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경호실 50 주년을 맞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3-11-18 11:01 조회3,233회 댓글0건

본문

경호실 50 주년을 맞아

 한국통번역사협회 회장/ 한국외대 교수 곽중철 010-5214-1314

최근 종편 채널 MBN이 대통령 경호 관련 특집을 만든다고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알고 보니 12월 1일이 우리 경호실 창설 50주년이었다. 필자는 대통령 경호실과 비서실에서 모두 근무한 특이 경력이 있어 인터뷰에 응했다. 필자는 초급 통역장교였던 1977년 1월 국방부에서 경호실로 파견돼 1978년 6월 전역할 때까지 정보처에서 번역 일을 했고, 6공 시절에는 비서실에서 공보 비서관으로 영ㆍ불어 통역 일도 했기 때문이다.

1977년이면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변을 당한 후 2년이 넘었던 시기인데 경호실에는 아직 “우리는 죄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새로 온 차지철 경호실장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군인 신분인 필자가 느끼기에도 경호실 내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필자가 동기 통역장교와 하루 종일 번역해 올리는 영어와 일어 외신은 오로지 실장 한 사람만 보는 ‘참고자료’였다.   

당시 아침마다 출근하면 처 별로 조회를 하는데 애국가에 이어 “충정가”라는 경호원의 노래를 합창했다. 당시 알만한 작곡/작사자가 만든 군가 풍의 노래로 각각 5ㆍ16, 새마을 운동, 유신을 주제로 한 3절을 모두 불렀다. “이 한 목숨 끓는 피, 충정으로 바칩니다”라는 후렴은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을 대변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경직됐던지 청와대 경내를 청소하던 직원이 새벽 산책을 나온 대통령을 보고 인사는커녕 반대편 벽을 보고 얼어붙은 듯 돌아 서있는 일이 벌어져 경호실장이 전 직원에게 ‘대통령 조우 시 행동요령’이라는 ‘지휘서신’을 내려 보냈다. 우리 정보처 직원들이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사격훈련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대오를 맞추지 않은 것이 마침 차로 이동하던 경호실장의 눈에 띄어 그의 집무실 옆 회의실로 불려가 욕이 섞인 훈시를 듣기도 했다. 그 때 필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까이서 차지철 실장의 무서운 시선과 음성을 체험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경복궁 북쪽의 연병장에서 경호실장이 주재하는 ‘국기 하강식’이 열렸는데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부대의 장병과 탱크를 포함한 무기들이 참가했고, 경호원들은 우측 계단에 도열했다. 시간이 되면 차 실장이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초대한 정ㆍ재계 인사와 함께 지휘봉을 들고 입장하는데 대규모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섬찟하게 했다. 그 행사를 단상 아래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던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바로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장군으로 이어졌다. 경호실 직원들은 번호를 붙여 지급된 곤색 넥타이를 ‘오늘은 몇 번’ 식으로 통일되게 매고 나와야 했다. 그 와중에 ‘큰 영애’로 불렸던 박근혜 현 대통령의 권유로 경호실 처별 배드민턴 대회가 열려 그나마 긴장이 잠시 풀어지곤 했다.

전역 후 1년 여밖에 지나지 않은 10월 26일, 하숙집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나는 남보다 큰 충격을 받고 믿을 수가 없었다. 서슬 퍼렇던 차지철 실장도 같이 죽어? 타고난 경호원 박상범 경호처장도 총에 맞았다고?? 1년 반 경호실에서의 근무 추억이 살아나면서 내가 전역 후에도 경호실에 남아 있었다면? 그런 모든 상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6 공화국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돌아온 청와대는 훨씬 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필자는 다시 경호원들과 국내외에서 각종 행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통역이란 수행경호원보다 더 가까이에서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 직종이다. 경호원들은 통역을 맡은 필자를 더 빨리, 더 가까이 대통령 쪽으로 붙이기 위해 애썼다. 그들과 함께 하며 필자는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경호하며 차라리 자신이 대통령 대신 공격받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할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경호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피경호자가 무사하면 임무가 끝나는 일이기 때문인데 그만큼 더 끝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총소리가 나면 경호는 끝난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총소리가 나지 않게 모든 가능한 예방조치를 다해야 하는 어려운 직종이다. 경호실 창설 50주년을 맞아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모시게 된 경호원들, 특히 더 강화되었을 여성 경호원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끝)               
 



 

 
 
 

곽중철 (2013-11-23 17:50:28) 
 
[기고] 경호실의 그때 그사람들

[곽중철 한국외대 교수•한국통번역사협회장]
매일경제 A30면 기사입력 2013.11.22 16:15:31
최종수정 2013.11.22 16:29:45

최근 MBN이 대통령 경호 관련 특집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12월 1일이 경호실 창설 50주년이다. 필자는 대통령 경호실과 비서실에서 모두 근무한 경력이 있다. 초급 통역장교였던 1977년 1월 국방부에서 경호실로 파견돼 1978년 6월 전역 때까지 정보처에서 번역을 했고, 6공 시절 비서실에서 공보비서관으로 영어 불어 통역도 했다.

