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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를 추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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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4-25 19:12 조회3,6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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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 별세한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과의 인연과 추억이 있는 한국인은 많겠지만 필자는 그를 가장 많이 통역한 한국인일 것이다. 1984년 5월 서울 올림픽 조직위에 스카웃된 후 1988년 10월 2일 대회 폐막 때까지 그의 통역을 맡았고,  폐막 후에도 서울을 찾은 그의 통역을 몇 번 했으니 햇수로는 약 5년인데 시간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그는 한국 관계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영어로 발언했는데 스페인어, 불어에 이어 그의 세번째쯤 되는 언어인 영어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3년 쯤 그의 영어를 통역하다 보니 그가 입만 열면 무슨 말을 할 지 알 수있는 정도가 되었고, 1986년 쯤인가 그의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눈치를 채고 통역을 시작했더니 특유의 미소를 띄며 "You are used to my English"라고 했다.

그의 영어는 원어민처럼 유창하지는 못했지만 군더더기 없이 짧게 핵심을 찌르는 문장을 썼다. 예를 들어 고 박종규(피스톨 박) 전 IOC 위원 후임 한국인 위원 선임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김운용 씨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 뜻을 전하는 노태우 조직위원장에게 단호한 어조로 "If it is not Mr.Kim, there is no IOC member in Korea"라는 말을 반복해 기어이 김운용 씨를 IOC 위원으로 만들었다.   

대회 전 스위스 로잔 IOC 본부에서 IOC 주재 남북 체육회담이 4차례나 열렸는데 필자는 4차례를 모두 동시통역했다. 남북 간에 이견이 깊어지거나 감정의 골이 깊어질라치면 가차없이 휴회를 선언하던 그의 카리스마가 기억난다.

93년 권좌를 물러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서울의 신라호텔, 자신의 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에서 접견(?)한 그는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며 피로한 기색을 보였고, 그것이 내가 그를 통역한 마지막이었는데 그로부터 17년이나 더 산 것이다. "젊은이들의 스포츠를 통한 인류화합과 세계평화"라는 명분 하에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각종 대회의 화려한 개/ 폐회식을 만끽했던 그의 사주팔자는 분명 불세출이었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위원장을 역임하고, 그 후에도 후임 위원장 뒤에서 섭정을 하면서 적지않은 영향력을 과시했지만 그도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과 인맥을 이어받은 그의 아들이 스페인 IOC 위원을 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눈을 감았으리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 전날 별세한 우아한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10년 만에 만나 이승의 추억을 나누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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