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문화 융성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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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11-21 14:10 조회1,0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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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칼럼 The Column] 슬픈 문화 융성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입력 : 2016.11.21 03:17
국정 농단 사태와 촛불 시위는
낙후된 정치 문화와 융성한 시민 문화가 충돌한 사건
후진 정부와 선진 시민의 '문화 격차' 해소하라는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
도심 한복판에 수십 만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집회가 질서와 평화를 잃지 않는 걸 보며 이게 '문화 융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구나 지난주 토요일 집회는 청와대의 반격과 함께 '박사모'의 맞불 집회가 보태지고,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해 충돌이 우려되었던 집회였다. 그러나 법원은 청와대 가까운 곳까지 시위를 허락했고, 집회는 평화롭게 마감됐다.
최루탄과 각목이 난무하는 포연 자욱한 거리에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숨바꼭질을 벌이던 시위 장면에 익숙한 중년 이후 세대에게는 촛불과 휴대폰 그리고 문화 행사가 곁들여진 느린 행진이 오히려 문화적 충격이다. 재야 인사가 들었던 마이크는 일반시민과 연예인 차지가 되었고, 핏발 선 구호는 창의성 번뜩이는 패러디물로 바뀌었다. 기이한 사인(私人)들과 비루한 엘리트들이 합작한 국정 농단을 국민은 해학과 풍자로, 또 시와 노래 같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콘텐츠로 녹여내 자신을 위로한다. 최루탄에서 촛불까지 30년 동안 우리 시위는 그렇게 다양하고 의젓해졌다. 이게 이른바 '문화 융성'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두 번째 토요 집회가 열렸던 지난 5일 세종문화회관 뒤뜰에서는 여느 때처럼 세종예술시장 '소소'가 눈길을 붙들었고, 세 번째 집회가 열렸던 12일 청계천에서는 서울빛초롱 축제가 훤한 불빛을 뿜어냈다. 청계천변에서 1만원을 내면 탈 수 있는 열기구와 각양각색의 먹을거리를 파는 푸드 트럭 사이로 발 디딜 틈 없이 지나다니는 가족 단위 행인과 커플들만 보면 영락없는 유원지 풍경이다. 네 번째 집회가 열렸던 지난 토요일 마지막 단풍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붐볐고, 논술고사도 예정대로 치러졌다. 나라 밖에서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튼튼하다. 그 뿐인가. 우리에겐 '하야'나 '탄핵'같은 단어에도 놀라지 않을 집단 기억과 튼튼한 정치 멘털이 있다.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4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국정 농단 사태와 그에 따라 일렁이는 촛불시위를 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나는 낙후된 (정치) 문화가 융성한 (시민) 문화와 충돌한 사건이라고 본다. 1970년대 흑백TV에나 어울릴 군상들이 컬러TV 시대에 활개친 사건이며, 컴퓨터 팬톤 컬러 시대에 오방색을 들이밀다 사달이 난 사건이다. 융성한 한류 문화가 해외로 뻗어가는 소프트파워 전성시대에 재벌들을 독대해 손쉽게 목돈을 조달하는 개발독재 시대 패러다임으로 문화를 융성시키겠다니, 그 부조화와 시대 역행이 삐꺽음을 내는 게 당연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공정함을 열망하는 사회에서 반칙을 밥 먹듯 하고, 배려와 나눔의 시대정신을 어기고 갑질과 몰염치를 자행했으니 시민들이 저항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의 수사학에는 자신의 권력이 잠시 위임 받은 것이라는 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문장으로만 보면 마치 대통령이 국민을 선택했다는 것 같다. 미용 주사 의혹이 불거지자 법률 대리인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 운운한 대목에선 웃음만 나온다. 일과 가정을 병행해본 여성이라면 그런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시민들이 분노하는 건, 그러니까 시대와 동떨어진 정권이 우리에게 떠넘긴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다. 자유 언론과 수평적 소통 시대에 침묵과 지시로 일관하는 정치의 참을 수 없는 오만함이다. 그러면서 문제 해결 능력은 없는 정치권의 무능과 후진성이다. 압축 경제성장 시대를 거쳐 어렵사리 열린 민주주의 시대의 끄트머리에 탄생한 지금의 정부에 대해 시민들이 요구하는 건 무작정 '퇴진'이나 '하야'가 아니라 '이제 정치도 좀 압축 성장하라'는 것이다. 법률적이건 정치적이건 뭔가 구체적인 치유책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라는 요구다. 이런 분노와 요구의 대상에는 야당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야당은 마치 자신들은 시민들의 함성에서 예외인 듯 착각하는 것 같다. 야당은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외치지만, 그들이 바로 정권을 잇는다고 해도 지금의 정치 후진성이 개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준비한다'는 뜬금없는 소문을 발설해 국민을 동요시키는 야당 대표의 경직된 얼굴을 보면 그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지금은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야당이 잡으면 최순실이 여럿이라는 우려 섞인 비아냥이 있는 것을 야당에서도 알아야 한다. 지금 같은 혼돈기에 야당이 정파적 이해에 빠져 정치 성장의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훗날 희대의 국정 농단의 주역이 된 지금의 정부 못지않게 국정 혼란을 정치 후퇴로 가져간 무능한 야당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문화는 거꾸로 갈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후진 문화가 선진 문화를 압도한 예는 별로 없었다. 후진 정부와 선진 시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뜨거운 함성은 시민과 정부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라는 요구이다. 시민 수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갈망하는 함성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입력 : 2016.11.21 03:17
국정 농단 사태와 촛불 시위는
낙후된 정치 문화와 융성한 시민 문화가 충돌한 사건
후진 정부와 선진 시민의 '문화 격차' 해소하라는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
도심 한복판에 수십 만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집회가 질서와 평화를 잃지 않는 걸 보며 이게 '문화 융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구나 지난주 토요일 집회는 청와대의 반격과 함께 '박사모'의 맞불 집회가 보태지고,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해 충돌이 우려되었던 집회였다. 그러나 법원은 청와대 가까운 곳까지 시위를 허락했고, 집회는 평화롭게 마감됐다.
