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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반과 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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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1-10-11 조회2,604회 댓글0건 과목명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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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프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간다라 미술의 대표격인 바미얀 불상을 우상이라 하여 로켓포로 완전히 파괴한 사건이 세상 사람들을 아타깝게 했다. 도대체 탈레반 세력은 어떤 세력이며, 왜 세계의 비난 여론을 무시하고 이러한 행동을 하는것일까?







파쉬툰, 타직, 우즈벡,하자라족 등 수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연결해 주는 유일한 요소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99%가 믿고 있는 이슬람이다. 이중 84%가 수니파이고 15%는 시아파이다.







약 1,300년 전 아프가니스탄이 힌두쿠쉬 산맥 양쪽에 이슬람이 도래한 이후, 이 지역을 지배한 대부분의 왕조는 이슬람을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20세기 초 국왕 아마눌라 칸은 아프가니스탄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여성들의 온 몸을 감싸 입는 §부르카§착용을 금지시키고 남성들에게 서양식의 양복의 착용을 권장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종교-민족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결국 1929년에 반란이 일어나 아마눌라 칸은 해외로 망명하고 말았다.







무함마드 자히르 샤는 왕위를 이어 받은 후 40년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1946년에 유엔에 가입하는 등 국제사회의 일원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1973년 쿠테타가 일어나 왕정이 전복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는 전쟁과 내전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하고 대통령이 된 무하마드 다우드는 야심찬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서양의 유혹을 뿌리치고 소련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독재정치는 극단적인 좌익 지식인과 군부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종교적 지도자들로부터도 반발을 샀다.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로 변모해 가던 아프가니스탄은 좌익 정당들간의 내분으로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1979년 12월 25일 소련군의 침공을 불러들였다. 이때부터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할때까지 이슬람 원리주의로 무장한 §무자히딘(전사들)§과 소련군 사이에 피로 얼룩진 전쟁이 9년간 계속되었다.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소련의 괴뢰정부 나질불라 정부와 무자히딘 간의 내전이 계속되어 아프가니스탄은 더욱 전쟁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1992년경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자히딘 그룹이 세력을 장악하는 듯했다.그러나 남부 파키스탄 국경 부근에서 파쉬툰 족이 주축을 이룬 탈레반(학생들)그룹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내전 양상은 새롭게 변했다. 탈레반들은 1994년 가을 스스로 이슬람주의 학생들이라고 자처하며, 아프가니스탄의 내전 전면에 갑자기 등장한 신흥집단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종 목표는 국내에서 서로 적대 관계에 놓여 있는 군벌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엄격한 이슬람법을 적용시킨 이슬람 정부를 탄생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들은 1996년 9월 카불을 점령했으며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해 실질적인 집권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외의 다른 나라들은 탈레반 정부를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으 내전은 이제 정권을 새로 장악한 탈레반측과 반탈레반 연합세력인 이슬람 연합전선의 대결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이들의 배후에는 주변 국가들의이해 관계가 얽혀있다.







탈레반을 지원하는 국가는 탈레반과 같은 수니-이슬람의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있으며, 미국도 이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점뿐 아니라 러시아나 이란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꺼려해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반면에 러시아는 친러시아의 나질불라 정권이 몰락한 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통해 이슬람 연합전선을 간접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세력이 집권해도 아프가니스탄에는 이슬람 정부가 들어설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가 정작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영향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슬람 정부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의 내전이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자 유엔과 이슬람회의기구(OIC)가 중재에 나서 1998년 4월 탈레반 측과 이슬람 연합전선 측의 대표자들이 파키스탄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이슬람 학자들로 구성된 울레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위원회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내전 종식과 평화 정착, 이스람 율법에 따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건설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어 1999년 3월에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회담을 갖고 양측이 입법,사법, 행정부의 권력을 나누어 갖는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회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9년 8월에 양측은 휴전 1년 만에 다시 무력 충돌해 평화회담은 고착상테에 이르렀다. 또한 국제 터러리스트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고 있는 사우디 출신 부호 아사마 빈 라덴을 탈레반 정부가 보호하고 있다는 구실로 유엔이 1999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 경제제재 조치를 단행해 내전으로 시달려 피폐된 아프가니스탄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고립 속에서도 탈레반 정부는 이슬람을 고집하며 이슬람법에 따른 정치, 사회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 분야와 관련하여 극단적인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여 많은 비난을 초래하고 있다.







1996년 탈레반 세력은 수도 카불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는 공산주의 통치 시기에 개정되었던 모든 비이슬람적인 법과 규정을 무효화시키고 1964년 자히르 샤 시대에 제정된 이슬람법을 근간으로 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단지 당시의 법 중에 왕정에 관한 부분만 폐지시겼으며, 정부의 비효율적인 요소제거와 예산 낭비를 줄이기 위해 정부 기구도 대폭 축소시켰다.







그러나 통치 경험이 부족한 탈레반 정부는 지나치게 이슬람 원리에 집착한 나머지 극단적인 정책을 폄으로써 국내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무과 오락을 금지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슬람을 주제로 하지 않은 영화 및 비디오 상영까지 금지시킴으로써 가뜩이나 소련과의 전쟁 그리고 내전으로 인해 크게 피폐된 시민 생활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록 있다.







여성들의 베일 착용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얼굴까지 가리도록 가요하고 있고 여성들의 취업을 불법화시켜 가정으로 돌려보냈으며 심지어 여성들의 하얀 양말 착용을 금지시켰다. 또한 여성들의 교육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세계여성인권위원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사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 및 세계 사면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형벌에 있어서도 이슬람법을 적용해 강간죄에 투석형을, 절도죄에 손목 절단형을, 음주에 태형들을 적용해 비인도적인 형벌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잇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의 미얀마와 함께 세계 마약의 80%이상을 생산하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으며 탈레반 정부가 마약 재배의 주범이라는 누명까지 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탈레반정부는 이같은 비난 여론에 대해 여성의 교육과 고용기회 확대, 교육. 문화 시설물 건립. 재원확보 등에 주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여성들에게 베일 착용을 강요한 정책에 대해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의 명예, 인격, 개인적인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이 있을 뿐,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시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성의 교육차별에 관한 비난에 대해서도 이슬람의 가르침에따라 아프간 정부는 성, 민족, 인종.언어. 지역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아프간 국민들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여성 교육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는 원인을 내전과 공산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 교육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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