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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이야기

월드컵 통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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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6-29 00:00 조회3,3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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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의 성적을 우려하던 분위기는
 폴란드를 2:0으로 이기고 난 후 완전히 바뀌었고
 우리 통역사들도 더 자신감을 갖고
 통역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날 밤 집에서 가족과 함께 TV를 봤는데
 너무 감격스러워서 경기 후 함께 집을 나와 근처 호텔에서
 드라이 진을 더블로 석잔이나 마시고서야 잠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8강전보다 그 첫 승리가 더 감격스러웠음은 나만이 아니겠지요.

일일 브리핑 동시통역을 비롯한 우리의 통역 업무도 더 자신있게, 더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통역사들은 언론인을 위한 사교 행사에 사회자로, 연설 통역사로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6월 20일부터는 미디어 센터와 FIFA 미디어 팀이 일본 요코하마 미디어 센터로 이동해 서울에서는 요코하마의 화상을 받아 통역하는 화상 회의 통역을 하게 되고, 그만큼 긴장감도 줄어들었습니다. 서울 미디어 센터의 기자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요.

나는 작년 켄페더레이션 컵 행사로 인연을 맺었던 아디다스 사가 다시
 아디다스 회장의 기자회견을 통역해줄 것을 의뢰에 미국 팀이 묵었던 서울 메리어트 호텔로 갔고, 작년보다 쉽게 임무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6/24, 월요일)

한독전이 있던 6월 25일(화) 두 시부터는 여의도의 MBC 스포츠 제작국으로 가 차범근과 펠레의 대담을 동시통역했습니다. 펠레는 영어에 능통하지 못해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못하는 것 같아 그의 말에 살을 붙여 통역했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낮 두시의 방송을 누가 보랴 싶었는데 녹화된 테입을 발췌 편집해 저녁 한독전 직전에 트는 바람에 곽교수 통역을 들었다고 반가와하는 사람이 많은데 놀랐습니다. 생방송 통역은 정말 많이 떨리는데 20년 정도 하고 나니 그 두려움이 less unpleasant 해 진다는 말에 공감을 느꼈습니다.

한독전에 패하고 난 후 미디어 센터에 오니, 월드컵이 끝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달 남짓 일한 미디어 센터도 그리워질 것이란 예감이 들면서 1988년 30대 초반 5년을 보낸 서울 올림픽이 끝난 후 너무 허무해 조직위 MPC 사무실에서 깡 소주를 드리켰던 추억이 떠 올랐습니다. 왜 인간이란 가만 있지 못하고 자꾸만 추억거리를 만드는 것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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