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의 역사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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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1-10-11 조회2,900회 댓글0건 과목명 : 일반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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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들
아랍인과 유대민족은 같은 성서의 백성이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몸종인 하갈과 혼인하여 이스마일을 낳고 다시 본부인인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유대민족의 조상으로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이스마일은 아랍족의 조상으로 그 가문에서 무하마드가 탄생하였다. 이런 역사적 친근 관계를 가진 두 민족이 지금 싸우게 되는 역사는 전혀 다른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대는 바로 유대 민족을 박해했던 기독교 유럽이었다.
BC 천년경에 유대민족은 왕국을 이루고 살고 있다가 BC7세기에 앗시리아에 빼앗겼다. 또다시 국가를 세우지만 AD1세기에 유대왕국은 로마에 멸망하였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건국할때까지 2천년간 유대 민족은 국가없는 유랑생활을 해왔다.
처절한 유랑의 무대는 바로 유럽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와 고문과 민족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 되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때 유대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받은 민족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반 유대감정은 너무나 크게 뿌리깊어 종교개혁자 마틴루터 조차도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칙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14세기 유럽에 페스트가 번져 2천만명 이상이 죽자 교황청에서 페스트는 하나님의 저주라면서 악마를 제거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을때 페스트로 희생된 사람도 많았지만 학살당한 유대인도 많았다. 한때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유행했을 때도 이 사냥의 1차 희생자가 유대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고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1880년경 황제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어떤 청년의 폭탄에 맞아 폭사한 일이 있었는데 그 암살범은 정신병자였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가 정신병자의 폭탄에 맞아 죽었다는게 납득시키기 어려울것 같아 그청년을 데려가 발가벗기고 고문하였는데 발가벗겨보니 할례의식을 치렀던 청년이었다. 이를 빌미로 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모라하여 다음 해 1881년 5월법을 비밀리에 제정해 러시아의 유대인들을 3등분 했다. 1/3은 학살, 1/3은 강제추방, 1/3은 훈련시켜 러시아의 노예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공표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등의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1894년에는 프랑스에 있는 독일 대사관에서 프랑스의 고급 군사기밀 유출사건이 일어났다. 유명한 §드레퓌스 대위사건§이다.드레퓌스 대위의 신원을 조사하니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 악마의 피가 섞였으니 프랑스를 배반하는 것은 당연하다하여 당시 최고형인 무기형이 선고되었다. 그때 프랑스의 유명한 문인이었던 모파상같은 지성인들이 각종 언론에 아무리 유대인이라 하여도 그렇게 사건을 꿰어 맞추는 것은 프랑스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여 반발하였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자 재수사에 들어갔다.
재수사 끝에 에스테라지아라는 소령이 진범으로 잡혀 사건은 일단락 되었고 드레퓌스대위는 풀려났다. 그때 풀려난 드레퓌스대위에 대한 명예는 1994년 드레퓌스사건 백주년에 맞추어 프랑스 정부가 공식으로 복권을 인정하면서 회복되었다. 반 유대감정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유대인들을 자극하였고, 그 결과 1897년에 스위스에서 전세계 유대인들이 모여 제1회 세계유대인대회를 창설하고 비밀강령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데 온 유대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정서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세우기란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오스만 터키제국이 독일에 가담하여 영국을 위협한 것이다.오스만 터키제국은 영국의 생명줄인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1915년 아랍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팔레스타인에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랍은 오스만터키제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로서 영국에 대항한 성전(지하드)을 선포한 상태라 종교적으로 도저히 영국을 돕기 힘든 형편이었으나 독립국가를 보장받는 것이 오스만터키의 식민지로 사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영국을 돕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대령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오스만 터키제국의 주둔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남부 전선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영국은 중부 전선에서 독일을 궤멸시키기 위해 유대인도 끌어들였다. 유대인에게도 자기들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는 비밀약속을 하였다. 이것이 1917년의 §발포오선언§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전쟁중인 1916녕에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와 쿠웨이트를 연결해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갖는다는 §사이크스-피코§비밀협정을 맺었다. 팔레스타인지역은 영국의 차지였었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을 두고 아랍인에게는 아랍국의 독립을, 유대민족에게는 유대국가 창설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자기네들끼리의 영토분할과 같은 3중의 모순된 비밀조약이 맺어졌다. 이것이 오늘날 중동분쟁의 불씨를 지핀 근원적인 배경이다.그들이 저질러 놓은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영토분할 구상으로 지금 두 민족이 이제 역사적으로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과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저질러 놓은 모순된 독립약속에 따라 아랍과 유대인은 서로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기 위해 투쟁을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박해받는 거의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주인은 아랍인이었다. 그동안 95%의 아랍인과 5%의 유대인은 함께 평화롭게 생존해 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유대인의 이주로 인구가 열배이상으로 늘어나자 살기가 어려워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근의 요르단, 레바논, 리비아쪽으로 쫓겨났다. 그들이 바로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1948년 미국의 후원하에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이집트가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대신하여 아랍민족의 대표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지만 이집트의 완패로 끝났다. 이집트 대통령에 서출된 낫세르가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또 전쟁을 선포했지만 다시 무참한 패배로 끝났다.수에즈 운하 분쟁을 계기로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에 전쟁이 발발하는데 §6일 전쟁§이라 불리는 3차 중동전쟁이다. 아랍권은 패배는 물론 기존 아랍의 황금지역까지 빼앗겼다.
오늘날 중동 영토 분쟁의 불씨가 되는 시나이 반도, 지중해 쪽의 가자지구, 요르단과 경계인 요단강 서편,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수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의 점령지 즉각 철수를 위한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지켜지지 않고 있다.
1974년 중동전쟁때는 석유가 무기화되면서 제1차 석유위기를 촉발하기도 하였다.우리나라도 친미국-친이스라엘 국가로 분류되어 원유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50여년 동안 수차례에 걸친 유엔 결의안을 주수하지 않아도 아무 제재를안하면서 아랍민족에게는 폭격, 무역봉쇄, 경제제재등의 조치를 취한다는 아랍인들의 불만이 계속되어 온 셈이다.
아직도 시리아, 레바논, 튀니지, 예멘과 같은 아랍권 나라들의 일부 교과서에는 6.25는 북침전쟁으로 표현되어있고, 북한은 아주 절제된 체제하에서 모든 국민들이 빈부의 격차 없이 균형적인 생활을 하며 남한은 빈부의 격차에 의한 모순덩어리의 사회이며 미국이 심어놓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국가로 묘사되어 있다.
상호실체인정 - 외교관계 수립 - 상호불가침 선언 - 점령지 반환과 비무장 - 합의된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건설과 같은 절차를 밟아 나가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캠프데이비드협정§으로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다.
팔레스타인의 완전독립은 동 예루살렘의 관할권 문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내의 유대인 정착촌 철거문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이스라엘 귀환 등과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모처럼 이룩한 평화의 기본 틀은 유지될 것으로 보였던 이 즈음에 새로운 사건이 터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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