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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Leverrier를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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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11-01 03:33 조회3,1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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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르베리에. 한국이름 여동찬.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원조 이다도시 + 로버트 할리로 유명했다. 프랑스 사람으로 경상도 안동 사투리를 썼기 때문이다. 어제 외대 본관 3층 불어방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서 만난 불어과의 박시현 교수는 그가 1928년 생, 84세를 일기로  고향인 프랑스 브러타뉴 노르망디에서  지병인 전립선 암으로 돌아가t셨다고 했다. 오늘 막 장례를 치렀다고 프랑스에서 안식년 중인 윤석만 교수가 알려왔단다. 아침 출근길에 문자로 받은 그 부고는 내게도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20세도 안된 나이에 카톨릭 사제로 프랑스에서 안동에 와 경상도 사투리를 우리보다 더 잘했다. 속세로 돌아와 외대에서 30년이 넘도록 불어를 가르쳤다. 넘치는 위트와 유머로 그의 강의는 항상 웃음과 활기로 넘쳤다. 수업도중 껌을 십는 여학생에게는 "00야, 껌 삼켜! 삼켜!"라고 소리쳤다. 가끔씩 TV에 나와 구수한 사투리로 한국을 이야기할 때면 시청자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여름 통대 1기에 응시했을 때... 불어 면접에서 서툴게 외운 불어로 몇 마디 답변했는데 그가 "저 학생은 끼가 있다. 지금은 불어를 잘 못하지만 통역사 재목이다"라고 강변해 나를 한영불과에 4등으로 입학시켰음을 나중에 알았다. 9월에 입학해 약 1년동안 그의 불어수업을 들었는데 영어 외에 덤으로 해야하는 불어가 더 어려웠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80년 1학기에 치른 유학 시험에서 그는 또 내게 후한 점수를 줘 1등으로 국비 장학금을 받고 파리 ESIT로 가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출국 전인 9월 3일 결혼에 나는 그를 주례로 모시고 싶었지만 보수적인 양가 부모님이 반대한다니까 "내가 양놈이니까 그렇지! 괜찮다. 다른 분을 모셔라"고 흔쾌히 대답하셨다. 그 시절 그는 동양화가 박정자 여사와 늦 결혼 했는데 처가 댁에서도 "내가 양놈이라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농을 하셨다.

유학 중인 파리에서도 선생님이 서울서 오시면 몇 번이나 만나뵙고 한국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다. 공부가 힘들다고 징징대면 "할 수 있다"고 끝까지 격려하셨다. 3년 후 졸업시험에 통과해 귀국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며 "내가 넌 된다고 했잖아, 끼는 못 속인다"고 하시며 프랑스 정방교회 자료 번역일을 주시기도 했다. 내가 1983년 아웅산 사태, kAL기 피격 등 뉴스로 TV에 동시통역으로 나오면 "잘 봤다"고  좋아하셨다.

나는 그 어느 한국스승보다 그를 존경했고, 은혜를 갚고 싶었다. 1988년인가 부인 박정자 여사의 개인전에서는 "미시령의 여름"이라는 작은 풍경화 작품을 사드렸고 프랑스에서 가족들이 서울 올림픽을 보러 오신다고 해서 구하기 힘든 개막식 풀 드레스 리허설 참관표를 열장이나 구해 드림으로써 작은 보은을 했다.  "제자가 출세해 내 체면이 섰다"고 좋아하셨다. 올림픽이 끝나고는 힘든 사회생활에 자주 뵙지 못했지만 항상 그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 정년 퇴직 후 돌아간 고향 노르망디 길가에 있는 그의 집에는 항상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던가?

어제 분향실에서 만난 박시현 교수는 "그렇게 좋고 유명한 분이셨는데 세월이 너무 흐르고나니 준비한 30송이 국화도 아직 남아있어 안타까왔는데 곽교수가 늦게 와주니 다행"이라고 했다. 르베리에 선생님, 섭섭해 마세요. 많이 오면 뭘합니까, 이렇게 선생님의 그 존재감을 아직 이리도 똑똑하고 강렬하게 느끼는 제자 몇 명만 있으면 되지요, 양보다 질 아닙니까?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계세요.... 

ps: 이 글을 본  내 가족은 1979-1980 당시 여동찬 선생이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를 분양받고 싶어해 내가 현대건설 고위간부였던 삼촌에 부탁해 성사시켰고 이후 여선생님은 "자네 덕에 내 경제생활이 많이 좋아졌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는 아파트 분양도 인간적이었나 보다...



 

 
 
 

곽중철 (2011-11-01 03:53:50) 
 
내가 잊지 못하는 외국인 교수가 한 분 더 있다. 작년에 단국대 교수로 계시다가 돌아가신 Bill Ryan 교수. 외대 교수로 계시던 1975년 내가 주연을 맡았던 영어연극 '드라큐라 백작'의 감독으로 내게 연극의 마력을 가르쳐준 분이다. 나를 알아주기로는 르베리에 교수보다 몇년 앞서신 분이다. 1974년 겨울 추운 교실에서 연극 연습을 하는데 그가 카세트에 녹음해준 대사를 억양도 똑같이 반복하는 나를 보고 "저래야한다. 정말 많이 늘었다"고 다른 학생들에게 분발을 촉구했다. 그 칭찬에 나는 더 열심히, 코끼리처럼 춤추곤 했다. 더블 캐스팅된 학생이 중도 포기했을 때도 "곽 군만 있으면 된다"고 나를 믿어 주었다.
4회 연극 공연이 끝났을 때 "공연을 본 내 미국 친구들이 곽군은 당장 브로드웨이에 가도 드라큐라 역을 할 수 있겠다"라고 했다며 나를 극찬했다. 내가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으랴.
작년 여름 그의 부고를 전해준 제자의 차를 타고 단국대 분교에 차려진 그의 빈소를 찾았을 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아파트 화장실에서 쓰러진 한참 후 발견됐다는 그에게 찾아온 것은 미국의 동생 뿐, 빈소에는 아무도 없어 제자와 함께 큰 절이나 두 번 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라이언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제자들 칭찬하며 살겠습니다. 이국 땅에서 외로이 돌아가셨다고 슬퍼마세요. 어차피 인생이란 한바탕 연극이 아니던가요? 이 제자도 큰 욕심없이 살다 가려 합니다. 잘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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