고 육영수 여사 서거 후 2년이 지난 1977년에도 경호실에는 아직 "우리는 죄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차지철 경호실장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군인 신분인 필자가 느끼기에도 경호실 내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아침마다 출근하면 처별로 조회를 하는데 애국가에 이어 `충정가`라는 경호원의 노래를 합창했다. 당시 알 만한 작곡ㆍ작사가가 만든 군가풍으로 각각 5ㆍ16, 새마을운동, 유신을 주제로 한 3절을 모두 불렀다.

 "이 한 목숨 끓는 피, 충정으로 바칩니다"라는 후렴은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을 대변했다. 분위기가 얼마나 경직됐던지 청와대 청소 직원이 새벽 산책을 나온 대통령을 보고 인사는커녕 반대편 벽을 보고 얼어붙은 듯 돌아 서 있는 일이 벌어져 경호실장이 전 직원에게 `각하 조우 시 행동요령`이라는 지휘서신을 내려 보냈다.

우리 정보처 직원들이 사격훈련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오다가 대오를 맞추지 않은 것이 마침 차지철 실장의 눈에 띄어 그의 집무실 옆 회의실로 불려가 욕이 섞인 훈시를 듣기도 했다. 그때 필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 실장의 무서운 시선과 음성을 체험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경복궁 북쪽의 연병장에서 경호실장이 주재하는 국기 하강식이 열렸는데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부대의 장병과 탱크를 포함한 무기들이 참가했고, 경호원들은 우측 계단에 도열했다.

시간이 되면 차 실장이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초대한 정ㆍ재계 인사와 함께 지휘봉을 들고 입장하는데 대규모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했다.

그 행사를 단상 아래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던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바로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장군으로 이어졌다. 경호실 직원들은 번호를 붙여 지급된 감색 넥타이를 `오늘은 몇 번` 식으로 통일되게 매고 나와야 했다.

그 와중에 `큰 영애`로 불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권유로 경호실ㆍ처 대항 배드민턴 대회가 열려 그나마 긴장이 잠시 풀어지곤 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6공화국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돌아온 청와대는 훨씬 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필자는 다시 경호원들과 국내외에서 각종 행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통역이란 수행 경호원보다 더 가까이에서 대통령을 보필해야 하는 직무다. 경호원들은 통역을 맡은 필자를 더 빨리, 더 가까이 대통령 쪽으로 붙이기 위해 애썼다. 그들과 함께하며 필자는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경호하며 차라리 자신이 대통령 대신 공격받는 것을 최고 영광으로 생각할 사람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경호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피경호자가 무사하면 임무가 끝나는 일이기 때문인데 그만큼 더 끝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총소리가 나면 경호는 끝난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총소리가 나지 않게 모든 가능한 예방조치를 다해야 하는 어려운 직종이다. 경호실 창설 50주년을 맞아 최초 여성 대통령을 모시게 된 경호원들, 특히 더 강화되었을 여성 경호원들의 건승을 기원한다. 
 
 
 

곽중철 (2015-01-05 17:09:35) 
 
경호실에 배속된 경찰과 수경사 경비단 병력은 아침마다 청와대 앞길에서 행군을 하면서 경호원가를 불렀다. 1974년 겨울 큰 영애가 나에게 “아버지께서 아침마다 행군하며 부르는 그 노래가사가 듣기에 거북하다고 하시며 부르지 말도록 하라고 하시니 경호실장실에 전해 달라”고 했다.

