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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訪美연설문 마지막 한 장 사라져 관계자들 사색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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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3-06-21 13:21 조회3,36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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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취재 인사이드] 대통령 訪美연설문 마지막 한 장 사라져 관계자들 사색됐는데… • 신동흔 조선일보 여론독자부 차장 입력 : 2013.06.20 03:06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이 전하는 '대통령 연설문의 세계'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the West Wing)’은 백악관 대통령 집무동(棟)인 웨스트윙의 일상(日常)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 속의 백악관 참모들 가운데 항상 펜과 종이를 손에 들고 때로는 혼자 중얼거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연설문 담당인 공보수석입니다. 대통령의 모든 연설 원고를 책임진 그는 딱 맞는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합니다. 그는 사전에 대통령 및 참모들과 브레인 스토밍을 갖고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한 다음 원고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전달합니다.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그는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해 멋진 원고를 씁니다. 다른 참모들이 공보 수석에게 달려와 “오늘 연설 좋았다, 잘 썼다”고 얘기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첫 지명될 당시 유명한 ‘담대한 희망’ 연설문을 썼던 존 파브로는 오바마 대통령을 따라 백악관에 입성해 2008년 사상 최연소(만 23세) 백악관 참모가 됐습니다. 파브로는 대통령 최측근에서 5년 넘게 일하다가 올해 초 백악관을 떠나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연설문 담당자들은 어떨까요. 저는 얼마 전 고(故)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1급)을 만나 조선일보에 기사화했습니다. (중략) 노태우 전 대통령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답니다. 언제인가 미국 방문 중에 비서들이 실수로 연설문 원고에서 마지막 한 장을 빼놓고 인쇄해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을 대통령이 연단에 오른 뒤에 알았답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모두 사색이 돼 떨고 있을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연설을 마쳤다고 합니다. 미리 전달한 원고를 다 외웠기 때문에 인쇄된 원고의 마지막 장이 빠져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제서야 참모들도 노 대통령이 연설문을 다 외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 연설문에 대해 2%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든가,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보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식의 명문장을 남긴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의 연설문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개 언사(言辭)’을 중시하는 미국 정치문화와 대부분의 중대사는 막후(幕後)에서 이뤄지는 한국 정치 문화와의 큰 간극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저는 국어 교과서에도 대통령의 연설문이 통째로 실리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궁금합니다. 곽중철 (2013-06-21 13:26:06)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미리 전달한 원고를 다 외웠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아무리 물태우라도 연설을 다 외우지는 않았겠지요? 그제서야 참모들도 노 대통령이 연설문을 다 외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요? 이 역시 소설입니다. 다음은 마침 그 사건과 관련해 제가 2011년 초 써놓은 글입니다. 곽중철 (2013-06-21 13:27:07) 통역사는 타고나는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중철 1992년 9월 22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의 연단에서 제47차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고, 필자는 2층의 컴컴한 통역실에서 연설문에 맞춰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약 20분의 연설 후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차례였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연설을 중단했다. 연단을 내려다보니 대통령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바로 앞 페이지에 붙어 넘어간 마지막 페이지를 놓친 것이다. 약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결론을 말했다. 필자가 들고 있는 번역본보다 짧은 말이었다. 필자는 번역본의 내용을 반으로 줄여 빠른 속도로 통역한 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통역을 마쳤고, 참석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연단을 내려온 대통령은 통역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의전수석 비서관은 “곽 비서관이 잘 처리했다”고 보고했다. 1979년 9월 국내 최초로 설립된 통역대학원에 1기로 입학했으니 통역이라는 세계에 들어온 지 32년이 되어간다. 