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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간지 칼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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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9-28 10:55 조회3,2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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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과 번역은 바깥 사람의 말과 지식을 우리 언어로 옮기는 일이다.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잘된 번역은 웬만한 논문 이상의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통·번역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또 있다. 우리 한국어권 내에서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 일이다. 그 핵심에 한자 실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명박·박근혜씨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얼마 전, 한 종합일간지 1면에 “여권 자료로 공격, 박근혜쪽 금도 넘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이씨가 박근혜씨 진영의 검증 공세에 대해 “금도를 넘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요지였다. 1면에 이어 5면에는 상세한 인터뷰가 실렸다. 나는 이씨가 ‘금도(襟度·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라는 말의 뜻을 모르고 실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5면 인터뷰를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기자가 이 전 시장에게 “박 전 대표 쪽의 의혹 공세가 금도를 넘었다고 보나”라고 질문하자 이씨가 “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인터뷰한 기자 자신이 ‘금도’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도는 보여주거나 발휘하는 것이지 ‘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떤 신문의 사설에도 ‘금도를 한참 넘어선 일이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이가 금도의 한자를 ‘금도(禁度)’ 정도로 착각하는 듯하다. 방송 뉴스에서는 ‘부상당했다’는 틀린 표현이 ‘부상했다’를 몰아내는 데 거의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동료 기자들에게 ‘금도’를 발휘하지 못해 미안하다). 註: 금도= tolerance

기자들도 실수하는 판이니 대학생은 오죽하겠는가. 신문사 수습기자 채용시험에 작문 과목이 있는데, 채점을 해보면 대학생들의 형편없는 한자 실력을 실감하게 된다. 한자는 쓰지 않고 한글로만 표현하는데도 ‘반신불구(반신불수)’ ‘고분분투(고군분투)’ ‘부지부식간에(부지불식간에)’ ‘유래(유례)없는 참사’ ‘인명은 제천(재천)’ 같은 잘못된 표기가 자주 눈에 띈다. 한자를 거의 접하지 않고 자란 탓이리라.

한자어는 국어사전 표제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한자를 모르면 정확하게 의사를 소통하기 어려울 게 뻔하다. 그야말로 ‘반신불구 한국어’가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요즘 초·중·고교생 사이에 한자 배우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일부 기업은 채용 때 한자자격증 소지자에게 가산점도 준다. 어제 교육부·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발표에 따르면 9월 대입수능 모의평가 제2외국어·한문 영역에서 한문을 택한 학생이 20.8%로 일본어(36.3%)에 이어 2위였다고 한다. 반가운 추세다.

한자·한문과 한자어는 한국어의 소중한 자산이지 버릴 자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아직도 한자어와 순 우리말을 갈등이나 상충관계로 본다. 게다가 어설픈 민족주의까지 섞어 들이민다. 그런 분들을 보면 그저 입맛이 쓸 뿐이다.

노재현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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