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의 사담후세인과 걸프전과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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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1-10-21 조회2,919회 댓글0건 과목명 : 일반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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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걸프전이 발발한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에 대해 무력 응징으로 시작된 걸프전은 미국의 신무기 시험장이 되면서 이라크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전쟁의 패배로 이라크는 유엔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이라크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최근 한정된 양의 석유 수출이 재개되어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으나 10년 동안 외부의 지원으로부터 고립되어 온 이라크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걸프전을 통해 아랍의 영웅으로 등장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권좌를 지키고 있다. 오히려 그는 경제제재를 교묘히 이용하여 독재체재와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제재로 인해 중산층이 붕괴되었지만 주변 권력층은 더욱 부를 쌓고 있는 것이다.
걸프전이 끝난 후 10년 동안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권력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많은 시도를 해왔다. 사담 후세인 암살 계획을 비롯해 1997년 11월 단행된 공습 등의 군사적 제재에 이르기까지 이라크 통치 기반을 와해시키기 위한 직.간접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그러나 후세인 암살 계획은 그 동안 사전 발각 또는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철저한 감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내부 반란을 막기 위해 15,000명 규모의 특수 보안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국민과 군장교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이 부대는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 출신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후세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적들은 가차없이 처단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적어도 국내에서만큼 후세인의 통치 기반은 공고한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강권정치에 의한 것이라도 이라크 국민에게 있어서 후세인을 중심으로 한 체제 수호 이외의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1937년 바그다드 북부에 위치한 티그리트라는 농촌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아가 되었고, 영국의 지배에 반발하였던 타르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랍사회주의 정당인 바스당에 들어갔고 쿠테타가 성공하자 후에 이라크 최고 실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별로 드러내 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며 그러한 것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1985년 이후 아랍 세계 밖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인터뷰에도 잘 응하는 편이 아니다. 열광적인 개인 숭배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의 습관이나 취향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외삼촌의 딸인 본부인 이외에도 8명의 여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사담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 외에도 쿠웨이트 지역의 유전 확보와 유가 인상이란 경제적 이유가 맞아 떨어져 이루어졌다. 그것은 석유를 정치적 도구로 삼으려 했던 후세인이 노렸던 것이다. 걸프전 직전에 유가가 1달러 상승하면 이라크의 연간 석유 수입은 10억 달러 가량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1990년 OPEC(석유수출기구)는 이라크의 정치적 압력에 못이겨 1배럴당 3달러씩 유가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이라크의 연간 석유 수입을 30억 달러 증가시켜 준 셈이었다. 고유가 정책이 절실했던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OPEC의 쿼터를 무시한 채 초과 생산함으로써 유가를 하락시킨 것은 쿠웨이트 침공의 중요한 빌미가 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의 군사 행동이 유가 인상을 자극할 수 있다고 계산했고, 걸프전 시작 전후에 이라크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후세인의 오산이었다.
걸프전은 1991년 2월 28일 다국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의 군사적. 정치적 완전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종전이후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687호 22항에 따라 대량 살상용 무기의 전면 폐기를 확인할 때까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금지하는 경제체재 조치의 실행에 들어갔다.
경제제재로 인한 이라크 국민의 생활은 피폐해지고 생필품 및 의약품의 부족으로 상당수의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 후세인 개인이 저지른 무모한 전쟁의 대가를 국민들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많은 이라크인들과 아랍 각국의 과격 세력에게 후세인은 전쟁 영웅이자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새겨져있다. 특히 걸프전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수 있는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로 비쳐지기도 했다. 실제로 걸프전 동안 아랍 각국의 대중들은 후세인을 아랍 민족의 영웅으로 올려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었고 반면에 중.상류층은 후세인이 명분 없는 무리한 전쟁을 하는것으로 보았다. 그에 대한 지지가 사회 계층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라크를 병력 100만의 중동 최대 군사 강국으로 키웠고 사우디에 버금가는 대 산유국가로 만들었다. 또 지난 10년 동안 문맹률을 70%에서 30%로 줄였고 의료 서비스를 개선시켰으며 1990년 1월 해외 여행 자유화 조치를 취하여 다소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최근들어 후세인은 무모한 전쟁도발과 가차없는 정적 학살로 악명높은 자신의 이미지를 탈색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후세인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10년간의 유엔 제재로 경제가 더이상 버티기 힘든 붕괴 상태로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반미의 자세를 확고히 하면서 권좌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대통령은 조지 부시-빌 클린턴-죠지 W부시로 바뀌었다.
이제 이라크 문제는 새 부시 행정부가 해결해야 할 외교적 숙제가 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반면, 사담 후세인의 통치는 약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가 승인한 이라크 반정부 그룹의무기 구입과 군사 훈련용으로 9.700만 달러를 제공한다는 법안을 지지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이라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라크 문제를 풀 수 있는 뾰족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경제제재 강화와 반정부 활동에 대한 소극적인 지원 정책이 효가를 거두기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는 경제제재를 어떤 조건으로 해제하고, 무모한 방법에 의한 후세인 제거보다는 후세인을 견제하면서 중동 지역에 대한 이라크의 군사 위협을 국제적 합의를 통해 어떻게 제한시킬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시험대에 올라있다. 그것은 이라크를 급격히 붕괴시키는 것보다 이라크내의 변화를 점진적으로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후세인은 지금도 건재하다. 이라크의 권력구조나 그의 통치 스타일로 보아 그의 실각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확실하나 세계적인 관심을 끌면서 중동에서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가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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