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추모 문집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10-18 10:31 조회2,780회 댓글0건

본문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쓴 글이 실린 추모문집이 두 권 연달아 나왔다. 하나는 <노태우를 말한다>이고 또 하나는 <박술음 선생과 외대의 탄생>이었다. 병석에서 8순(80세)를 맞은 노태우 전 대통령을 위해 전 비서진이 <노태우 회고록>을 펴낸 후 다시 그의 지기 175명이 쓴 덜 공식적인 생전 추모집을 발간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가 젊은 시절 약 10년을 모셨던 분이고, 박술음 전 외대 초대총(학)장은 내가 1972년부터 76년 초까지 외대 영어과를 다닐 때 영어과 교수 겸 학장이셨다(외대가 당시는 단과 대학이었으니 학장이었고, 종합대가 되자 총장이 된다).

어제(10월 17일) 오후 4시 통대가 있는 국제관 좌측 양지바른 곳에 박술음 선생의 동상을 제막하는 행사가 열려 참석했고, 약 40분 동안 대학 재학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기회가 되었다. 난타로 유명한 송승환 아랍어과 동문의 사회와 테너 김철호 삼육대 교수의 노래 '선구자'와 함께 부른 '스승의 노래'가 행사의 격을 높였다.

새로 완공한 본관 지하 1층 연회장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받아온 추모 문집에 실린 내 글을 읽다보니 "내가 쓴 글이 맞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라는 느낌을 또 받았다. 그것은 과거에 쓴 내 기고문, 논문, 저서, 축사, 주례사 등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서 논문을 포함한 '글'을 쓰려는 모든 후배들에게 나는 "일단 쓰기 시작하라. 시작이 반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써야지"하고 생각했다가도 막상 타자를 치기 시작하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하며 새 생각이 마구 떠오르기도 하니 일단 용감하게 쓰기 시작하라는 것이다. 특히 워드 프로세서가 발달해 편집이 사통발달로 용이해진 지금, 인간의 글쓰기는 기계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다. 이른 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라 했던가? 물론 이 시대 나이든 문인들은 아직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육필을 고집한다고 하지만...

추모문에는 물론 당사자를 욕되게하는 내용은 삼가는 것이 예의다. 댱사자의 좋은 점을 최대한 살려 부각시켜야 하고, 그러기 싫으면 안쓰면 그만이다. 노태우를 따랐던 많은 이들이 그랬듯 필자도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다른 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추억하는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도 정치권의 그 누가 부정한 돈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건가??   

두 글을 컴퓨터에서 찾아 아래에 싣는다....   



 

 
 
 

곽중철 (2011-10-18 14:39:44) 
 