대학원 졸업 후 약 20년 동안 여러 조직에서 통역 관련 일을 하다가 1999년 모교 교수로 임용된 지 11년 만에 연구년을 보내다 보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대학에서 내게는 제일 쉽고 재미있었던 영어를 전공한 후, 1977년 초 24살 먹은 육군 소위로 국방부에서 청와대 요원으로 파견돼 번역을 시작했다. 당시 서슬 퍼렇던 경호실장을 위해 매일 외신의 한국관련 기사를 번역해 올렸다. 당시는 외신이 모두 엄격한 검열을 받아 일반 독자는 한국관련 기사를 읽기 힘든 시절이었다. 국가가 나를 통역사로 키워준 셈이다. 내가 외신을 힘들게 번역해 올리면 같은 방의 선배가 교정을 봐주었는데 신기한 것은 그 선배가 원문을 보지 않고도 귀신같이 내 오역을 집어내는 것이었다. 그 비결을 물었더니 선배는 “너보다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일 해야 하는 번역 일이 지겨워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위로 만기 제대하면서도 내가 통역사가 될 줄은 몰랐다. 호기롭게 제대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못돼 내 경쟁력은 외국어뿐임을 깨닫고 1979년 9월 최초로 설립된 통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통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니 정말 어려웠다. 나는 외국어에서도 둔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1년 후 실시된 국비장학생 선발시험에 거짓말처럼 합격해 파리의 통역대학원(ESIT)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 때는 선발위원들이 혼자 말처럼 “통역사는 타고 난다”라고 하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1980년부터 3년의 파리 유학시절의 고통은 영원히 못 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모국어를 포함한 3개 국어 통역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파리 학교에서는 한국어가 교육대상이 아니어서 통역에 가장 중요한 모국어를 박탈 당한 채 불어를 영어로 옮기는 공부를 위주로 했다. 당시에는 쌀쌀맞기만 했던 파리 학교 교수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 고맙다. 한국 정부에서 아무런 재정 지원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 같은 외국 학생을 무료로 가르쳐주었으니 그것이 프랑스 국시의 박애(fraternite) 정신이 아니었나 싶다. 3년 만에 겨우 졸업 후 귀국해 통역사 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에 취업해 통역안내과장이 되고 보니, 올림픽을 함께 준비할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었다. 특히 파리의 모교에 한국어 통역반을 만들어 후배들은 나보다 편하게 공부시키고 싶었다. 당시 체육부 예산을 따내려 동분서주하는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너는 그렇게 어렵게 공부했으면서 후배들을 그렇게 키울 필요가 있나?”고 우려도 했다. 그러나 파리 학교로 보낸 후배 10명이 최단시간에 편안히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올림픽 통역을 함께 한 그들 중 3명은 나보다 먼저 교수가 되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대통령 비서실 공보 비서관으로 대통령 통역도 5년 넘게 했다. 처음으로 외교관이 아닌 통역사의 대통령 통역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가웠지만 이를 악물고 통역했다. 지금도 제자들에게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져 끝까지 최선을 다해 통역하라”고 가르친다. 의심쩍으면 더 큰 소리로 통역하라”고도 한다. 제자들은 졸업 후 실제 통역을 체험해보고서야 그 말의 뜻을 깨닫는다고 한다. 1995년부터는 24시간 TV 뉴스채널의 국제부장으로 15년 후배 8명을 채용해 ‘위성통역실’을 만들어 TV 뉴스 통역을 했다. 1997년 9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다이애나 비 장례식은 3시간 넘게 혼자 통역을 하기도 했다. 이제 그 프로그램은 없어졌지만 위성통역실을 거쳐간 후배들은 아직도 TV 뉴스통역의 달인으로 활약 중이다. 1999년 모교의 교수로 와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니 그제서야 원문을 보지 않고도 내 오역을 잡아내던 그 경호실 선배의 비결을 나도 알만 했다. 제자들보다 내가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공부를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많이 아는 놈이 이긴다”고 선문답을 한다. 모국어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으로 지금도 제자들에게 “외국어는 모국어만큼만 잘할 수 있다. 안되면 학교에서 못 배운 한자를 배워서라도 모국어부터 다듬어라”고 강조한다. 올림픽 경험 덕분에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에서는 약 20명의 제자들과 함께 월드컵을 통역했다. 매일 오전 국제축구연맹(FIFA)의 기자회견 통역을 끝내고 전국의 경기장을 찾아 각 경기장에 배치된 제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할 때는 정말 행복했다. 연구년 중이었던 작년 11월에는 중국 광저우로 날아가 후배들과 보름 동안 아시안 게임을 통역할 때도 행복했다. 제자에게 통역은 말 장난이 아니라 의미의 전달이므로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니 우선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모든 것은 기초가 중요하니 말이든 지식이든 기초 실력을 기르라고 가르친다.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영어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통역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최근에는 영어의 지위마저 흔들리게 돼 통역이란 개념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자동 통역기의 발달을 우려하는 제자들에게 “우리 생전에는 기계가 완벽한 통역을 할 수 없을 테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2009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의료 관광객 유치를 위한 의료통역사 양성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해와 작년까지 100명이 넘는 지원자들에게 통역을 가르쳤다. 