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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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9-12-04 19:43 조회4,1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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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행 필유사(三人行 必有師: 세 사람만 모이면 그 중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지난 11월 26일 한겨레말글연구소 제5차 학술발표회 ‘유엔ㆍ국제기구 공용어 어떻게 늘릴까’라는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한 발표자의 토론자로 나갔지만 현장에 가서야 주제의 의미가 ‘어떻게 하면 한국어를 유엔 공용어로 만들 것인가’라는 것임을 알았다. 필자는 외국어를 전공한 탓인지 그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분들이 있음도 처음으로 알았고 그들로부터 많이 배웠던 것이다.
그날 토론에서 모임의 취지에 맞게 필자가 즉석에서 급조해 내린 결론은 “한국어를 유엔 공용어로 만들려면 우선 우리가 우리 말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장의 반응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필자에게는 다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와 불어를 하면서 통역을 가르치고 있는 자가 웬 모국어 타령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필자는 외국어를 하면 할수록 모국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필자도 모국어를 바탕으로 외국어를 배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거울로 모국어만큼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더 낫다면 이미 그 외국어가 모국어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은 모국어가 없는 불쌍한 사람(alingual)이다.
필자는 매년 봄 대학원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모국어 수준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분명 우리나라의 어문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기유학'으로 대변되는 영어 중시 풍조가 우리 자식들의 말과 사고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이를 직시하고 바로 잡으려는 어른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닌가?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선생들도 맞춤법에 맞지 않는 우리 말을 쓰면서 자각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유력 일간지와 TV 뉴스에서 조차 젊은 기자들이 쓰는 잘못된 우리 말이 안타깝다.
우리 대학원이 30년 전부터 배출해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통역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말을 잘 못한다고 비판한다. 우리의 말하기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논리가 분명치 않은 연설을 하는 우리나라 연사를 만나면 외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통역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도대체 저 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를 유추하다 보면 통역이 더 어려워지고 느려진다. 통역사들은 그런 연사를 만날까 무섭다. 외국인 청중이 “연사와 통역사 중 하나는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릴까 두려워진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말이 갑자기 유엔 공용어가 되면 어떻게 될까? 유엔 회의 참석자들이 “한국어 연설은 잘 이해할 수 없다. 연설이 잘못된 것이냐, 통역이 잘못된 것이냐?”라고 따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 말을 국제기구의 공용어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 말을 더 사랑하며 우리 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어린 세대에게 우리 말의 일부가 된 한자를 다시 가르쳐서라도 우리 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제무대에 나가 논리적인 연설을 할 수 있는 어문 교육이 본 궤도에 올라야 우리 말이 떳떳한 유엔 공용어가 되어 빛나게 통역될 것이다.
필자는 약 50년 전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이나마 한자를 배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만큼이라도 우리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할 때가 많다. (끝)
곽중철 (2009-12-18 09:32:53)
[노재현의 시시각각] ‘가면의 언어’와 ‘배설의 언어’
[중앙일보] 기사 2009.12.17 18:45 입력 / 2009.12.18 01:49 수정
TV 화면에 가끔 소개되는 옛날 한국 영화를 보노라면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말씨부터가 그렇다.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 ‘자유부인’이 그렇고, 신상옥 감독의 61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동시녹음 아닌 더빙에 의존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현실감이 뚝 떨어진다. 식당에서 마주치는 중국 동포 여성의 말씨, 몇 년 전 북한을 방문했을 때 겪은 그쪽 사람들의 말씨와 비슷하다. 당연하다. 반세기 전과 지금의 한국사회는 말씨가 확실히 달라졌다. 언어도 생물(生物) 아닌가. 같은 영화라도 78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윤정희·최무룡이 출연했던 81년 작 ‘자유부인’은 그나마 위화감이 덜한 이유다.
어중간하게 낀 세대인 나는 요즘의 말씨에도 이질감을 느낀다. 대표적인 게 TV에 출연한 ‘걸그룹’들의 말투다. 밝고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발음이 하나같이 코맹맹이 또는 혀짤배기 소리다. 구강(口腔) 구조의 극히 일부만 사용해 발음하니 그렇게 된다. 지금은 그런 말투가 귀엽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걸그룹의 발음을 탓하자는 건 아니다. 어차피 언어는 생물이니까. 게다가 시간은 내가 아닌 젊은 그들 편이니까.
