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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러사건과 CNN동시통역

매체명 : 일반   /   보도일자 : 0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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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NN 통역, 왜 어려운가?

곽중철 011-214-1314/ 961-4182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통역번역센터 책임교수



1991년 말 걸프전에 이어 최근 미국에서 전대미문의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의 24시간 뉴스채널 CNN이 다시 각광을 받고있고, 이에 따라 국내 TV 방송사에서는 CNN의 생중계를 동시 통역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시간으로 밤늦게 터져 우리 방송사들은 통역사를 확보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우선 영어에 능통한 기자나 자체 고용한 통역사들을 투입해 급한 불을 끄면서 유능한 통역사 확보에 나섰다.



그 날 밤새 TV를 지켜본 시청자들 중에는 ‘통역이 엉망이다. 우리나라에 영어 잘 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하면서 분통을 터뜨린 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 비판가는 보통 영어를 좀 한다고 자부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어를 잘하는 것’과 ‘통역을 잘 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사실이다.



91년 걸프전이 터졌을 때도 통역사를 찾다 못해 시내 유명 영어학원의 원장들까지 동원됐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통역대학원이 생긴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1,000명이 넘는 영어 전공 졸업자는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은 CNN 뉴스 통역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통역 중 하나라는 데 있다. CNN 통역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선 CNN의 긴급 뉴스는 문자 그대로 불시에 터지기 때문에 통역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국제회의 통역의 경우에는 최소한 며칠 전 통역 의뢰를 받아 연설문을 입수해 내용을 파악하는 등의 준비를 할 수 있지만 긴급 뉴스는 전혀 예측 불능이다.



둘째, 뉴스 통역은 아주 독특한 형태의 통역으로 기자나 앵커의 말을 통역해야 하기 때문에 기자들처럼 언론, 특히 방송 뉴스 보도에서 사용하는 ‘언론 용어’를 써야 한다. 평소에 외신에 관심을 갖는다 해도 통역사나 영어 잘하는 사람이 갑자기 기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이크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뉴스 통역사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양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뉴스 통역은 3D(Difficult, Dirty, Dangerous) 통역이다. 전혀 예측을 못하는 상황에서 속사포처럼 내뱉는 기자들의 말을 따라가야 하니 어렵고, 방송사에서 갑자기 마련한 통역실에서 외부와 격리된 채 통역 친화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널뛰듯 하는 방송 진행자의 지시를 받으며 통역해야 하니 더럽고, 전국의 시청자를 상대로 통역하다 이번처럼 못한다고 욕을 먹어야 하니 위험한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통역사들은 고참일수록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를 경험한 고참들은 ‘왜 그 고생을 해?’하면서 방송사의 통역 요청을 최대한 기피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 사태가 터진 9월 중순은 통역의 성수기기 때문에 내로라 하는 통역사들은 대부분 각종 회의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사태가 터진 날 밤을 새워 통역한다면 이튿날 아침부터 있을 국제회의 통역을 망칠 것은 뻔한 노릇 아닌가? 이번 사태는 심야에 터져 밤새워 통역하면서도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것이라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어떤 통역이라도 해보겠다는 용감하고 투지 넘치는 자세를 가진 젊고 참신한 통역사가 필요했다.



이번 사태 첫날 밤 일부 방송사에서는 영어에 능통하고 뉴스 감각이 뛰어난 기자들이 직접 통역을 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미국 특파원 경력이 있는 통역대학원 출신도 있었다. 그들이 통역사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언론 용어’를 노련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밤을 새워 통역해 목소리가 쉬어가던 오전 9시반 부시 대통령의 성명이 생중계되자 각 방송국에서는 밤새 동원돼 ‘감을 잡은’ 신참 통역사들이 각각 통역을 시작했고, 그 통역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 순간의 통역은 누가 들어도 ‘엉망’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긴급 뉴스 통역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안다면 오히려 통역사들에게 격려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가 통역이라는 측면에서 91년의 걸프전 통역과 달랐던 것은 CNN의 한국 내 송출을 위임받은 CSTV Korea의 존재였다.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금년 초에 유료로 전환한 케이블 방송의 CNN 채널은 관계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한 채 지난 7월부터 하루에 몇 차례씩 정시 뉴스 동시통역을 시험방송 형식으로 내보내고 있다. 여기서 통역을 하고 있는 4명의 통역사도 금년 초에 통역 대학원을 졸업한 신참들이다. 그들은 금년 초부터 매일 CNN 뉴스를 연구하며 7월부터는 실전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1일 밤에 불시 동원된 동기생들보다는 ‘준비된 통역사’로 훨씬 안정된 통역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이미 반 기자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CNN 케이블 채널이 나오는 동네에 사는 시청자들은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단이 없는 CSTV로서는 공중파 방송사들처럼 4명의 통역사로 밤새 통역 서비스를 할 수는 없는 한계를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통역사 구인 소동을 한 복판에서 겪은 필자는 다음 사태에 대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다. 즉 CSTV의 통역 팀을 증강하여 필요 시 밤새워서라도 통역할 수 있게 하고 여의도의 각 방송사는 원하는 순간에 CSTV의 통역을 받아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긴급사태 때마다 서울 시내의 통역사를 수소문하는 수고도 덜 수 있을 것이고, 똑 같은 CNN 뉴스를 방송사마다 통역사를 임시 고용해 비싼 통역료를 지급하는 낭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뉴스라도 더 정확하고 멋있게 보도하려는 방송사들간의 경쟁 분위기와 그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끝으로 이 글을 읽으신 시청자들께서는 임박했다는 미국의 보복 공격 시 다시 시작될 통역사들의 동시 통역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그들은 미국의 보복 공격을 기다리며 주말 휴가도 포기하고 ‘욕 덜 먹는’ 통역을 준비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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