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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의전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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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2-27 16:04 조회3,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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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9월 전직 외교관 양세훈 대사가 출간한  <장춘에서 오슬로까지(기파랑)>라는 회고록을 발췌해 이 홈피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2006년 전기 졸업식이 있었던 오늘 아침에는 제가 청와대를 드나들며 통역할 때 의전 수석비서관으로 계셨던 노창희 대사가 출간하신 회고록 <어느 외교관의 이야기>가 제 메일 박스에 도착해 있었고, 속 표지에는 황공스럽게도  "친애하는 곽중철 원장님, 2007.2.25 노창희 올림"이라는 그의 친필 한자도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글씨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단정했습니다.

 <설마...>하고 책장을 넘기던 중 제 이름이 나오는 부분을 읽으며 저는 다시 추억에 잠겼습니다.
우선 그 부분을 발췌합니다. 저작권 위반이 아니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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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 수석비서관

 나는 그날을 시작으로 꼭 2년 10개월 동안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으로 바쁜 생활을 했다. ‘의전수석’이란 직책은 대통령 측근에서 그 일정을 관리하고 업무수행을 보좌하는 것이다. 다른 수석비서관들이 모두 특정 업무에 대한 정책보좌 역할인 데 비해서 의전은 순수 비서기능으로 항상 대통령 곁에서 함께 움직여야 했고 그 사무실도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두고 있었다.
나는 더욱이 종전 청와대 관례에 따라 대통령이 외국인을 만날 때 그 통역도 겸했다. 리셉션, 만찬회 등 공개 장소에서의 통역은 수석비서관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당에서부터 통역을 해온 곽중철郭重哲 씨가 수시 대신하기도 했고 영어 이외의 언어로 통역할 때에는 외부, 주로 외무부로부터 통역을 차출해서 쓰기도 했지만 외국 요인들과의 면담이나 정상회담 등 주요 회의에서의 통역은 대체로 내 차지가 되었다.
의전수석이 통역을 겸하는 것은 대통령 의중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나 기밀 보안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지켜온 관행이었다. 그러나 내가 의전수석을 끝마친 뒤에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서 전문 통역비서관을 따로 두기 시작했는데 요즈음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자격을 갖춘 인재들이 많아서 이전보다 훌륭한 통역을 하고 있다.
의전비서실에는 세 명의 비서관이 각기 네, 다섯 명의 행정관과 직원들을 데리고 일했다. 대통령의 일정관리, 결재 및 보고서류 처리와 청와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대통령 관련 행사를 담당하는 의전1은 이병기 비서관이 맡아서 능숙하고 원만하게 잘 처리했고 청와대 밖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를 준비, 진행하는 의전2 비서관은 주로 총무처에서 파견되어 왔는데 손정孫政, 문동후文東厚 국장이 차례로 나와 함께 일했고 외교 문서와 대통령 친서 등을 담당하는 의전3 비서관은 최성홍, 권영민權寧民 등 영어 문장력이 뛰어난 외무부 국장급 중에서 발탁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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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셉션, 만찬회 등 공개 장소에서의 통역은 수석비서관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당에서부터 통역을 해온 곽중철郭重哲 씨가 수시 대신하기도 했고... 외국 요인들과의 면담이나 정상회담 등 주요 회의에서의 통역은 대체로 내 차지가 되었다"라고 하셨다. 우선 40년 외교관의 그 소중한 회고록에 제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언급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나는 노태우 씨를 당(관훈동 당사 시절의 민정당)에서부터 통역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1984년 5월부터 통역하다가 1986년 민정당 최고위원으로 간 후에도 한 달에 한 번 쯤 관훈동으로 불려가 통역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독일어 억양의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었다.

노태우 씨는 1987년 6.29 선언 직후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 조직위를 찾아 대회준비에 관심을 보였고, 마침 방한 중이었던 구면의 시페르코 IOC 부위원장(루마니아 인)을 박세직 당시 조직 위원장실에서 만나는 것을 내가 통역했다. 나 뿐만 아니라 배석한 모든 조직위 직원들도 민주화 선언을 하고 나타난 전 위원장을 상기된 얼굴로 환영했다. 나도 그가 자랑스러웠다.

그 해 12월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고, 1988년 2월 말 취임하면서 노 대통령은 "곽 군이 올림픽의 언어서비스를 총괄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 당장 청와대로 옮기지 말고 올림픽을 끝낸 후 발령을 내도록 하고, 그 동안은 수시로 불러 통역을 시켜라"고 지시했다. 88년 9월 올림픽이 끝나고 청와대의 눈치를 보니 4급 과장급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직위에서 4급 과장으로 5년을 근무했으니 3급 비서관 자리를 달라"고 버텼다. 그래서 구한 직장이 공산권과의 경협을 위해 만들어진 민간경제협의회(IPECK)였다. 무역회관(당시 KOEX) 27층인가에 있었던 아이펙에서 홍보실장, 동구부장을 맡아 일하면서도 노창희 수석이 맡기 힘든 대통령 통역이나 영부인 통역을 위해 한 달에 몇번씩 청와대로 불려갔다. 불어 손님이 올 때도 불려갔다. 나는 노 대통령의 외유 14번 중 일본과 샌프랜시스코 방문(고르바쵸프 만남)을 제외한 12번을 대통령 특별기를 타고 수행했고, 나는 외무부 의전과 청와대 경호실에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통령 경호원들은 가슴에 단 비표를 보고 출입과 접근을 통제하는데 나는 일찌감치 <얼굴이 비표>인 요인이었다.

88년 12월 말 그 해 마지막 통역을 위해 청와대로 갔을 때 바로 노창희 의전수석이 후에 YS가 헐어버린 구 본관에서 대통령의 촌지 봉투를 건네면서 "새해부터 청와대에 와서 날 좀 도와주지"라고 했고, 예정 직급에 불만이었던 나는 당돌하게도 "바깥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니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깨끗한 외교관의 매너였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궁궐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지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청와대 입구 효자동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고, 의전용 블랙타이로 갈아입고 청와대 영빈관의 만찬장으로 가 대통령 곁에 자리하면 대통령은 가끔 <자네 요새 어디에 있다고 했지?>하면서도 국사에 쫒겨 날 챙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90년 10월인가 통역이 끝난 후 갑자기 생각난 듯 노재봉 비서실장을 불러 <저 친구 청와대로 발령 내>라고 지시했다. 다음 달 나는 꿈에 그리던 최연소 3급 공보 비서관이 되어 청와대로 출근했고, 며칠 후 대통령 집무실에서 발령장을 받고 둘이서 기념촬영을 했다. 비서관이란 군대로 치면 장교와 같은 것으로 4급 행정관과는 엄연히 구분이 되었지만 YS 청와대부터는 민주세력이 비서관 자리를 하향시켜 마구 발령을 내는 것을 보고 씁쓸했다.

노창희 수석은 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젊은 객기를 부리던 시절에 만난 <깔끔한 신사>였다. 내가 청와대로 들어간 후 한 달만에 그는 유엔대사로 나갔고, 지금까지는 그를 보지 못하고 언론보도를 통해서만 근황을 알다가 오늘 그의 회고록을 받은 것이다. 그가 단란한 가족과 함께 평안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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