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정상회담 성공은 두 명의 입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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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505호]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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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北 정상회담 성공은 두 명의 입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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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 30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통역하는 사람이 2009년부터 국무부 소속으로 미 대통령들을 통역해온 이연향씨(오른쪽 두 번째)다. 이씨는 이번 미·북 정상회담 때도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사로 나설 전망이다.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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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판문점의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회담 후에는 사상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어 있다. 이 역사적 만남에는 분명히 김정은이 쓰는 한국어와 트럼프 대통령의
영어 사이의 통역이 필요하다. 우선 이 통역은 동시가 아닌 순차통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양측의 통역사가 통역부스에서 동시통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 앉은 두 정상의 곁에서 한마디 한마디 순차적으로
통역을 하게 될 것이다. 사상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이고 ‘북한의 비핵화’라는 무겁고 중차대한 주제를
다루게 되므로 한마디 한마디 확인을 하면서 회담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회담이 순조로이 끝나 양측이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면 동시통역을 할 수도 있다.
외교 관례상 트럼프 대통령의 영어 발언은 미국 측 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하고 김정은의 한국어 발언은
북한 측 통역사가 영어로 통역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측에서는
2009년부터 국무부 소속으로 미국 대통령들을 통역해온 미국 시민권자이자 베테랑 중년 여성 통역사인 이연향씨가 맡을 것이다. 북한 측도 김정은 전속 영어통역사가 있을 텐데 전문통역 훈련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북한식 외국어 훈련을 받은
북한 최고의 남성 통역사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가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동시통역까지 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정상회담의 통역을 맡아온 미국 측 통역 이연향씨가 맞닥뜨릴 문제는 김정은이
쓸 북한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김정은의 북한식 한국어를 직접 영어로 통역할 일은
없지만 북한 측 영어 통역이 정확한지를 어느 정도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트럼프 대통령의 적절한 대응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한의 역대 대통령은 많이 통역했지만 북한의 통치자를 통역하기는 처음이다. 북한 말의 억양과 여러 용어들이 생경하게 다가오면 순발력 있게 대처해야 한다.
북한 측 통역이 정확하지 못하면 트럼프에게 살짝 귀띔할 수도 있어야 한다. 트럼프는 “수가
틀리면 회담장을 떠나겠다”고 했으니 그 이유가 오역이어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최근 폼페이오 국무장관 내정자가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정은을 만났을 때는 북한의 통역사가 양측을
모두 통역했을 가능성이 크다. 극비방문이었지만 폼페이오 내정자가 통역사를 대동했다면 이연향씨가 아닌
주한 미국대사관의 전속 여성 통역사가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2009년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수행 통역을 했다. 그때 찍힌
기념사진이 아직 인터넷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녀는 필자의 제자이지만 당시 북한에서 통역을 할 때의
‘추억’은 스승에게도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필자가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 도중 북한 체육계
인사들의 기자회견 통역을 했을 때도 순차통역을 했기 때문에 남한과는 조금 다른 북한 말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호칭을 크게 싫어해 ‘조선’으로 불러달라고 공공연히 요구하면서 우리 보고는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자신들을 영어로는 ‘DPRK’로
불러주길 원했다. 따라서 이번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DPRK’, 남한을 ‘ROK’라고
통일해 지칭하고 이연향 통역사가 이를 받아 약칭으로 ‘조선’과 ‘한국’으로 통역하면 북한 측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2001년 3월 8일
미국의 신임 대통령 조지 W. 부시와 김대중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이 있던 날, 평소에는 보기 드문 통역 관련 기사가 국내 언론에 실렸다. ‘한·미
정상회담 통역 혼선’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미국 측 백악관 통역관의 실수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8일 새벽(한국시각)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회담 결과를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 통역관이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관련한 발언을 일부 통역하지 않아
한때 혼선이 빚어졌다. 논란은 백악관 통역관이 부시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통역하면서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약간의 회의(some skepticism)를 가지고 있다”는 발언을 소개한 뒤 부시 대통령의 후속발언을
불명확하게 전달한 데서 비롯됐다.