* 정작 탓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존대어를 남발하는 풍토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가게 점원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시’를 입에서 떼질 못한다. “이 구두는 볼이 넓으셔서 발이 편하시고요, 이건 뒷굽이 높으셔서 키가 커보이세요.” 발이 편하시고 키가 커보이시는(나는 토종 루저급이다) 것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치더라도, ‘구둣볼이 넓으시고 뒷굽이 높으신’ 건 아무래도 잘못된 어법이다. 게다가 툭 하면 손님에게 “아버님” 아니면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무슨 숨겨둔 자식도 아니니 뜨악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지만, 물건 하나 팔자고 정성 들여 극존칭·과잉존칭을 동원하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엔 같이 웃어줄 도리밖에 없다. 백화점만 그럴까. TV 홈쇼핑들도 예의 “아버님, 어머님”을 남발한다.*
손님은 왕이고, 존칭을 왕창 인플레 하더라도 깎아내리는 것보다는 나으니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치자. 따지고 보면 옛날에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습니다…”라고 했다던, 잘못된 존대어법을 경계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시쳇말로 ‘깨는’ 것은, 그렇게 극존칭을 쓰던 여종업원들이 매장 뒤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할 때다. “쪽 팔려서 혼났어 얘” “그 X, 졸라 밥맛 아니니”….
무대를 매장 뒤에서 인터넷 공간으로 옮기면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검색어를 통한 임의삭제를 교묘히 피해 질펀하게 펼치는 욕설과 악담, 비속한 표현들은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대로 “인생 어두~워! 대한민국 어두~워!”를 실감하게 만든다. 비록 잘못된 존대어법을 구사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깍듯했던 젊은이들이 왜 순식간에 저주에 가까운 말본새를 일삼게 되었을까. 경희대 최혜실(국문학) 교수는 이를 ‘가면의 언어’와 ‘배설의 언어’로 대비시켜 설명한다. 일상공간에서 상대와 대면했을 때는 극존칭을 남발하는 ‘가면’을 쓰고, 익명의 사이버 공간에서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배설’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간지대의 말투, 담담하고 담백하게 의사를 소통하는 말투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최 교수는 우려한다. 언어의 양극화이자 존칭·비칭 세력의 중간지대 잠식 현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일상언어에서만의 현상이냐는 점이다. ‘100분 토론’이 ‘100분 주장’ 내지 ‘100분 우기기’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기도 한데, 소통에 실패한 사회가 언어의 소통 기능마저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말이라 큰 음식점에 가면 건물 층층이 학연·지연별로 예약된 모임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가끔은 예약한 방과 모임 이름을 몽땅 뒤섞어 바꿔 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곽중철 (2010-02-07 09:40:02)
[편집자에게] 영어교육만큼 중요한 漢字교육
박홍민·서울 면목고 2학년
입력 : 2010.02.04 22:18 / 수정 : 2010.02.04 23:08
2월 3일자 A10면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반민족·반역사적 행위'라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한자는 중국 한족(漢族)의 글자이고 중국의 문화·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사람들의 뛰어난 지혜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을 사대모화(事大慕華·큰 나라를 섬기고 중국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체 게바라 평전(評傳)까지 서양의 문화와 지혜를 익히게 하는 현실상황에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이는 서구 사대주의로 비치지 않는 것인가. 과거 중국 사대주의는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일상생활에서나 학교 수업 중에서나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실제로 절감하고 있다. 특히 책을 읽을 때, 항상 사전을 옆에 둔다. 왜냐하면 우리말 어휘의 비율을 따지자면 한자어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번역본·전문서적 등을 볼 때에 한자어로 된 세분화된 단어나 전문적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자어는 순우리말인 고유어(固有語)에 비해 좀 더 정확하고 분화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배웠다. 따라서 한자를 배우지 않고 단지 음성(音聲)적으로만 한자어를 익힌다는 것은 다의어(多義語)인 고유어를 보완하는 한자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한자를 배우는 것은 어휘력이 향상되게끔 도와준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고(思考)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언어의 발달은 사고력과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고, 언어의 재료인 어휘력의 향상은 언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동아시아권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를 아는 것은 이제는 영어를 배우는 것만큼 세계화를 위한 필수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 시대에 한중일(韓中日)이 주축이 된 동아시아가 하나로 뭉쳐 유럽의 EU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한자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오랜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이 한자어를 쓰고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함께 세계화된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면 한자교육은 강화돼야 한다고 본다.