필자가 외대 영어과 19회로 입학한 것이 1972년이었으니 2대 학장을 지낸 후 1966년 제6대 학장으로 재취임하셨던 박술음 박사님을 처음 뵌 것은 그가 70세였을 때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당시 A, B, C 세 반으로 분반되었던 영어과 19회 신입생 100여명은 지금은 없어진 구 본관의 3층 큰 교실에서 그의 영문법 강의를 들었다.
머리가 채 자라지도 않고, 여드름이 남아있는 얼굴로 교복을 벗은 어색한 사복차림으로 학교 근처 하숙집으로부터 등교한 필자는 대학의 동기생들과 특히 처음으로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게 된 여학생들을 살피기에 정신이 없었으리라…
학장이라는 분이 교실에 들어섰을 때, “학장님도 강의를 하시나?”하면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나이 드셨지만 ‘깨끗하게 늙으신’ 자그마하고 단아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측면에서 보기에 긴 턱이 약간은 우스웠지만 그의 분위기는 그의 영어 이름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엄숙(Solemn)함, 그 자체였다.
그가 제시한 영문법 교과서는 문법 위주로 입시공부를 한 필자에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입시에 찌든 신입생의 시각을 새로 열어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 지난 6년 동안 매달렸던 그 영문법이 대학에서는 저렇게 설명이 되는구나, 신기한 눈으로 매주 그의 강의를 들었다.
37년이 흐른 지금, 이상하게 기억에 뚜렷한 순간은 그가 한 문장에 나온 peerless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였다. “peer는 짝이라는 말이니 짝이 없다, 경쟁상대가 없다, 필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선전에 나오는 피어리스 화장품은 짝이 없을 정도로 좋은 화장품이라는 뜻이지요.” 아직 상품 이름에 영어를 많이 쓰지 않았던 그 시절에 그가 해준 단어 해설은 어린 신입생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아, 우리나라 상품에서 쓰는 영어에도 다 뜻이 있고, 저렇게 쉽게 설명이 되는구나…!”
그렇듯 그의 강의는 양보다는 질의, 간결하고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이었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그의 혜안(clairvoyance)이 번득이는 강의를 듣기 위해 필자는 강의 시간에 늦지 않게 등교했고, 강의 도중에도 옆 자리의 여학생보다는 강의 내용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강의는 2차 대학에 들어왔다는 열등감에 빠져있던 필자에게는 “학교를 잘 골랐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한 줄기 등불이었고, 영어는 대학에서도 전공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과목이라는 확신을 들게 했다.
데모를 많이 해 휴교도 잦았던 그 시절, 2학년 1학기에 날아온 징집 통지서(영장)는 미팅과 축제로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필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고심 끝에 학군단에 지원하는 결정을 내리게 했다. 3학년부터 수시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필자가 내린 결론은 외대생들이 흔히 하는 외무 고시 공부를 하지 못할 바에는 전공인 영어라도 열심히 해서 졸업과 제대 후를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영어는 출세의 열쇠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ROTC훈련이 있는 날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 등교 전까지 하숙집 방에서 영어책을 탐구하게 된 것도 1학년 때 배운 박 교수님의 영문법 강의가 큰 원동력이 되었다. “나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 박 교수님 같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갖춰야지”하는 잠재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는 필자가 모교의 교수가 될 줄은 전혀 꿈도 꾸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1979년에 설립된 통역대학원에 입학하고, 약 20년 후 대학원 교수가 된 후 첫 동문 원장이 된 것도 그 시발은 박 교수님의 영문법 강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학년 말, 동생이 대학 입시를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바람에 같이 하숙집에 머물게 되자 크게 할 일이 없었던 필자는 영어과의 영어연극에 지원했다.
당시 영어과장이셨던 고 이영걸 교수님과 연극 감독 Bill Ryan 교수님이 1975년 영어연극 후보 작품으로 뮤지컬 한 편과 브람 스토커(Bram Stoker) 원작의 ‘드라큘라 백작’을 들고 결재를 갔더니 “금년에는 특이하게 흡혈귀 연극을 해보라”고 웃으면서 권고하셨다고 했다.
추운 겨울날 난방도 안 되는 한 강의실에서 열린 오디션에 나갔더니 라이언 교수가 “주연인 드라큘라 역은 키가 크고 마르며 목소리가 강해야 한다”고 했다. 주연에 지망했던 나는 다른 키 큰 남학생과 함께 더블 캐스트 되었고, 곧 연습이 시작되었다. 3월 개학이 되자 함께 연습하던 남학생이 포기를 선언했고 필자는 싱글 캐스트가 되어 4월말 남산의 드라마 센터에서 공연된 4회 연극을 주연으로 모두 소화하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학교 예산의 반이 들어간다는 최대 행사였던 영어 연극에 박 학장님은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셔서 우리는 대학생 답지 않은 호사를 누렸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직전, 특유의 검은 양복에 어두운 색깔의 넥타이를 매신 모습으로 오랜만에 뵌 학장님은 주연인 필자의 손을 잡으시며 “수고했다. 자네 연기를 보니 금년 영어과 연극을 드라큘라 백작으로 하기를 잘 했다”고 크게 격려해 주셨다.
“대학연극에 웬 흡혈귀 이야기냐?”가 아닌, 뭔가 색다른 도전을 하도록 영단을 내려주신 덕분에 필자는 학군 장교 후보생으로 연극을 핑계로 머리를 기르고, 구레나룻까지 붙인 고급 장교같이 힘찬 드라큘라 백작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 때 외웠던 대사들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남아 박 교수님께 들었던 영문법과 함께 지금도 내 영어 속에 녹아있으리라. 
 
 
 

곽중철 (2011-10-22 10:14:10) 
 
외국 정상들과의 능숙한 대화
---수고했다는 그 말에...