한국계 K씨가 맡은 백악관 통역은 “그것이 우리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부시 대통령의 후속발언을 우리말로 통역하면서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본래 의미에 충실하지 않게 통역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양국 정상이 대북정책을 놓고 ‘상당한 수준’의 이견을 보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대두됐고 기자회견장이 술렁거리기도 했다.>
오욕의 오역史
필자는 이 기사를 본 순간 바로 사건의 발단을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
실수한 백악관 통역관 K씨는 필자도 이미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때만
해도 10년 이상 미 국무부에서 한국어 통역을 도맡아 담당했던 K씨는
그때 벌써 나이가 60세를 넘긴 상태였다. 필자도 ‘미국
측 한국어 통역 담당’으로 일하던 K씨와는 1990년대 초
노태우 대통령 당시 짝을 이뤄 청와대에서, 또 백악관에서 같이 통역을 한 적이 있었다. 2010년 10월 당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일행이 북한을 방문하고
오는 길에 서울에 들러 한·미·일 3국 외무장관 회담을 할 때도 K씨와
함께 통역을 했었다. 그때 K씨는 필자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그날 아침 호텔 회의장 통역부스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3국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해 회담이 시작됐는데도 올브라이트 장관의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기로 돼 있는 K씨가 5분가량 늦게 부스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한·일 참석자들이 대충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들이라 회의 진행에 문제는 없었지만 통역사가 늦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기자회견장 통역부스에서 K씨를 만나
반갑게 “저를 기억하십니까?” 했더니 “아, 곽 선생, 기억합니다만 오늘 제가 머리가 너무 아프니 내버려두십시오”라고 말해 필자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당시 필자는 K씨가 북한에서 미국 대표단 영어 통역하랴, 김정일 등의 북한 말을 통역하랴 기진맥진했다고 이해했다. 필자도
며칠 새에 영어로, 프랑스어로 통역하다 보면 편두통이 생기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통역이라는 일은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된 일이다.
K씨는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국무부가 인정하는 한국어 통역 자격증(license)을
받은 자수성가형 통역사이지만 이번 미·북 정상회담 통역을 맡을 미 국무부의 이연향씨는 아직 젊고 전문적인 통역 교육을 받은 분이다. 통역대학원 졸업 후 수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순차통역을 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실 한·미 정상회담 같은 중요한 통역 현장에서 실수가 벌어진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연향씨가 국무부에서 한국어 통역을 맡기 전까지는 한·미 간 통역 오역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2005년 7월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의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에서 온 여성 통역사가 팔레스타인
‘당국(authorities)’이라는 말을 ‘권위’로, ‘비핵화
선언’을 ‘비핵화 동맹’으로 옮겨 기자단에 동요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 여성 통역사는 라이스 장관의
발언을 다 옮기지 않거나 중요한 부분을 누락하기도 했다. 이 통역사의 실수는 다음날 많은 신문이 기사로
지적했다.
2006년 9월 14일
노무현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측이 새로
고용한 남성 통역사는 실수투성이였다. 금방 눈치챌 수 있는 오역이 없어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녹화 테이프를
자세히 들어보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말 가운데 제대로 통역된 게 거의 없을 정도였다.
예컨대 “한·미 관계는 강하고도 매우 중요한 관계”라는 첫 발언을 “강력한… 그런 관계”라고 얼버무렸다. 제일 심각한 것은 “미국이 한반도 안보에 변함없는 의지를 갖고 있다(committed)”는
부시의 메시지를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안보에 책임을 여전히 지고 있다”는 메시지로 전달했다는 점이다.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는 오역이었다. 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시기 문제를 잘 해결하라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에게 당부했다”는 말은 “미국 국방장관과 한국의 상대가 적절한 날짜를 잡기로 결정했다”로 통역됐다. 전작권
관련 발언이 그렇게 ‘느슨하게’ 전달돼서는 안 됐다.
당시 통역사의 실수는 두 정상을 망신 주는 단계까지 나갔다. “저
기자가 노 대통령께도 질문했느냐”는 부시의 질문을 통역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었느냐”고 전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부시에게 “대답을 잘 하셨습니다”라고 했고, 한국 측 통역은 이를 영어로 통역했다. 부시는 얼떨결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까지 했다.
외국인 기자들이 이런 어색한 장면에 “와~” 하고 웃어버렸다.
이날 통역사의 실수는 부지기수였다.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5개국”을 “평화적 동맹의 5개국”으로, “핵무장 국가의 위협 인식”을 “핵무기 확인”으로, “김정일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하면 더 좋은 길이 있다”는 말을 “제(부시)가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엉뚱하게 옮겼다. 심지어 “6자
회담을 통해 북한에 전달한 메시지”가 “6자 회담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둔갑하기까지 했다.
당시 이런 어처구니없는 통역 실수가 나온 것은 그때만 해도 미국 정부가 통역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데 있었다. 일종의 ‘미국 제일주의’ ‘영어 제일주의’에서 나온 ‘무심함’이 이런 엉터리 통역을
부른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벌어졌던 백악관 통역사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미국 내에서 실력과 경험을 겸비한 한국 출신 미국 시민권자를 찾지 못한다면 관례를 깨고 차라리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통역사로
근무하는 통역대학원 출신들에게 통역을 시켜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당시 엉터리 통역을 꼬집은 필자의 글은 한·미 외교가에 화제가 되었고, 주한 미국대사관의 번역을 거쳐 워싱턴 국무부에 보고되기까지 했다. 필자의
글이 한국어 통역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 이연향씨가 국무부에 스카우트되는 계기가 됐고 그때부터 한·미 간 오역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기대에 못 미치면 회담장을 떠나겠다”고 했다. 실패한 회담의 경우 흔히들 원인 분석을 하면서 “통역이 잘못됐다”고 통역사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무쪼록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번 회담에서 양측의 통역사는 신중하면서도 매끄럽게 임무를 완수해주기를
빈다.[End_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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