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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국제감각이 소치 살렸다

매체명 : 조선일보   /   보도일자 : 0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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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새벽 과테말라에서 열린 IOC 총회의 2014년 동계올림픽 주최 도시 투표 결론은 우리 국민 모두를 실망감에 빠뜨렸다. 조선일보는 6일 소치 유치위원회의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서 예상됐던 ‘깜짝 쇼’가 바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고 보도했다. 필자도 그날 새벽 푸틴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무릎을 쳤다. 바로 저거다!

무한경쟁의 국제무대에서 ‘깜짝 쇼’는 ‘돈’보다 ‘말’로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는 점을 푸틴 대통령이 간파했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치른 우리는 유엔 공식용어가 여섯 개지만 올림픽의 공식언어는 영어와 불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불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숙하지 않은 푸틴 대통령은 5분 남짓한 연설의 대부분을 영어로 소화한 후 마지막 부분을 “러시아인들의 올림픽 염원은 IOC 위원들의 현명한 결정을 고대하고 있다”고 불어로 장식했다. 그 순간, 러시아인들의 염원이 중간 단계 없이 바로 영어권과 불어권 IOC 위원들의 귀와 마음에 짜릿하게 전해졌을 게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세기 말까지 미국과 함께 천하의 반쪽을 호령했던 구소련의 국가원수다. ‘모국어’인 러시아어 대신, 과거 동서냉전의 적수의 언어이지만 이제는 세계어가 된 영어와, 올림픽의 요람 프랑스의 언어로 힘겹게, 그러나 분명하게 공식석상에서 연설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럽 중심의 IOC 위원들을 사로잡았을 수 있다.

IOC 총회장에서는 러시아어가 통역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정상이 모국어를 놔두고 유창하지 못한 다른 언어로 연설을 했으니 가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만하다. 소치 유치위원회도 “불어 연설 부분은 우리 대표단조차도 몰랐다”고 했을 만큼 푸틴 대통령은 ‘외국어’의 위력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최근 27개국으로 확대된 EU 의회에서는 회원국 숫자와 거의 비슷한 23개 언어를 통·번역하고 있다. 거기에 따르는 엄청난 예산과 성가신 서무 업무에도 불구하고 군소국가들이 자국의 언어 사용을 고집하는 것은 ‘말’이 곧 ‘국가’요 ‘국민’이요 ‘주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푸틴 대통령은 IOC라는 국제무대에서 자존심을 버리는 ‘유연성’을 보여 결국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커다란 선물을 가져갔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모처럼 영어로 연설해 평창 지원에 나섰지만 푸틴 대통령이라는 거목 앞에서는 중과부적이었다.

세계적 거물이 남미의 한 작은 나라 수도에서 보여준 감각적인 배려는 우리의 8년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한 나라 대통령의 국제적 감각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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