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최재욱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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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1-17 19:03 조회7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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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40년 경상n북도 고령군 우곡면 속리[4]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40회), 13년선배 영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였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부상을 당하였다.[5] 1986년부터 1987년까지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청와대 대변인 겸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박태준 최고위원의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달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민주자유당 사무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에 반발하였고 1996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6] 그리고 그 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해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7]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환경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99년 자유민주연합 총재 정무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2000년 상반기 박태준이 국무총리로 부임하자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였다.
2024년 11월 17일,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
최 전 장관은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아웅산 묘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다리는데 ‘쾅’ 소리가 나면서 고막이 터지고 무너진 건물 서까래에 맞아 머리가 함몰돼 쓰러졌다”며 “병원에서 내 옆에 누워 계신 분들에게 흰 천이 자꾸 씌워졌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이 지난 2019년 별세하면서, 그는 테러 현장에 있던 공식 수행원 중 마지막 생존자로 불려왔다.
그는 아웅 산 테러에서 생존한 뒤 삶에 대해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니 제 딴엔 최선을 다했다"면서 "맡겨진 임무 하나하나 하는 것은 내 생의 기쁨이라기보다 나라를 위한 보답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는 서남아·대양주 6개국 순방에 나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로, 폭탄은 대통령이 묘소에 입장하기 전 터져 전 전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수행원들과 미얀마인 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망한 수행원 중엔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동휘 상공부 장관,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등 정부 핵심 인사가 다수 포함됐다.
북한은 1980년대 초 미소 간 신냉전, 미중일 화해, 한미일 동맹 강화, 한중 경제 관계 확대 등 변화하는 외교 환경에 대응해 한국 사회 불안정을 유도하며 대남정책 우위를 확보하고자 아웅 산 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분석됐다. ================
고인은 1986∼1987년 경향신문 사장을 지냈고,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 달서을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1998∼1999년 환경부 장관, 2000년 1월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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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욱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에 임명되었고, 그 후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대양주 해외 순방에 동행하였다가 북한의 버마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중상을 입었다. 최재욱은 테러 현장의 단상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기다리던 1급이상 공식 수행원 15명 중 한 명이었는데, 이들 중 현장에서 13명이 숨졌고,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과 최재욱만 살아남았다. 이기백이 2019년 사망한 후로는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로 불렸다.[8]
최재욱은 인터뷰에서 “최초 TV속보에서 테러 사망자 명단에 최재욱이 포함된 것으로 보도되어 아내가 혼절했었는데, 2시간 만에 중상자로 정정되었다고 한다. 당시 폭발로 인해 날아간 서까래와 부딪혀 머리와 고막이 터졌고, 온 몸에 파편이 박힌 채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관계로 병원을 방문한 대통령이 처음에는 몰라봐서 “제가 최재욱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무사하십니까”라고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겨우 알아보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나야 그 이후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가서 남의 나라 주권을 짓밟는, 인류역사에도 없는 이런 테러를 하는 집단이 북한’이라는 점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면 좋겠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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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서구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 이다.
[2] #
[3] 2021년에 사망했다.
[4] 최운지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5] 테러 당시 도열해 있던 사람들 중 폭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과 더불어 단 둘뿐인 참사 생존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여서 병실로 찾아온 전두환은 최재욱 자신이 누군지 말을 하기 전까지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6] 무엇보다 지역구인 달서구 을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가 벌어졌던 곳이라 문민정부와 신한국당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15대 총선에서 달서 을에 출마한 신한국당 이철우(경상북도지사 이철우와 동명이인) 후보가 15%도 득표 못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7] 고작 689표 차이였다.
[8] 물론 당시 20~30대 비공식 수행원 중에는 생존자가 많이 계신 편이다. 대표적인 분이 당시 이기백 의장을 모시던 전속부관 전인범 당시 중위.
[9] 1990년 3당합당 합류
[10] 1996.1.10 신한국당 탈당
1996.3.30 자유민주연합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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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폭탄테러' 마지막 생존자…최재욱 전 환경부 장관 별세
입력 2024.11.17. 신중언 기자 1940+84=2024 13세 손위
1984년 10월10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1983년 테러 현장에서 피범벅이 된 채 구조되는 고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cerebral infarction
1983년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최재욱(崔在旭) 전 환경부 장관이 17일 0시쯤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4세. 최 전 장관은 최근 2년간 뇌경색으로 투병해왔다.