부디 학부모의 89%가 찬성이라는 초등학교 한자교육 도입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어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곽중철 (2010-04-09 15:18:02)
[편집자에게] 漢字 많이 쓴 신문은 '어휘력 교과서'
전홍섭 서울 일신여중 교장 (펌)
4월 7일자 A1면 '한자(漢字) 가르쳤더니 국어실력 늘더라'를 읽었다. 한 연구팀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자를 가르쳤더니 우리말 어휘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고 국어 어휘의 태반(太半)이 한자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방법이 국어학습에 효과적이고 특히 어휘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필자는 '생활 속의 한자 학습'을 권장하고 싶다. 그 실제적인 방법으로 각 신문에서 한자어 표기를 한자로 많이 해 주었으면 한다. 작금(昨今) 서해상의 천안함 사태에 온 국민의 안타까운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 보도문을 보면 '함수' '함미' '기뢰' '어뢰' 라는 말들이 무수히 쓰인다. 이런 말들은 함수←艦首, 함미←艦尾, 기뢰←機雷, 어뢰←魚雷라는 말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자를 안다면 '함수'는 '군함의 앞머리 부분'을 가리키고, '함미'는 '군함의 뒤 끝부분'을 말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보통 청소년들은 한자를 싫어하고 현대의 문자생활에서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양 문화권에서 살고 있고 또 국어의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말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늘 가까이서 보고 접하지 않으면 가물가물하는 것이 문자이다. 요즘 신문을 보면 제호(題號) 정도나 한자로 되어 있지 1면부터 한자 표기가 거의 안 보인다. 최근 주요 신문사에서 NIE(신문활용교육)라고 해서 신문을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데, 신문에 한자를 많이 쓴다면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한자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지는 사고(思考)의 범위는 그 사람의 어휘력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라고 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한자 학습을 통하여 어휘력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논술, 토론 학습은 물론 앞으로 학교시험에서 50% 이상 출제되는 서술형 평가를 위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곽중철 (2010-11-09 10:21:05)
[태평로] '독고노인'과 한자 교육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10.11.08 23:00
▲ 김태익 논설위원
우리 사회는 이제 학교 교육에서 한자(漢字)를 얼마나 더 방치할 것이냐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을 요 근래 접한 것만 꼽아봐도 이렇다.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 아들이 국회 4급 비서관에 채용돼 특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그 의원 측은 "아들은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재원"이기 때문에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재원(才媛)'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재주 있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다.
중앙박물관서 열리고 있는 고려 불화(佛畵) 전시회에 대한 신문 칼럼에 어느 네티즌이 "오호, 통제라!" 하는 댓글을 남겼다. 이 아름다운 그림들이 90% 이상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실이 원통하다는 얘기다. "오호, 통재(痛哉)라"를 잘못 쓴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두드려 봤더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오호, 통제라'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엔 정당의 정책위의장이란 분도 있었다.
수도권에 있는 어느 이발소 간판 옆에는 '독고노인 무료'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은 돈 안 받고 이발해 드리겠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예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독거노인(獨居老人)'이라고 제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동안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젊은 세대가 부모 이름, 나라 이름도 한자로 못 쓴다든가 기초적인 한자도 읽지 못한다고 걱정해 왔다. 언론에서 한자를 잘 안 쓰니까 뜻이 금방 이해되지 않는다는 불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 불만이 사치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한글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국민의 한자 지식이 얕아지면서 우리 말 중 70%를 차지하는 한자 어휘의 연원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잦아졌다. 그 결과 그 단어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때나 사용하는가 하면,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 모르고 들리는 대로 적다 보니 잘못 적기 일쑤다. 한자를 몰라 불편한 차원을 넘어 한자를 모름으로써 우리 언어생활의 약속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관한 안중근기념관의 팸플릿에 기념관 앞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최말린 작 2010'이란 설명이 붙었다. 우리나라에 최말린이라는 조각가는 없다. 알고 봤더니 서울대 명예교수인 조각가 최만린(崔滿麟)씨 이름 한자를 모르는 누군가가 들은 대로 쓰다 보니 이런 결례를 한 것이다.
40년 전의 한글전용 정책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문자생활을 넓혔다. 문제는 한글전용을 하려면 한자교육을 폐지해야 한다는 착각이었다. 그 결과 공교육에서 한자교육은 설 자리를 잃었고 우리 사회는 언어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한자에 대한 문맹(文盲)을 수십년 양산해 왔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는 초등학교 4학년 3명 중 2명은 책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자에 약한 부모 밑에서 자라고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연초 교육과정평가원이 학부모 89.1% 교사 77.3%가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찬성한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교육부는 요지부동이다.
