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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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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9-21 00:00 조회2,6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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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장군의 질책으로부터 나를 구해낸 강 처장을
 같은 건물(당시 한독맥주 사장 집을 개조했다함)에서 모시면서
 매일 번역을 해올리며, 한달에 한두번 상관 1명과 야근을 하는 날이 아니면
 이민용 선배 등을 따라가 저녁을 먹고, 또 술을 마시고,
밤 늦게 경복궁 왼쪽의 BOQ(독신장교 숙소)로 돌아와 자고,
아침은 굶거나 장교식당에서 떼우는 생활이 반복됐습니다.
절약되는 하숙비를 술값에 보탠 거지요.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12시가 넘으면
 같이 술마시던 선배들 집에 가 자기도 했습니다.
 <초급장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었지요.

매일 <긴장> 속에서 번역을 하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제2의 충정가가 선정됐다는
 발표와 함께 매일 출퇴근 직전에 이 노래가 각 사무실에
 구내 방송되었습니다.
가사는 몇개월 전 경호실 전체에서 공모했는데,
통신처 모 직원의 국문과 나온 부인이 응모한 것이
 뽑혔고, 거기에 누군가가 곡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북악의 우람찬 짙푸름
 우리의 슬기 모아 함께 뭉쳤네
 너와 나 조국 앞에 두 주먹 쥐고
 겨레와 님 위해 다져진 충정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진 우리들
 이 생명 이 목숨 님에게 바치리----

대충 이런 가사에 사병들이 부르는
 군가같은 곡조였습니다.
그런데 방송 후 한달 쯤 지나자
 차 실장이 모든 요원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지시한 모양입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 정문 앞에서
<조례>를 주재하던 강 처장이
<우리 정보처에서 지금 당장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었고, 모두들 주눅이 들어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내가 손을 들며, <처장님,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악보는 잘 못 읽지만 몇번 귀로 들은 곡조는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다.
새파란 초급 장교가 겁도 없이 자기 앞에 서니
 강 처장도 약간은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약 50명 선배 요원들 앞에서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대학 다닐 때 연극 주연까지 해 본 끼를 발휘해
 그냥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노래 전후의 반주까지 악기 소리를 흉내내며
 노래를 불러제꼈습니다.

그 경직된 분위기를 깨는 초급장교의 노래 소리에
 선배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댔고,
노래와 반주 흉내까지 끝내자
 강 처장은 씨-익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수고했어, 모두들 곽중위처럼 할 수 있도록 연습해!> 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선배들은 딱딱한 조례를 사상 처음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로 끝낸 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평소 전혀 웃지않는 강 처장의 그 백만불짜리 미소는
 정보처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몇달 전 나를 구출해 준 은인, 강 처장에 대한
 나의 작은 보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날 밤 나는 또, 내 노래를 들은 선배들이 사주는 술에
 대취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무교동에 있는 민속주점이나 낙지집에서,
우리는 무교동의 <월드컵>, <양주의 집> 등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산수갑산>이라는 집에서는
 야심해지면 술 나르던 남녀종업원들이 무대로 나가
<갑돌이와 갑순이> 등을 합창해주곤 했지요.

통금 시간인 12시가 다 되어
 위병소를 지나 연병장을 가로질러
BOQ 숙소로 걸어가면서
 나는 또 노래를 흥얼댔습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이슬비 내리는 이 밤도 애닯구려...>

노래방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곽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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