곽중철 대통령공보비서관

 필자가 노태우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을 1977년 하반기였다. 나는 당시 새파란 24세의 육군 중위로 청와대 경호실 정보처의 영어번역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국방부의 청와대 요원으로 근무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였는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으로 나가는 당시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의 후임으로 그 분이 청와대에 온 것이다. 그 후 약 1년 동안 같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고등학교 21년 선배라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자주 뵙지는 못했다. 1978년 6월 내가 군복무를 마치면서 청와대를 떠날 때에는 후일 청와대에서 그분을 다시 뵙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약 5년 후 그분과의 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3년의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3년에 귀국한 내가 1984년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수석통역으로 스카우트되어, 위원장으로 있던 그분의 통역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 5년 전 처음 뵌 적이 있다”라는 인사를 드린 후 위원장님을 위해 처음 불어로 통역한 사람은 튀니지 IOC 위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약 30분의 면담을 통역하고 나자 위원장께서 비서관을 통해 내린 나에 대한 평가가 “잘하는데 약간 덤비는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한국 제1기 통역사 중 하나로 해외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와 피가 끓던, 아들 같은 후배였으니까 그럴 만도 했으리라.
그때부터 그분의 귀와 입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통역을 담당했다. 1984년 올림픽이 열렸던 LA에도 모시고 나가 2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역하는 등 수많은 출장길에서 외국인들과 만나는 그분의 분신이 되었다. 그분은 외국에 나가면 수행한 비서관과 나에게 “외화를 아껴 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 공식 일정이 끝나면 서울의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모범생이었다.
나는 그분의 상대역인 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도 아주 친숙한 관계가 되었고 사마란치는 노 대통령 다음으로 내가 많이 통역을 한 분이 되었다. 그래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입을 열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할지 알 정도였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역을 시작하면 “You are used to my English” 하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다 1986년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나간 그분이 당으로 찾아오는 외국 인사들의 통역을 위해 한 달에 몇 번씩 관훈동 당사로 나를 불렀다.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올림픽 통역안내과장으로 일하면서 가끔씩 그분을 수행해 출장통역 하던 중 1987년 6.29 선언을 한 바로 그 다음 날 그분이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회관에 들러 조직위 직원들을 격려한 후, 방한 중이던 고 시페르코 IOC 부위원장과 접견할 때 오랜만에 통역을 하면서 나는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3년이나 통역한 분이 우리나라의 민주화선언을 하다니, 내 어깨가 쭉 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대통령이 되신 그분은 “곽 군은 일단 올림픽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라!”라고 하셨고, 나는 1988년 9월 17일 메인스타디움에서 노 대통령께서 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선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다시 청와대로 출장 통역을 나갔다. 특히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는 국빈 만찬의 통역은 모두 내 차지였다. 혼자서 이른 저녁을 먼저 챙겨 먹고 검정 나비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대통령의 뒤에 앉아 통역을 끝내고 나면 어떤 때에는 “수고했어! 배고프지?”라고 격려와 배려를 하시기도 했다. 또 해외순방 때에는 대통령 특별기를 함께 타고 나가 통역을 했는데 총 16번의 해외출장 중 14번을 따라 나갔다. 요사이도, 해외순방 수행원들을 위해 인쇄한 소책자들을 보며 추억에 젖곤 한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후 나는 비서실 공보비서관으로 발령 받아 다시 한 울타리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기 시작했다. 공보비서관으로 대통령이 할 말씀들을 작성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그분을 통역했고, 그 시절이 내 젊은 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보였다고 지금 나의 가족은 증언한다.
1992년 9월 22일, 노 대통령은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의 연단에서 제47차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고, 필자는 2층의 컴컴한 통역실에서 연설문에 맞춰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약 20분의 연설 후에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차례였는데 대통령께서 갑자기 연설을 중단했다. 연단을 내려다보니 대통령께서 뭔가를 찾고 계셨다. 약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결론을 말했다. 필자가 들고 있는 번역본보다 짧은 말이었다. 필자는 번역본의 내용을 반으로 줄여 빠른 속도로 통역 한 후 “경청해주셔서 감사하다”라며 통역을 마쳤고, 참석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연단을 내려온 대통령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의전수석비서관은 “곽 비서관이 잘 처리했다”라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이 한 16번의 해외순방 중 내가 수행하지 않은 것은 취임 초기의 첫 일본 방문과 고르바초프를 만난 1990년 샌프란시스코 극비 방문뿐이었다. 노 대통령의 주된 업적이 이 나라 민주화의 아침을 열고 북방외교로 한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드높인 것이라면, 나는 그분의 외교활동에 조그만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노 대통령은 만나는 외국 고위인사들에게 신중하고 세련되고 점잖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사전에 준비된 말씀자료를 바탕으로 자료의 취지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노련한 배우처럼 대화를 풀어가는 그분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도 그랬고, 영국 여왕이나 필립 공을 만날 때도 그랬으며 중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도 그랬다. 가끔씩은 막 통역을 시작하려는 내 팔을 붙들고 자신의 발언내용을 확인하며 신중한 통역을 당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통역을 끝내고 힘에 부칠 때 그분이 던지는 “오늘 곽 군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노 대통령께서 임기를 마친 후에도 나는 그분을 계속 통역했다. 연희동 집으로 찾아오는 해외인사들을 통역하러 가면 집 앞에서 경찰이 신원조사를 했는데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찾은 사마란치 위원장을 만나러 그가 투숙한 호텔방으로 갔을 때는 대통령 재임 시와는 달리 조금 늦게 나타나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는 사마란치를 보고 짓던 그분의 씁쓸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들은 그분을 ‘물태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분이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물처럼 좋은 게 어디에 있는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지 않고 주위의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며 적응했기에 이 나라의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또 북방정책으로 불리는 노 대통령의 외교적인 업적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하며 그분의 평안한 여생을 기원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