뜻도 모르고 잘못 쓴 한글은 오히려 한글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한글을 포함한 우리 말의 발전과 풍요로운 언어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의 전환이 이뤄질 때가 됐다.
그날 토론에서 모임의 취지에 맞게 필자가 즉석에서 급조해 내린 결론은 “한국어를 유엔 공용어로 만들려면 우선 우리가 우리 말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장의 반응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필자에게는 다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어와 불어를 하면서 통역을 가르치고 있는 자가 웬 모국어 타령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필자는 외국어를 하면 할수록 모국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필자도 모국어를 바탕으로 외국어를 배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는 모국어의 거울로 모국어만큼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더 낫다면 이미 그 외국어가 모국어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은 모국어가 없는 불쌍한 사람(alingual)이다.
필자는 매년 봄 대학원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의 모국어 수준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분명 우리나라의 어문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기유학'으로 대변되는 영어 중시 풍조가 우리 자식들의 말과 사고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는데 이를 직시하고 바로 잡으려는 어른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건 아닌가?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선생들도 맞춤법에 맞지 않는 우리 말을 쓰면서 자각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유력 일간지와 TV 뉴스에서 조차 젊은 기자들이 쓰는 잘못된 우리 말이 안타깝다.
우리 대학원이 30년 전부터 배출해 시장에서 일하고 있는 통역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말을 잘 못한다고 비판한다. 우리의 말하기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논리가 분명치 않은 연설을 하는 우리나라 연사를 만나면 외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통역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도대체 저 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를 유추하다 보면 통역이 더 어려워지고 느려진다. 통역사들은 그런 연사를 만날까 무섭다. 외국인 청중이 “연사와 통역사 중 하나는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릴까 두려워진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말이 갑자기 유엔 공용어가 되면 어떻게 될까? 유엔 회의 참석자들이 “한국어 연설은 잘 이해할 수 없다. 연설이 잘못된 것이냐, 통역이 잘못된 것이냐?”라고 따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 말을 국제기구의 공용어로 만들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 말을 더 사랑하며 우리 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어린 세대에게 우리 말의 일부가 된 한자를 다시 가르쳐서라도 우리 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제무대에 나가 논리적인 연설을 할 수 있는 어문 교육이 본 궤도에 올라야 우리 말이 떳떳한 유엔 공용어가 되어 빛나게 통역될 것이다.
필자는 약 50년 전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이나마 한자를 배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만큼이라도 우리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할 때가 많다. (끝)
곽중철 (2009-12-18 09:32:53)
[노재현의 시시각각] ‘가면의 언어’와 ‘배설의 언어’
[중앙일보] 기사 2009.12.17 18:45 입력 / 2009.12.18 01:49 수정
TV 화면에 가끔 소개되는 옛날 한국 영화를 보노라면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말씨부터가 그렇다.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 ‘자유부인’이 그렇고, 신상옥 감독의 61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동시녹음 아닌 더빙에 의존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현실감이 뚝 떨어진다. 식당에서 마주치는 중국 동포 여성의 말씨, 몇 년 전 북한을 방문했을 때 겪은 그쪽 사람들의 말씨와 비슷하다. 당연하다. 반세기 전과 지금의 한국사회는 말씨가 확실히 달라졌다. 언어도 생물(生物) 아닌가. 같은 영화라도 78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나 윤정희·최무룡이 출연했던 81년 작 ‘자유부인’은 그나마 위화감이 덜한 이유다.
어중간하게 낀 세대인 나는 요즘의 말씨에도 이질감을 느낀다. 대표적인 게 TV에 출연한 ‘걸그룹’들의 말투다. 밝고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발음이 하나같이 코맹맹이 또는 혀짤배기 소리다. 구강(口腔) 구조의 극히 일부만 사용해 발음하니 그렇게 된다. 지금은 그런 말투가 귀엽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걸그룹의 발음을 탓하자는 건 아니다. 어차피 언어는 생물이니까. 게다가 시간은 내가 아닌 젊은 그들 편이니까.
