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가 내 인생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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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4-08-07 16:42 조회2,7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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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TC가 내 인생의 깃발이 되었다
윤일병 구타 치사사건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세월호의 기억이 이직도 우리를 괴롭히는데…
윤일병 사건은 나의 군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대학 2학년 2학기, 미팅이다 야유회다 정신 없이 놀던 차에 ‘영장’이라는 것을 받고 보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올 것이 왔구나. 고향의 아버님은 고시 공부를 하라고 노래를 부르시는데, 아무 공부도, 아무런 장래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는데 군대에 가야 한다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런 가운데 선배들한테 들은 군대 얘기 중 대학을 가지 않은 어린 병사들이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다니다 입대한 후임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은 내 자존심을 흔들었다. 졸병으로 입대해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연스레 학군단, 즉 ROTC 지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캠퍼스에서 교복에 모자를 쓰고 선배들에게 큰 소리로 “충성!” 하면서 주위 학생들을 놀래키는 ‘바보티시’는 싫었지만 졸병으로 입대해 어린 선임들한테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지위했다. 무시무시한 논산훈련소보다는 자유스런 캠퍼스에 2년 더 머물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물론 캠퍼스 내에서의 군사훈련도 쉽지 않았고 학군단 건물 지하에서의 내무 생활도 힘들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 방학 동안 군용 열차를 타고 실무 부대로 가는 야영훈련은 땀이 많은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4학년 선배들에게도 많이 맞았고 야영훈련에서는 대위급의 구대장들 한테 빳다도 숱하게 맞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을만했다. 동료들도, 구대장도 다 같은 장교라는 자부심으로 행동했으므로 자존심의 상처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어서는 여유도 생겨 교내 영어연극의 주인공 역할도 했다. 재미있었다.
장교복무 연한이 사병보다 몇 달 더 길다는 이유만으로 최근 학군단 지원자가 정원 미달이라는 소식은 안타깝다. 윤일병처럼 빨리 제대도 못하고 맞아 죽는 것보다 학군단이라는 길이 얼마나 보람 있고 좋을 수 있는 선택일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려 한다.
4학년 때 치른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해 2월 대학졸업 후 김해의 공병학교로 내려간 나는 첫 한달 동안은 후회도 했다. 훈련이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고 학군단 출신 선배 장교들의 구타가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나는 훈련소의 세끼 식사량이 너무 작아 배가 고프기도 했다.
매일 밤 10 키로를 뛰는 소위 3천리 구보를 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내 몸은 날듯이 가벼워졌고, 주말 휴가 때는 부산의 남포동 거리를 호기롭게 누비고 다녔다. 넉 달이 지나고 나는 몇몇 대학 동기들과 함께 서울 근처 성남의 행정학교의 영어교관으로 배치되어 휘파람 불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서 전투복 아닌 정복을 입고 군용 출퇴근 버스를 타고 모교가 있는 동네 하숙집에서 출퇴근했고 퇴근 후에는 모교의 연수원에서 불어를 배우기도 했다. 6개월 후 영어교관 생활이 지루해졌을 때쯤에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본 번역요원 시험에 붙어 24세의 나이에 청와대에 근무하게 된다. 물론 그 때는 내가 통번역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1년 반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는 동안 한국관련 외신기사를 1주에 엿새씩 번역했고, 그것이 통번역사가 되는 기초를 닦아주었다. 말리는 경호원들의 팔을 뿌리치고 전역해 현대건설에 취직했더니 통 재미가 없었다. 번역이 더 재밌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만류하는 현대 상관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모교에 설립된 통역대학원의 1기로 입학했다. 돌이켜보니 군대가 내 직업을 정해준 것이요, 나라가 학군단 이라는 제도를 통해 나의 인생 방향을 잡아준 것이다. 내 군 생활은 너무 특별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병으로 군대 가 인간 이하의 대접은 받지 않겠다”는 나의 약간은 비겁하지만 정당할 수 있는 자존심이 나를 살린 것이다. 군대 생활을 오래하지 않겠다고 사병으로 갔다가 변을 당하거나 노무현의 표현대로 “뺑이 치는” 아들들이 내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윤일병 구타 치사사건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 세월호의 기억이 이직도 우리를 괴롭히는데…
