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지배했던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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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4-11-10 17:58 조회2,6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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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따라 세월 따라
한국외대 명예교수 곽중철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아가씨--이 노래가 나온 해가 1964년이니 53년생인 나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대구 동성로 국제시장 앞에 있던 적산가옥에서 제법 유복하게 자라던 나는 그 큰 집의 사랑채에 세 들어 살던 홍인희(洪仁熙)라는 탈북자 사업가의 안방 축음기에서 밤낮으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어린 나는 이 노래를 무의식 중에 외워버렸고 평생 뽕짝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까. 그 때만해도 소음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 “전축소리 좀 낮춰달라”고 요구하기는커녕 공짜로 노래를 듣는다고 좋아했을 거다. 5학년 때던가 학교에 실습 나왔던 교생 선생님이 돌아가던 날 환송회에서 나는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고 동요를 기대하던 선생님들이 놀란 눈으로 박수를 치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도 이 노래는 애절한 곡조와 가사가 천하의 명곡으로 자리잡았던 듯하다.
큰 일본식 주택의 2층에 다다미로 만들어진 홀이 있었고 한량이었던 아버님은 춤 선생을 불러 놓고 친구들과 춤을 배우셨는데 내외 한답시고 손에 수건을 두르고 여선생의 손을 잡고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전축으로 틀었던 노래 중 하나가 당시의 팝송 “Your cheating heart”였고 그 노래를 1층에서 듣고 계셨던 어머니가 후일담으로 입을 비쭉거리시며 ‘유-치링하—‘라고 부르시던 것을 기억한다. 영어를 모르시던 분들이 그 사랑 노래를 어떻게 이해하셨을까 궁금하다.
‘동백아가씨’와 함께 내가 배웠던 노래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신라의 달밤’ 이었는데 이 노래는 중학교 2학년 소풍에서 불러 내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던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님은 기분이 좋으실 때 노래를 흥얼거리셨는데 “--- 남은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 바다 멀리 멀리”하는 구절이 그 유명한 ‘해운대 엘레지’ 3절 중 2절의 마지막 가사임을 한참 후에나 알았다. 1956년 손인호가 부른 이 노래는 한산도 작사 백인호 작곡으로 부산 해운대에 노래비가 서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들었던 오래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역’ --- 처음으로 객지 생활을 하던 촌놈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고, 방학이면 고향 가며 탔던 고속버스에서 들리던 ‘추풍령 고개’라는 남상규의 노래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뽕짝에 경도 됐는지 서울 친구들이 우두 컴컴한 음악감상실에서 듣던 팝송은 성에 차지 않았다. 영문과를 다녔지만 솔직히 팝송의 영어가사는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인터넷도 노래방도 없던 시절이라 모든 가사를 다 외워야 남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뽕짝은 긴장한 몸을 무장해제 시킨다. 몸을 나른하게 하니 바쁠 때는 부를 수도 없고 불러서도 안된다. ROTC로 군 복무를 한 나는 후보생 시절 불렀던 군가들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아직도 군가를 들으면 가슴이 뛰고 총 들고 뛰어나가고 싶다. 자신이나 아들을 군에서 뺀 공직자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학군 후보생 시절 여름방학 도중 하계훈련을 받으러 간 부대에서 훈련병 수백명을 위한 위문 공연이 열렸을 때 ROTC 대표로 무대에 오르면서 선곡한 것이 나훈아의 "녹슬은(슨) 기찻길"... 철마를 다시 북으로 달려가게 하려는 노래는 전 장병의 심금을 울렸다고 자부한다. 초급장교로 청와대 경호실 근무시절 조회 때마다 불렀던 박정희를 향한 ‘충정가’도 평생 못 잊을 노래 중 하나다.
2015년 11월 ‘노래하는 국회의원’으로 유명한 김JS 의원(새누리당·비례대표)이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선다고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유튜브에 올라있는 김 위원의 동백아가씨를 들었다. 부끄러웠다. 음정도 박자도 맞는 게 없었다. 그런 재주로 카네기 홀에서 한다고? 하늘에서 카네기가 노할까 무섭다. 음치란 자기가 음치인줄 모르고, 누가 노래를 잘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내가 좋아하는 외국 국가는 단언코 프랑스의 라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1792년에 제작됐는데 작사 및 작곡자는 공병장교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트라스부르의 숙소에서 하룻밤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의(大意)는 “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들, 영광의 날은 왔다. …자아, 진군이다. 놈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 뿌리자”이다. 가사는 라인강변으로 출정하는 용사들의 심경을 그린 것으로 노래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깝다. 그러나 밝은 선율이 평범하고 호전적인 가사를 완전히 살리고 있어 곧 도처에서 불리게 되었다. 정식 국가로서 채택된 것은 1879년의 일이다.
‘라마르세예즈’라는 노래제목은 당시 전국에서 파리로 모여든 의용군 중 마르세유로부터 온 일단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파리로 진군해온 데 연유하며, ‘마르세유군단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들의 피로 밭고랑을 적시자"는 내용의 프랑스 국가는 '민중의 혁명 정신이 담겨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 내에서는 개사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아이들이 부르기에 너무 끔찍하며 이민자 국가인 프랑스에서 인종차별적으로 들린다는 이유다. 알제리계 프랑스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도 "라 마르세예즈를 들을 때마다 섬뜩하다"고 말했다. 영국 국가는 여왕의 만수무강을 빌고 '우리를 오래오래 다스리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많은 국가들이 현대에 와서 이런저런 이유로 비판을 받곤 한다.
역사학자인 도널드 서순은 “특정한 공연자가 어떻게 수퍼스타가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유럽문화사』)고 썼다. 공연자를 노래로, 수퍼스타를 국가로 바꿔도 과히 그르지 않다.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곤 한다. 하룻밤 영감에 사로잡힌 왕당파 군인이 휘갈겨 쓴 ‘더러운 피로 밭고랑을 적시겠다’는 노래가 혁명가요가 되고 결국 프랑스 국가(라 마르세예즈)가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과정 자체가 신화다. 일단 그 반열에 오르면 그 반열이란 게 중요할 뿐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라 마르세예즈를 부를 때 왕당파 군인을 떠올리지도 아예 그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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