내가 차 실장 보좌관에게 전화를 했다. 박 실장 같았으면 두말없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랐을 것이다. 차 실장은 달랐다. 다음날 그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와 가사를 들고 대통령께 달려와 지시사항의 재고를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경호원가’란 노래의 가사 중에서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 이 한목숨 바쳐 님을 위해…’라고 되어 있는 가사가 매우 듣기 거북하다면서 꼭 경호원가를 부르고 싶다면 향토예비군의 노래와 섞어서 부르도록 하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다음부터는 두 노래가 번갈아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박 대통령은 부끄럼이 많은 분이었고 낯간지러운 일은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http://blog.joins.com/dykimriver1940년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 위스콘신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1989년에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 공보비서실 행정관, 대통령 사정비서관, 정무비서관 겸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곽중철 (2015-01-05 17:14:13) 
 
경호원가: 보아라 북악의 우람찬 짓푸름
 민족의 슬기 모아 함께 뭉쳤네
 너와 나 조국 앞에 두 주먹 쥐고
 겨레와 님 위해 다져진 충정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진 우리들
 이 목숨 이 정열 님에게 바치리... 
 
 
 

곽중철 (2015-08-10 14:12:03) 
 
JP “차지철의 월권 행위, 박 대통령은 알면서도 허용” … 차 실장, 총리를 휘하에 둔 특별경호위원회 조직했다
[중앙일보]입력 2015.08.10 00:29 / 수정 2015.08.10 09:35

역사의 비극은 1974년 차지철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긴 박정희 대통령 옆의 빈자리를 차지철이 파고들었다.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한 사람이 생전의 육 여사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공수단 중대장(대위)으로 5·16혁명에 참여했던 차지철은 63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7·8대(광주-이천), 9대(광주-이천-성남-여주) 총선에 지역구에서 내리 당선됐다. 그는 재선 때인 69년 의정 사상 최연소(35세) 외무위원장에 오르자 중절모자에 오버코트를 빼입고 가끔은 보타이까지 하고 다녔다.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웃음이 나기보다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차지철은 “복장을 이렇게 갖춰야 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책임 있는 사람의 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경호실의 위상을 제멋대로 끌어올렸다.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와 33대대를 여단급으로 격상시켰다. 경호실차장에 현역 소장을,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신설해 현역 준장을 임명했다. 경호실차장에는 정병주·문홍구(이상 육사 9기)·이재전(8기)을 차례로 기용했고, 작전차장보로는 육사 11기인 전두환·노태우·김복동을 연이어 임명했다.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지고 포병간부로 임관해 62년 중령으로 예편한 차지철이 현역 장성들을 거느린 막강한 경호실장이 됐다.

 차지철이 벌인 기행(奇行)은 한둘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 열린 경호실의 국기하강식은 차지철을 위한 한 편의 쇼였다. 경복궁 경내 수경사 30단 연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엔 경호원들과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부대 장병들이 도열하고 전차를 포함한 경호실 무기가 위력을 과시했다. 차지철은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에 맞춰 지휘봉을 들고 초청인사들과 함께 입장해 단상에 앉아 지켜봤다. 정부 부처 장·차관과 국회 상임위 위원장들은 물론이고 기업과 학계,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까지 조를 이뤄 이 행사에 초청됐다. 대한민국에서 이름 좀 알려진 인물은 죄다 불려 갔다고 보면 된다. 국기하강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실력자인 차지철이 오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참석했다. 국회의장이던 정일권 전 총리도 차지철이 불러서 국기하강식에 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차지철은 초청인사들에게 “대통령께서 일하시는 데 방해되는 일을 일으키면 보고만 있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정 의장이 연병장에 있는 전차를 보고 “왜 이곳에 전차를 갖다 놓았소?”라고 묻자 차지철은 “부작용이나 일으키는 자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입니다”고 말했다.

 차지철은 국기하강식에 나도 불렀다.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나는 ‘별짓을 다 하는구나’라고 취급하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차지철이 내게 “주요 인사를 모두 초청해서, 국무총리(최규하)와 국회의장도 다들 오셨는데 왜 안 오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난 주요 인사가 아니야.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못 가지”라고 답했다. 나는 그때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민주공화당 총재고문으로 있었을 때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가 “아니, 오셔야 합니다. 한번 보셔야 합니다”고 하기에 “기회 있으면 한번 보지” 하고 건성 대답하고는 말았다. 차지철에겐 내가 만만치 않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도 그때 한 번 물어봤을 뿐 그 이상은 날 어쩌지는 못했다.(하략)

사진 설명: 1977년 1월 17일 청와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이 박정희 대통령의 중앙부처 초도순시에 쓸 책걸상에 직접 앉아서 점검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신임을 독점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부통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다. 그 옆에 이광로 경호실 행정차장보(왼쪽)와 전두환 작전차장보(왼쪽 둘째)가 서 있다. 전두환 차장보는 열중쉬어 자세인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7년 1월 17일은 필자가 국방부에서 청와대 요원으로 발령을 받아 경호실로 첫 출근한 날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