고인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 현장의 생존자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1980년 전두환(1931∼2021) 대통령 당시 대통령 공보비서관으로 임명됐다. 1980-1940=40세 이사관? 비서관 신분이었던 그는 버마(현 미얀마) 수도 랑군(현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 현장 단상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기다리던 1급 이상 공식수행원 15명 중 한 명이었다. 테러범들은 사건 당일 오전 10시 28분 원격 조종 장치를 눌렀다. 미리 설치한 폭탄 3개 중 1개가 폭발하면서 이들 15명 중 13명과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등 모두 17명이 숨졌다.
대열 맨 끝에 서 있던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과 최 전 장관만 살아남았다. 전 전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버마 외교부 장관이 지각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4분 늦게 영빈관에서 출발해 화를 면했다.
1940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고, 영남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86∼1987년에는 경향신문 사장을 지냈고,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 달서을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1998∼1999년 환경부 장관, 2000년 1월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다. 한국신문상(1972), 세네갈 정부 녹십자훈장(1982), 홍조근정훈장(1985-2002), 국민훈장 모란장(1987)을 받았다. 백마장 1988
유족은 아들 최효종(법무법인 린 변호사)씨와 딸 최다혜(미국 사우스앨라배마 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 서울병원 장례식장(18일 오후 1시부터 조문 가능), 발인 20일 오전 8시30분. ☎ 02-3410-3151
신중언 기자 shyoung3@imaeil.com
기자 프로필
이기백(1931∼2019) 당시 합참의장과 고인은 살아남았다. 이기백씨가 지난 2019년 별세한 뒤 고인이 테러 현장에 있던 공식 수행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당시 수행 기자로 현장에 있었지만, 목숨을 건진 최금영 연합통신 기자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민주자유당 사무부총장을 역임했다.
1995년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에 반발, 1996년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1998~1999년에는 환경부 장관, 2000년 1월에는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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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철님의 댓글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최재욱장관은 나 어릴 때 자주 뵀던 고령이모의 차남이었다. 장남인 재길 형은 백수라 자주 뵀지만 재욱형은 ‘천재’라는 소문만 많이 들었다. 내 모친을 만나면 “대구 이모가 우리 엄마를 제일 닮았고,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했다”고 칭송했다.
모두 살기 힘든 시절이라 재욱 형은 경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당시 “한강이남에서 처음으로 동아일보 기자가 나왔다”고 했다. 고교 13년 후배인 내가 그를 가까이 뵌 것은 바로 아웅산 사태 이후 강북삼성병원 입원실로 문병을 갔을 때였다. 전두환의 공보비서관으로 1급이던 그가 미얀마 국립묘지에 도열해 있던 15명 차관급이상 수행원 중 이기백 합참의장과 둘이서만 생존한 것은 “키가 작아서 둘째 줄 끝에 숨어있었기 때문”라고 농을 했다. 내가 문병한 것이 1984년 초 쯤이었으니 내가 31살, 올림픽조직위에 발탁되기 전 프리랜스 통역을 하던 중이었으니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어땠을까 싶다.
그 후 나도 조직위에서 별정직 3급 공무원으로 5년이상 근무했고, 그 동안 외가 경조사에서만 그를 만나 잠깐 인사를 하고 헤어지곤 했지만 경외심은 계속 갖고 있었다. 다만 내가 명륜동에 있던 재욱형의 둘째 누나인 호분 씨집에서 하숙을 오래 했기에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다.
내가 그와의 인연에 방점을 찍은 것은 2003년 3월 초, YS의 청와대에 남아있던 내가 쫓겨날 운명에 처했을 때였다. 당시 형님은 2000년 1월 국무조정실장을 끝으로 현역에서는 물러나 있었다. 2003년 당시 YS의 초대 공보수석은 이경재 전 동아일보 정치부장으로 재욱형의 직계 후배였다. 재욱형의 전화를 받은 이수석은 날 불러 “나랑 같이 일하자. 당신은 정무직이 아니라 전문직이니 문제없을 것”이라 격려했다. (이경재: 1993~1995 공보처 차관 청와대 대변인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 동아일보 정치부 부장, 논설위원 1967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연구원)
눈치를 보며 비서실 1층 왼쪽 끝방으로 출근하던 차 신록이 푸르렀던 1993년 5월5일 어린이날, 대통령 참석 행사 차 녹지원으로 나가던 나를 이 수석이 불러 세웠다. 수석실에서 마주 앉은 나를 두고 이수석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곽비서관, 난 최장관 당부도 있고 해서 당신과 계속 일하려 했지만 나보다 더 센 사람이 있어 그러지 못하게 됐다. 미안하다”고 최후 통첩을 했다. 그 사람이 바로 YS의 차남이었음을 한참 뒤에 알았다. 그렇게 재욱형과의 인연은 끝났지만 나는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 전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해 졌고, 오늘 부음을 들은 것이다. 부디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