지난 30년 통역대학원에서 가르친 것이 ‘회의’ 통역이었다면 이제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생활’ 통역이 등장한 것이다. 간호사 중심으로 선발된 수강생들에게도 의료용어도 중요하지만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외국어 기초 실력이 우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제 외국인 피의자를 위한 법정통역사 양성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학교에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해 2년 꼬박 공부에 매달리지만 두각을 드러내는 제자는 많지 않다. 교편을 잡은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통역사는 타고나는 것인가 자문하고 있다. 그것은 어릴 때 외국생활을 많이 해 다른 학생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재빨리 간파하고,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름을 눈치 채 1-2초 만에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다른 말로 옮기는 것을 들으면 ‘타고 났구나’하고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 TV 토론에서 상대방의 공격성 발언에 대해 “그런 말씀을 하시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을 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라는 우리말 속담을 인용하는 통역은 타고난 것이다. 그런 통역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더 듣고 싶어진다. 1년에 한두 명이라도 “아, 통역사로 타고 났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제자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특히 여성이 더 우수한 자질을 보이는 통역에서 남학생이 그런 자질을 보일 때는 더 반갑다. 면접 시험을 볼 때 그렇고, 국제회의에 배치한 졸업생들이 무대공포감을 떨치고 야무진 통역을 할 때 가슴이 뭉클해 진다. 인터넷 시대에 통역에 가장 중요한 모국어보다 영어 교육이 우선시되면서 한자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런 인재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던 제자들이 몇 번의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한 후 국제회의장에서, 여러 직장에서 어엿한 전문 통역사로 사회에 기여하는 일꾼이 되는 모습을 보며 “통역사로 태어나지 못했어도 모자라게 타고 난 재능을 교육과 훈련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자위하며 다시 제자들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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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취재 인사이드] 대통령 訪美연설문 마지막 한 장 사라져 관계자들 사색됐는데…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이 전하는 '대통령 연설문의 세계'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입력 2013.06.20.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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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the West Wing)’은 백악관 대통령 집무동(棟)인 웨스트윙의 일상(日常)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 속의 백악관 참모들 가운데 항상 펜과 종이를 손에 들고 때로는 혼자 중얼거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연설문 담당인 공보수석입니다. 대통령의 모든 연설 원고를 책임진 그는 딱맞는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합니다.

그는 사전에 대통령 및 참모들과 브레인 스토밍을 갖고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한 다음 원고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전달합니다.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그는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해 멋진 원고를 씁니다. 다른 참모들이 공보 수석에게 달려와 “오늘 연설 좋았다, 잘 썼다”고 얘기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첫 지명될 당시 유명한 ‘담대한 희망’ 연설문을 썼던 존 파브로는 오바마 대통령을 따라 백악관에 입성해 2008년 사상 최연소(만 23세) 백악관 참모가 됐습니다. 파브로는 대통령 최측근에서 5년 넘게 일하다가 올해 초 백악관을 떠나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연설문 담당자들은 어떨까요. 저는 얼마 전 고(故)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1급)을 만나 조선일보에 기사화했습니다.( ☞ 기사바로가기)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
강원국 전 청와대 비서관
1990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강씨는 대우그룹에서 김우중 회장의 연설문 담당자로 일하다가 그룹이 해체된 2000년 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연설문 담당 행정관(4급)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5년)을 포함해 8년간 대통령 연설문 담당으로 일한 ‘대통령 연설문 전문가’입니다.

2008년 효성그룹 회장실 상무로 일하다가 벤처기업 임원을 거쳐 최근 한 출판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그가 체험한 대통령들의 연설문 준비 스타일은 어땠을까요?