최루탄과 각목이 난무하는 포연 자욱한 거리에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숨바꼭질을 벌이던 시위 장면에 익숙한 중년 이후 세대에게는 촛불과 휴대폰 그리고 문화 행사가 곁들여진 느린 행진이 오히려 문화적 충격이다. 재야 인사가 들었던 마이크는 일반시민과 연예인 차지가 되었고, 핏발 선 구호는 창의성 번뜩이는 패러디물로 바뀌었다. 기이한 사인(私人)들과 비루한 엘리트들이 합작한 국정 농단을 국민은 해학과 풍자로, 또 시와 노래 같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 콘텐츠로 녹여내 자신을 위로한다. 최루탄에서 촛불까지 30년 동안 우리 시위는 그렇게 다양하고 의젓해졌다. 이게 이른바 '문화 융성'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두 번째 토요 집회가 열렸던 지난 5일 세종문화회관 뒤뜰에서는 여느 때처럼 세종예술시장 '소소'가 눈길을 붙들었고, 세 번째 집회가 열렸던 12일 청계천에서는 서울빛초롱 축제가 훤한 불빛을 뿜어냈다. 청계천변에서 1만원을 내면 탈 수 있는 열기구와 각양각색의 먹을거리를 파는 푸드 트럭 사이로 발 디딜 틈 없이 지나다니는 가족 단위 행인과 커플들만 보면 영락없는 유원지 풍경이다. 네 번째 집회가 열렸던 지난 토요일 마지막 단풍놀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고속도로는 붐볐고, 논술고사도 예정대로 치러졌다. 나라 밖에서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튼튼하다. 그 뿐인가. 우리에겐 '하야'나 '탄핵'같은 단어에도 놀라지 않을 집단 기억과 튼튼한 정치 멘털이 있다.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4차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국정 농단 사태와 그에 따라 일렁이는 촛불시위를 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나는 낙후된 (정치) 문화가 융성한 (시민) 문화와 충돌한 사건이라고 본다. 1970년대 흑백TV에나 어울릴 군상들이 컬러TV 시대에 활개친 사건이며, 컴퓨터 팬톤 컬러 시대에 오방색을 들이밀다 사달이 난 사건이다. 융성한 한류 문화가 해외로 뻗어가는 소프트파워 전성시대에 재벌들을 독대해 손쉽게 목돈을 조달하는 개발독재 시대 패러다임으로 문화를 융성시키겠다니, 그 부조화와 시대 역행이 삐꺽음을 내는 게 당연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만큼 공정함을 열망하는 사회에서 반칙을 밥 먹듯 하고, 배려와 나눔의 시대정신을 어기고 갑질과 몰염치를 자행했으니 시민들이 저항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나'의 수사학에는 자신의 권력이 잠시 위임 받은 것이라는 의식이 실종되어 있다. 문장으로만 보면 마치 대통령이 국민을 선택했다는 것 같다. 미용 주사 의혹이 불거지자 법률 대리인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 운운한 대목에선 웃음만 나온다. 일과 가정을 병행해본 여성이라면 그런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시민들이 분노하는 건, 그러니까 시대와 동떨어진 정권이 우리에게 떠넘긴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다. 자유 언론과 수평적 소통 시대에 침묵과 지시로 일관하는 정치의 참을 수 없는 오만함이다. 그러면서 문제 해결 능력은 없는 정치권의 무능과 후진성이다. 압축 경제성장 시대를 거쳐 어렵사리 열린 민주주의 시대의 끄트머리에 탄생한 지금의 정부에 대해 시민들이 요구하는 건 무작정 '퇴진'이나 '하야'가 아니라 '이제 정치도 좀 압축 성장하라'는 것이다. 법률적이건 정치적이건 뭔가 구체적인 치유책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라는 요구다. 이런 분노와 요구의 대상에는 야당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야당은 마치 자신들은 시민들의 함성에서 예외인 듯 착각하는 것 같다. 야당은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외치지만, 그들이 바로 정권을 잇는다고 해도 지금의 정치 후진성이 개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준비한다'는 뜬금없는 소문을 발설해 국민을 동요시키는 야당 대표의 경직된 얼굴을 보면 그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지금은 최순실이 한 명이지만, 야당이 잡으면 최순실이 여럿이라는 우려 섞인 비아냥이 있는 것을 야당에서도 알아야 한다. 지금 같은 혼돈기에 야당이 정파적 이해에 빠져 정치 성장의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훗날 희대의 국정 농단의 주역이 된 지금의 정부 못지않게 국정 혼란을 정치 후퇴로 가져간 무능한 야당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문화는 거꾸로 갈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후진 문화가 선진 문화를 압도한 예는 별로 없었다. 후진 정부와 선진 시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뜨거운 함성은 시민과 정부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라는 요구이다. 시민 수준의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갈망하는 함성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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