* 정작 탓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존대어를 남발하는 풍토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가게 점원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시’를 입에서 떼질 못한다. “이 구두는 볼이 넓으셔서 발이 편하시고요, 이건 뒷굽이 높으셔서 키가 커보이세요.” 발이 편하시고 키가 커보이시는(나는 토종 루저급이다) 것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치더라도, ‘구둣볼이 넓으시고 뒷굽이 높으신’ 건 아무래도 잘못된 어법이다. 게다가 툭 하면 손님에게 “아버님” 아니면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무슨 숨겨둔 자식도 아니니 뜨악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지만, 물건 하나 팔자고 정성 들여 극존칭·과잉존칭을 동원하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엔 같이 웃어줄 도리밖에 없다. 백화점만 그럴까. TV 홈쇼핑들도 예의 “아버님, 어머님”을 남발한다.*
손님은 왕이고, 존칭을 왕창 인플레 하더라도 깎아내리는 것보다는 나으니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치자. 따지고 보면 옛날에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이 붙으셨습니다…”라고 했다던, 잘못된 존대어법을 경계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시쳇말로 ‘깨는’ 것은, 그렇게 극존칭을 쓰던 여종업원들이 매장 뒤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할 때다. “쪽 팔려서 혼났어 얘” “그 X, 졸라 밥맛 아니니”….
무대를 매장 뒤에서 인터넷 공간으로 옮기면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검색어를 통한 임의삭제를 교묘히 피해 질펀하게 펼치는 욕설과 악담, 비속한 표현들은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대로 “인생 어두~워! 대한민국 어두~워!”를 실감하게 만든다. 비록 잘못된 존대어법을 구사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깍듯했던 젊은이들이 왜 순식간에 저주에 가까운 말본새를 일삼게 되었을까. 경희대 최혜실(국문학) 교수는 이를 ‘가면의 언어’와 ‘배설의 언어’로 대비시켜 설명한다. 일상공간에서 상대와 대면했을 때는 극존칭을 남발하는 ‘가면’을 쓰고, 익명의 사이버 공간에서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배설’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간지대의 말투, 담담하고 담백하게 의사를 소통하는 말투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최 교수는 우려한다. 언어의 양극화이자 존칭·비칭 세력의 중간지대 잠식 현상이다.
문제는 이것이 일상언어에서만의 현상이냐는 점이다. ‘100분 토론’이 ‘100분 주장’ 내지 ‘100분 우기기’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기도 한데, 소통에 실패한 사회가 언어의 소통 기능마저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말이라 큰 음식점에 가면 건물 층층이 학연·지연별로 예약된 모임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가끔은 예약한 방과 모임 이름을 몽땅 뒤섞어 바꿔 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곽중철 (2010-02-07 09:40:02)
[편집자에게] 영어교육만큼 중요한 漢字교육
박홍민·서울 면목고 2학년
입력 : 2010.02.04 22:18 / 수정 : 2010.02.04 23:08
2월 3일자 A10면 '초등학교 한자교육은 반민족·반역사적 행위'라는 기사를 보았다. 물론, 한자는 중국 한족(漢族)의 글자이고 중국의 문화·역사를 비롯하여 과거 사람들의 뛰어난 지혜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을 사대모화(事大慕華·큰 나라를 섬기고 중국을 우러러 사모하는 것)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부터 체 게바라 평전(評傳)까지 서양의 문화와 지혜를 익히게 하는 현실상황에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이는 서구 사대주의로 비치지 않는 것인가. 과거 중국 사대주의는 우리 역사의 아픈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과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일상생활에서나 학교 수업 중에서나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실제로 절감하고 있다. 특히 책을 읽을 때, 항상 사전을 옆에 둔다. 왜냐하면 우리말 어휘의 비율을 따지자면 한자어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번역본·전문서적 등을 볼 때에 한자어로 된 세분화된 단어나 전문적인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자어는 순우리말인 고유어(固有語)에 비해 좀 더 정확하고 분화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배웠다. 따라서 한자를 배우지 않고 단지 음성(音聲)적으로만 한자어를 익힌다는 것은 다의어(多義語)인 고유어를 보완하는 한자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한자를 배우는 것은 어휘력이 향상되게끔 도와준다. 게다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사고(思考)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언어의 발달은 사고력과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고, 언어의 재료인 어휘력의 향상은 언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동아시아권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를 아는 것은 이제는 영어를 배우는 것만큼 세계화를 위한 필수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 시대에 한중일(韓中日)이 주축이 된 동아시아가 하나로 뭉쳐 유럽의 EU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한자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오랜 과거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이 한자어를 쓰고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함께 세계화된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면 한자교육은 강화돼야 한다고 본다.
