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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통역사 설장수와 원민생(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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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05-26 10:21 조회2,8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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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조선 초 통역사 설장수와 원민생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조선 초만 해도 임금의 통역을 담당하는 어전통사(御前通事)의 면면은 화려하고 쟁쟁했다. 태조 때의 설장수(?長壽 1341년~1399년)는 특이하게도 위구르 혈통이었다. 지금의 중국 서부 투르판 근처에 있던 고창왕국이 1275년 몽골군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설장수의 아버지 설손(?孫)의 고조할아버지는 원나라에 투항했다. 한편 설손은 원나라에 와있던 고려의 공민왕과 친분을 쌓게 되고 공민왕 7년(1358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아들들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했다. 공민왕은 설손을 고창백(高昌伯)에 봉하고 토지를 내려 크게 우대했다. 이때 10대 후반이었던 설장수는 1389년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창왕을 몰아내는 흥국사 9인회의 멤버에 들어 '9공신'으로 불렸지만 막상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건할 때는 정몽주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정도전과 극한적인 대립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설장수가 태조 3년(1394년) 오늘날의 동시통역대학원이자 외교안보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역원(司譯院)의 책임자인 제조(提調)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국어 실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설장수는 원래부터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통사보다는 외교관에 가까웠고 중국에 여덟 번이나 다녀오며 개국 초기 껄끄러웠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정종의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온 이도 설장수다.

태조에게 설장수가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원민생(元閔生 ?~1435년)이 있었다. 그는 중추원 부사 원빈의 아들이면서 민부(閔富)라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마도 원빈의 서출(庶出)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부는 그에게 덕생(德生)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먼 훗날 그가 사역원 부사(종3품)에 오르고 나서야 원래의 성 '원씨'를 회복하는데 이때 가운데 자는 자신을 길러준 민부의 성에서 취해 이름이 원민생이 되었다. 이름 자체에 그의 고단했던 삶의 역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신분이 미천했던 그는 설장수와 달리 통사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워낙 중국말을 잘했기 때문에 통사의 자격으로만 무려 14번 중국을 다녀왔다. 그 후 당상관에까지 올라 이제 통사가 아니라 정식 사신으로도 7번이나 중국을 다녀왔다. 한번 가면 4~5개월씩 걸리는 사행(使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21번의 중국 방문은 초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원민생에게 어전 통역을 맡길 만큼 원민생을 총애했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 황제 영락제도 원민생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실록에도 "말이 지극한 심정에서 나오므로 황제가 경의 충절을 높이 칭찬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또 조선의 사신이 갔을 때 원민생이 보이지 않으면 황제는 반드시 "어찌하여 원민생은 오지 않았는가?"라고 챙길 만큼 원민생을 아꼈다.

통사로 일하던 원민생이 사신으로 승격하게 되는 것은 태종 17년 황제가 조선에 미녀들을 요구하면서부터다. 이에 원민생은 '처녀 주문사(處女 奏聞使)'가 되어 황제에게 헌납할 처녀들을 데리고 북경을 간다. 시작은 그랬지만 당대 최고의 중국어 실력을 무기로 원민생은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태종 1 8년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을 왕세자로 삼을 때 이를 명나라에 알린 사람이 바로 원민생이다. 당시 세자 교체는 명나라 입장에서는 주변 정세의 불안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꺼렸지만 원민생은 깔끔하게 처리했다. 명나라 황제나 고위 관리들과 '속내'까지 소통할 수 있는 중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 후 원민생은 세종대에 와서도 세종 11년 당시 국가적 현안이었던 금은(金銀)의 조공(朝貢)을 면제받는 외교적 개가를 올렸다. 고려 말엽부터 명나라에 금은을 바치는 관례가 생겨나 태종 때도 줄곧 면제를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가 마침내 이때 조공 면제라는 외교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와 가까웠던 명나라 환관이자 사신인 황엄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까탈스러운 황제의 의중을 황엄이 그때그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의 통사로는 김하와 이변 두 사람이 최고를 다퉜다. 그리고 이변의 후손이 이순신이다.


입력 : 2008.05.23 13:29 / 수정 : 2008.05.2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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