를 제외하고 본프레레부터 베어벡까지 네델란드 출신 축구 감독들의 영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축구협회의 통역을 거쳐 큰 문제없이 전달되었고 세계의 챔피언이 된 우리 체육인-- 박지성, 박세리, 최경주, 김연아, 박태환도 이제 국제무대에서 제법 훌륭한 영어를 구사한다. 문제는 <영어>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의지만 뚜렷하면 말은 그냥 나온다. <조기 유학>으로 대변되는 영어 학습 열풍의 동조자들도 이를 명심해야 한다. <유창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뚜렷한 논리>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작년 말 IOC 총회장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영어와 불어로 연설해 우리 평창을 누르고 소치가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되는데 일조한 예를 기억한다. 이제 우리도 그런 국제행사에서 거리낌 없이 영어로 연설하는 대통령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선인이 일단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면 “국가원수는 국제무대에서 모국어를 써야 한다는 관행”을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할 것이다. 당선인이 말이 느린 사람을 싫어한다는 소문도 있듯이 새 대통령의 통역은 빠르고 정확한 통역을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통역하는 시간을 기다릴 만큼 느긋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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