부디 학부모의 89%가 찬성이라는 초등학교 한자교육 도입이 긍정적으로 검토되어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배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곽중철 (2010-04-09 15:18:02)
[편집자에게] 漢字 많이 쓴 신문은 '어휘력 교과서'
전홍섭 서울 일신여중 교장 (펌)
4월 7일자 A1면 '한자(漢字) 가르쳤더니 국어실력 늘더라'를 읽었다. 한 연구팀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자를 가르쳤더니 우리말 어휘력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고 국어 어휘의 태반(太半)이 한자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방법이 국어학습에 효과적이고 특히 어휘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필자는 '생활 속의 한자 학습'을 권장하고 싶다. 그 실제적인 방법으로 각 신문에서 한자어 표기를 한자로 많이 해 주었으면 한다. 작금(昨今) 서해상의 천안함 사태에 온 국민의 안타까운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 보도문을 보면 '함수' '함미' '기뢰' '어뢰' 라는 말들이 무수히 쓰인다. 이런 말들은 함수←艦首, 함미←艦尾, 기뢰←機雷, 어뢰←魚雷라는 말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자를 안다면 '함수'는 '군함의 앞머리 부분'을 가리키고, '함미'는 '군함의 뒤 끝부분'을 말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보통 청소년들은 한자를 싫어하고 현대의 문자생활에서 필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양 문화권에서 살고 있고 또 국어의 현실을 고려할 때 우리말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늘 가까이서 보고 접하지 않으면 가물가물하는 것이 문자이다. 요즘 신문을 보면 제호(題號) 정도나 한자로 되어 있지 1면부터 한자 표기가 거의 안 보인다. 최근 주요 신문사에서 NIE(신문활용교육)라고 해서 신문을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데, 신문에 한자를 많이 쓴다면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한자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지는 사고(思考)의 범위는 그 사람의 어휘력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라고 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한자 학습을 통하여 어휘력과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논술, 토론 학습은 물론 앞으로 학교시험에서 50% 이상 출제되는 서술형 평가를 위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곽중철 (2010-11-09 10:21:05)
[태평로] '독고노인'과 한자 교육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10.11.08 23:00
▲ 김태익 논설위원
우리 사회는 이제 학교 교육에서 한자(漢字)를 얼마나 더 방치할 것이냐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을 요 근래 접한 것만 꼽아봐도 이렇다.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 아들이 국회 4급 비서관에 채용돼 특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그 의원 측은 "아들은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재원"이기 때문에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재원(才媛)'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재주 있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다.
중앙박물관서 열리고 있는 고려 불화(佛畵) 전시회에 대한 신문 칼럼에 어느 네티즌이 "오호, 통제라!" 하는 댓글을 남겼다. 이 아름다운 그림들이 90% 이상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실이 원통하다는 얘기다. "오호, 통재(痛哉)라"를 잘못 쓴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두드려 봤더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오호, 통제라'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엔 정당의 정책위의장이란 분도 있었다.
수도권에 있는 어느 이발소 간판 옆에는 '독고노인 무료'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은 돈 안 받고 이발해 드리겠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예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독거노인(獨居老人)'이라고 제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동안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젊은 세대가 부모 이름, 나라 이름도 한자로 못 쓴다든가 기초적인 한자도 읽지 못한다고 걱정해 왔다. 언론에서 한자를 잘 안 쓰니까 뜻이 금방 이해되지 않는다는 불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 불만이 사치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한글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국민의 한자 지식이 얕아지면서 우리 말 중 70%를 차지하는 한자 어휘의 연원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잦아졌다. 그 결과 그 단어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때나 사용하는가 하면,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 모르고 들리는 대로 적다 보니 잘못 적기 일쑤다. 한자를 몰라 불편한 차원을 넘어 한자를 모름으로써 우리 언어생활의 약속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관한 안중근기념관의 팸플릿에 기념관 앞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최말린 작 2010'이란 설명이 붙었다. 우리나라에 최말린이라는 조각가는 없다. 알고 봤더니 서울대 명예교수인 조각가 최만린(崔滿麟)씨 이름 한자를 모르는 누군가가 들은 대로 쓰다 보니 이런 결례를 한 것이다.
40년 전의 한글전용 정책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문자생활을 넓혔다. 문제는 한글전용을 하려면 한자교육을 폐지해야 한다는 착각이었다. 그 결과 공교육에서 한자교육은 설 자리를 잃었고 우리 사회는 언어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한자에 대한 문맹(文盲)을 수십년 양산해 왔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는 초등학교 4학년 3명 중 2명은 책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자에 약한 부모 밑에서 자라고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연초 교육과정평가원이 학부모 89.1% 교사 77.3%가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찬성한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교육부는 요지부동이다.
뜻도 모르고 잘못 쓴 한글은 오히려 한글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한글을 포함한 우리 말의 발전과 풍요로운 언어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의 전환이 이뤄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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