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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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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4-07-10 17:50 조회2,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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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정원장 내정자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4월 경이었다. 1983년 7월 파리유학 후 귀국해 프리랜스 통역사로 일하다가 1988 올림픽조직위 수석통역사로 스카웃돼 노태우 위원장 비서실장이던 그를 비서실에서 대면한 것이다. 세련된 외교관 출신이었던 그는 튜니지 IOC 위원과 조직위원장의 만남을 내가 불어로 통역하는 것을 지켜본 후 "이제 훌륭한 통역사를 구했으니 통역걱정은 없어졌다"고 좋아했다. 나를 뽑은 조직위 총무국장은 "비서관은 그가 모시는 상관(위원장)을 모시듯 모셔라"고 귀띰했다.

나는 1주일에 몇 번씩이나 영/불어로 위원장을 통역하면서 매번 그를 만났고, 모든 해외출장에 그와 함께 위원장을 모시고 나가 형제처럼 위원장을 모셨다. 외국에서는 같은 호텔방에서 지냈으니 참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84년 LA 올림픽 기간에는 한 호텔 방에서 2주일 이상을 같이 머물렀다.

조직위 통역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던 84년 가을인가 방영권 관련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IOC 관계자가 300 million dollars라고 한 것을 그만 3천만달러라고 번역하자 동석했던 고 이영호 체육부장관 겸 조직위 집행위원장이 "노! 3억 달러야!!"라고 외치며 나섰다. 아마 그것이 내 생애 최초, 최대의 오역이었을 것이다. 대회 재정의 최대 열쇠인 방영권이 3천만이냐 3억달러냐는 것은 천지 차이였고 언론과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였는데... 그 때부터 숫자 통역에 더 조심하게 되었다. 현장에 있던 이 선배는 돌아오는 길에 부끄러워 하고 있던 나를 보고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어?"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1985년 노 위원장이 현재 관훈동에 있는 (대성 에너지)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갔을 때도 그는 나를 불러 대표의 통역을 시켰다. 1987년 6/29 선언 다음 날 그가 올림픽 조직위로 노태우 대통령 지명자를 모시고 왔을 때도 마침 방문 중이던 시페르코 (루마니아) IOC 부위원장을 내가 통역했다.

노대표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청와대의 오/만찬 통역은 내 차지였고, 그 때마다 그를 보았다. 1991년 드디어 공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해서는 더 자주 보게되었다. 그는 "곽비는 영어보다 불어를 더 잘해"하고 놀리기도 하고, 왜 "I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하고 통역할 때는 말이 빨라지냐?"고 묻기도 했다.

1992년 9월 22일, 노 대통령은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의 연단에서 제47차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고, 나는 2층의 컴컴한 통역실에서 연설문에 맞춰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약 20분의 연설 후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차례였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연설을 중단했다. 연단을 내려다보니 대통령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바로 앞 페이지에 붙어 넘어간 마지막 페이지를 놓친 것이다. 약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결론을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번역본보다 짧은 말이었다. 필자는 번역본의 내용을 반으로 줄여 빠른 속도로 통역한 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통역을 마쳤고, 참석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연단을 내려온 대통령은 통역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의전수석 비서관은 “곽 비서관이 잘 처리했다”고 보고했다.

1993년 YS가 대통령이 되자 나는 엉뚱하게 유선방송위의 관리국장으로 은둔한 반면 그는 안기부 차장으로 가게 돼 우리의 인연은 끝난 줄 알았다. 당시 YS 청와대에 잠시 머물던 나를 보고  "곽비와 노통의 인연이 얼만데..."하고 염려해주었다. 그 후 나는 YTN 국제부장으로 5년 일하다가 1999년 모교 교수가 되었고, 그의 동정은 언론을 통해서 추적할 수 밖에 없었다. 1997년 2월인가 망명한 북한의 황장엽 씨를 서울공항에서 영접하는 그를 TV로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사람들은 그가 안기부를 나온 후 10년 이상 야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후 그가 일본 대사로 나갔을 때도 그렇구나 했는데 외교부에 근무하는 내 장조카가 그의 비서실장으로 도쿄에 간다고 했을 때 인연이 질기다고 생각했다. 조카가 일본으로 떠난 지 며칠 안돼 전화가 왔고, 전화를 건내 받은 그에게 "인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웃으며 말했고 그도 동의했다. "일본에 놀러오라"는 말과 함께...

