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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통역과 우리말

매체명 : 한겨레신문   /   보도일자 : 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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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칼럼] 통역과 우리말 / 곽중철
한겨레 신문 2009.12 21(월)

“세 사람이 모이면 그중 반드시 배울 바가 있는 사람이 있다”(三人行 必有師)는 말이 생각난다.
지난 11월 말 한겨레말글연구소 제5차 학술발표회 ‘유엔•국제기구 공용어 어떻게 늘릴까’라는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한 발표 주제의 토론자로 나갔지만 현장에 가서야 큰 주제의 핵심이 ‘어떻게 하면 한국어를 유엔 공용어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임을 알았다. 필자가 외국어를 전공한 탓인지 그런 운동을 벌이는 분들이 있음도 처음 알았고, 그분들한테서 배운 게 무척 많았다.
그날 토론에서 모임 취지에 맞게 필자가 즉석에서 엮어내린 결론은 “한국어를 유엔 공용어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 우리가 우리말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장의 반응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필자에게는 다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하면서 통역을 가르치는 사람이 웬 모국어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외국어를 하면 할수록 모국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필자도 모국어를 바탕으로 외국어를 배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거울로 모국어만큼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더 낫다면 이미 그 외국어가 모국어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은 모국어가 없는 불쌍한 사람(alingual)이다.
봄이면 대학원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모국어 수준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분명 우리나라의 어문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기유학’으로 대변되는 영어 중시 풍조가 우리 자식들의 말과 사고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이를 직시하고 바로잡으려는 어른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닌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들도 맞춤법에 맞지 않는 우리말을 쓰면서 자각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유력 일간지와 텔레비전 뉴스에서조차 젊은 기자들이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례가 잦아 안타깝다.
우리 대학원이 30년 전부터 배출해 시장에서 일하는 통역사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비판이다. 우리의 말하기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논리가 분명치 않은 연설을 하는 우리 연사를 만나면 외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통역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도대체 저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유추하다 보면 통역이 더 어려워지고 느려진다. 통역사들은 그런 연사를 만날까봐 무서워한다. 외국인 청중이 “연사와 통역사 중 하나는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릴까 두려워지는 까닭이다.
이런 懸室에서 우리말이 당장 유엔 공용어가 되면 어떻게 될까? 유엔 회의 참석자들이 “한국어 연설은 잘 이해할 수 없다. 연설이 잘못된 것이냐, 통역이 잘못된 것이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말을 국제기구 공용어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한편으로, 우리말을 더 사랑하며 우리말 교육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어린 세대에게 우리말을 조리에 맞게 부려 쓰도록 고유어와 숱한 한자어 등 낱말 교육부터 말본새, 문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국제무대에 나가 쉽고 논리적인 연설을 할 수 있게 하는 어문교육이 본궤도에 올라야 우리말이 떳떳하게 유엔 등 국제기구 공용어가 되어 알아듣기 쉽고 빛나게 통역될 것이다.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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