'선생님'처럼 세밀하게 수정지시한 김대중, 현장 애드립 좋아한 노무현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연설문 담당자들은 원고를 쓸 때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김 전대통령이 ‘선생님’처럼 원고에 수정사항을 빽빽하게 메모해 비서들에게 돌려보냈기 때문이랍니다.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고 그 옆에 ‘일본식 표현이니 앞으로는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채점하듯 써서 원고를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원고에 하얀 여백이 거의 안 남아 있을 정도로 빽빽하게 수정된 원고가 돌아오기도 했답니다. 수정할 내용이 많아서 더 쓸 공간이 없으면 아예 녹음을 해서 카세트 테이프를 연설문 담당 비서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연설문 담당 비서들은 그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대로 원고를 작성해 연설문을 썼다고 합니다. 강 전 비서관은 “고생해서 원고 초안을 보냈는데 테이프가 돌아오면 허탈하기도 하고 대통령의 바쁜 시간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밤 10시에 회의를 열어서 연설문을 다시 쓰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날은 꼬박 밤샘을 해야 하지요. 대통령이 직접 밤을 새며 연설문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오전 10시에 행사가 있는 날이었는데, 바로 12시간 전인 전날 밤 10시에 관저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연설문이 완전히 바뀔 판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이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날 온 사무실은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스탭들이 분야별로 나눠 연설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있을 때 새벽 3시쯤 전화가 왔답니다. 노 전 대통령이었죠. “잘 되어가고 있나요?”, “지금부터 내가 할테니까 다들 눈 좀 붙이세요. 지금까지 쓴 것을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즉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새벽 연설 담당 참모들이 잠시 눈을 붙일까말까 쉬고 있는데, 새벽 5~6시쯤 다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내가 좀 써서 다시 보냈어요. 그런데 아직 마무리를 못했어요. 뒤를 좀 부탁합니다.” 강 전 비서관이 메일함을 열어보니 연설문 원고가 마무리가 됐고 뒷부분 인사말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장 ‘애드립’으로 참모들을 애먹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해인가 3·1절 연설에서 노 전 대통령이 일본을 비판했는데, 이는 원래 연설문 원고와 달랐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년 동안 3·1절 연설에서 한일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노 전 대통령는 연설문에 없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이름까지 거론했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오래된 외교 관례를 깬 것이었지요. 이 일로 강 전 비서관은 민정비서관실의 조사를 받고 경위서까지 냈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중에 대한 예의”라며, 항상 미리 준비한 원고대로만 연설한 반면, 노 전 대통령은 현장 분위기가 좋을 때나 앞서했던 발언자의 연설 내용과 자신이 준비한 말이 겹칠 때, 즉석에서 생각난 아이템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즉석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표현이나 문장을 두번 쓰는 것을 유독 싫어해 기업도시나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할 때마다 다른 원고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전국 대도시마다 축구경기장을 완공할 때, 기념 연설을 했는데, 도시가 바뀌어도 원고 주요 내용은 똑같았다고 합니다.


세부 표현보다 큰 틀 중시한 김영삼, 원고를 통째로 거의 외운 노태우


강 전 비서관은 역대 청와대 연설문 담당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다른 대통령들에 얽힌 얘기도 들려줬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연설문 원고를 거의 고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참모들을 그만큼 신임해 비서들이 갖고온 연설 원고를 혼자 3번 정도 소리내 읽어본 뒤 “좋다”고 얘기하면 대부분 끝났다고 합니다.

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대통령이 연설문을 고치고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중요 국사(國事)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이란 판단에서입니다. 특히 밤을 새가며 연설문을 직접 쓰다가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 일이겠지요. 김 전 대통령의 경우, 독특한 억양과 발음 때문에 연설문을 쓸 때 절대 써서는 안되는 금기어(禁忌語)가 있었다고 합니다. ‘관광’ 같은 단어가 포함됐는데요, 당시 연설문 담당자들은 금기어들을 크게 써서 사무실 벽에 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답니다. 언제인가 미국 방문 중에 비서들이 실수로 연설문 원고에서 마지막 한 장을 빼놓고 인쇄해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을 대통령이 연단에 오른 뒤에 알았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모두 사색이 돼 떨고 있을 때, 노태우 전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연설을 마쳤다고 합니다. 미리 전달한 원고를 다 외웠기 때문에 인쇄된 원고의 마지막 장이 빠져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제서야 참모들도 노 대통령이 연설문을 다 외우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통령 연설문에 대해 2%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든가,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보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식의 명문장을 남긴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의 연설문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개 언사(言辭)’을 중시하는 미국 정치문화와 대부분의 중대사는 막후(幕後)에서 이뤄지는 한국 정치 문화와의 큰 간극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저는 국어 교과서에도 대통령의 연설문이 통째로 실리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