그 후 대사의 일본어 통역을 새로 구할 때 도움을 주고 이번 여름에 한 번 도쿄대사관에 놀러가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덜컥 국정원장으로 귀국해 버렸으나 과연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를 마지막으로 뵌 것이 1993년 초 였으니 어언 21년이 넘었구나. 최근 TV로 본 그의 모습은 나이에 비해 눈빛과 표정은 20년 전 그대로였지만 그는 이제 정말 거물(big shot)이 되었다. 과연 그를 다시 보게되는 인연이 이어질까?
               



 

 
 
 

곽중철 (2014-08-06 10:24:34) 
 
비영리국제기구 ICG, 병폐 지적
“장성택 숙청 공개해 휴민트 타격… 기밀누출 심해 美 정보공유 꺼려”

전 세계 분쟁 방지 및 안보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비영리 국제기구 ‘국제위기그룹(ICG)’이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한국 정보기관의 기밀 누출 및 정치 개입 등을 고질적 ‘병폐(pathology)’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정보 유출 가능성을 우려하는 동맹국인 미국이 한국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정보 공유를 꺼린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했다.

한반도 안보 전문가이자 ICG 서울지국장인 대니얼 핑크스톤 박사는 약 1년간 한국 및 관련국 전현직 정부 및 군 정보관계자, 민간 전문가를 인터뷰해 작성한 ‘한국 정보기관 내 병폐의 위험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약 50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 정보기관의 병폐를 △정보 실패 △정보의 정치화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 등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지난해 말 정치적 수세에 몰린 국정원이 국면 전환을 위해 북한 내 장성택과 관련한 이상 동향을 노출해 관련 휴민트(HUMINT·인적정보망)를 상실했을 가능성을 구체적 사례로 제기했다. 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핑크스톤 박사는 “(미국 정보 당국이) 매우 민감한 대북 정보의 경우에는 정보 출처와 방법론까지 공유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한미 간 정보 공유에는 문제가 없다. 보고서의 주관적 해석일 뿐 장성택 숙청 이후 대북 첩보라인이 타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고 해명했다. 비정부 국제기구인 ICG의 본부는 벨기에 브뤼셀에 있으며 전 세계 30여 곳에 지사가 있다.

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곽중철 (2014-11-26 10:53:09) 
 
[배인준 칼럼]청와대 머리맡의 북한 핵
 동아일보 2014-11-25 21:00:00

이병기, 대북 정치공작 성공작 내고

(전략)

북한 핵기술자가 3000명쯤 된다고 한다. 그중 핵심 30명을 우리 쪽으로 데려오는 작업을 국가정보원이 할 수는 없는가. 국정원이 이병기 원장 체제로 바뀐 지 5개월이 지났는데 그가 약체라는 소리가 안팎에서 들린다. 그는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 ‘핵 국가’ 북한을 변화시킬 책임주체 중의 한 사람이다. 당연히 대북 정치공작과 심리전을 고도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원장은 명확한 업무방향 제시나 지시를 하지 않고 있다고 들린다. 이 원장은 원래 대북 협력·대화·포용주의자라서 그런가. 만약 국정원이 청와대 지시에 따라 장차관 정보나 수집하고, 원장은 내부관리에나 골몰한다면 안보 전선에 큰 구멍이 뚫린다. 휘하의 차장들조차 공작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북 심리전을 두려워한다면 ‘국정원을 유지할 이유’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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