윤일병 사건은 나의 군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대학 2학년 2학기, 미팅이다 야유회다 정신 없이 놀던 차에 ‘영장’이라는 것을 받고 보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올 것이 왔구나. 고향의 아버님은 고시 공부를 하라고 노래를 부르시는데, 아무 공부도, 아무런 장래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는데 군대에 가야 한다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런 가운데 선배들한테 들은 군대 얘기 중 대학을 가지 않은 어린 병사들이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다니다 입대한 후임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은 내 자존심을 흔들었다. 졸병으로 입대해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연스레 학군단, 즉 ROTC 지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캠퍼스에서 교복에 모자를 쓰고 선배들에게 큰 소리로 “충성!” 하면서 주위 학생들을 놀래키는 ‘바보티시’는 싫었지만 졸병으로 입대해 어린 선임들한테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지위했다. 무시무시한 논산훈련소보다는 자유스런 캠퍼스에 2년 더 머물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물론 캠퍼스 내에서의 군사훈련도 쉽지 않았고 학군단 건물 지하에서의 내무 생활도 힘들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 방학 동안 군용 열차를 타고 실무 부대로 가는 야영훈련은 땀이 많은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4학년 선배들에게도 많이 맞았고 야영훈련에서는 대위급의 구대장들 한테 빳다도 숱하게 맞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을만했다. 동료들도, 구대장도 다 같은 장교라는 자부심으로 행동했으므로 자존심의 상처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어서는 여유도 생겨 교내 영어연극의 주인공 역할도 했다. 재미있었다.
장교복무 연한이 사병보다 몇 달 더 길다는 이유만으로 최근 학군단 지원자가 정원 미달이라는 소식은 안타깝다. 윤일병처럼 빨리 제대도 못하고 맞아 죽는 것보다 학군단이라는 길이 얼마나 보람 있고 좋을 수 있는 선택일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려 한다.
4학년 때 치른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해 2월 대학졸업 후 김해의 공병학교로 내려간 나는 첫 한달 동안은 후회도 했다. 훈련이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고 학군단 출신 선배 장교들의 구타가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나는 훈련소의 세끼 식사량이 너무 작아 배가 고프기도 했다.
매일 밤 10 키로를 뛰는 소위 3천리 구보를 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내 몸은 날듯이 가벼워졌고, 주말 휴가 때는 부산의 남포동 거리를 호기롭게 누비고 다녔다. 넉 달이 지나고 나는 몇몇 대학 동기들과 함께 서울 근처 성남의 행정학교의 영어교관으로 배치되어 휘파람 불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서 전투복 아닌 정복을 입고 군용 출퇴근 버스를 타고 모교가 있는 동네 하숙집에서 출퇴근했고 퇴근 후에는 모교의 연수원에서 불어를 배우기도 했다. 6개월 후 영어교관 생활이 지루해졌을 때쯤에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본 번역요원 시험에 붙어 24세의 나이에 청와대에 근무하게 된다. 물론 그 때는 내가 통번역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1년 반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는 동안 한국관련 외신기사를 1주에 엿새씩 번역했고, 그것이 통번역사가 되는 기초를 닦아주었다. 말리는 경호원들의 팔을 뿌리치고 전역해 현대건설에 취직했더니 통 재미가 없었다. 번역이 더 재밌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만류하는 현대 상관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모교에 설립된 통역대학원의 1기로 입학했다. 돌이켜보니 군대가 내 직업을 정해준 것이요, 나라가 학군단 이라는 제도를 통해 나의 인생 방향을 잡아준 것이다. 내 군 생활은 너무 특별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병으로 군대 가 인간 이하의 대접은 받지 않겠다”는 나의 약간은 비겁하지만 정당할 수 있는 자존심이 나를 살린 것이다. 군대 생활을 오래하지 않겠다고 사병으로 갔다가 변을 당하거나 노무현의 표현대로 “뺑이 치는” 아들들이 내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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