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CIUTI 총회 참석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05-26 18:04 조회4,13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2007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세계통번역학교협회(CIUTI) 총회가 이태리 볼로냐 근교의 Forli 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린 후 금년에는 좀 더 일찍 4월 28일부터 5월 2일까지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강(Ghent)이라는 작은 도시의 Hogeschool(상급학교라는 플랑드르 어)에서 열렸다.
이번에도 KLM을 타고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다시 브뤼셀로 가서 기차를 타고 들어가는 강행군 여정이었다. 다행히 일찍 항공기를 예약해 비지니스 클래스 좌석을 싸게 얻어탔다. 브뤼셀 공항에 밤 10시쯤 도착하니 기차를 탈 힘이 없어 50유로쯤 나온다는 택시를 탔는데 공항 택시 운전사가 지방 도시인 Ghent의 일방통행 투성이 지리를 몰라 시내에서 헤매다가 겨우 찾고보니 택시비는 140유로, 기사의 요청대로 팁까지 150유로를 주고 계산해보니 1:1600의 환율로 택시비가 24만원!! 가슴이 쓰렸다. 50유로 밖에 안나온다고 했는데...
작년의 이태리 총회 숙소는 수도원이었다는데 이번의 호텔은 수녀원이었단다. CIUTI 총회는 왜 모두 금욕의 터전만 찾아다니는지... 큰 방이지만 역사가 잠겨있는 구식 시설의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낡은 침대에 누우니 <내일부터 또 어떤 일정이 펼쳐질 지> 궁금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후기를 쓰려한다.
곽중철 (2008-07-11 15:26:50)
시간이 날때마다 후기를 쓰겠다 해놓고 두 달이 흘렀다. 방학한 지도 보름이 넘었는데...
이번 여행은 암스테르 담 경유, 브뤼셀로 가 기차로 겐트(Ghent의 영어식 발음)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출, 귀국 시 암 공항 라운지에서 각각 3시간 이상 머물며 시간을 보내면서 베넬룩스 3국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작은 나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더치, 플랑드르, 불어, 둑어, 영어를 함께 쓰며 나라를 유지해 온 비결이 무엇일까...?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사람이란 자주 보면 정든다는 것... 2005년부터 4년 째 만난 CIUTI 회원들이 이제는 진짜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과 나누는 뺨 인사(bisou)를 오랫만에 진심으로 나눌 수 있었다.
주최교인 겐트의 통번역학교는 화려하진 않지만 진심어린 환대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2006년 서울 총회 때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초대하는 등으로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서울만한 융숭한 총회는 없을 것"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이번 출장을 앞두고 나는 교수회관 1층 기념품 점에서 사비로 7,000원짜리 몽블랑 형 볼펜을 15개 구입해 갖고가 주최측과 이사진에게 돌렸더니 뜻밖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회의 기간 내내 감사 인사를 들었다.
이번 회의에도 AIIC 회장(Benoit KREMER)이 출장와 특별 발표를 한 틈을 타 볼펜을 하나 건네면서 "나는 1989년 이래 한국 최초의 AIIC 회원이고 GSIT는 2004년 이래 한국 최초, 최고의 CIUTI 회원교다. 그런데 AIIC 사이트를 보면 아시아 통번역학교 명단에 이름이 없다. 시정하라" 고 했다. 그는 "조치하겠다. 안 되면 내 후임 회장에 전하겠다"고 해놓고 아직 소식이 없다.
EU의 통번역담당관도 특별 발표를 했는데 EU의 26개 언어를 통번번역하는 고충과 각국의 퉁번역학교 졸업생을 선발하기 위한 유럽 통번역석사제도(European Master of Translation)를 설명했다. 그가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서울에서 이메일로 받아 통역입문, 모의회의 시간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유럽 냄새가 물씬 나는 살아있는 교재'가 아닐 수 없었다.
곽중철 (2008-07-11 16:36:54)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참석자는 베이루트 통역학교의 Gina였다. 약 35세인 그는 아랍어와 불어를 구사했고, 상관인 Awad 교수 대신 출장을 왔는데 마르고 착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염려했던 대로 레바논의 내전이 재발하여 베이루트 공항이 폐쇄돼 귀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밤을 세워 고국의 남편과 통화하다가 수척한 얼굴로 회의에 참석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마지막날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브뤼셀 공항에서 파리로 떠났는데 공항이 재개될 때까지 무작정 파리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시리아를 통해 귀국할 수도 있지만 그 루트도 위험하다 했다. 안전하게 돌아갈 조국이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서울로 돌아 온 며칠 후 공항이 다시 운행돼 무사히 귀국했다며 불어 이메일을 보내와 축하해 주었다. 브뤼셀 공항으로 가는 콜 택시 안에서 자신과 재혼한 60 가까운 남편이 보고 싶다며 울던 그 녀의 검은 눈망울이 기억난다. 부디 행복하기를....
작은 마을에서 열린 후 금년에는 좀 더 일찍 4월 28일부터 5월 2일까지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강(Ghent)이라는 작은 도시의 Hogeschool(상급학교라는 플랑드르 어)에서 열렸다.
이번에도 KLM을 타고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다시 브뤼셀로 가서 기차를 타고 들어가는 강행군 여정이었다. 다행히 일찍 항공기를 예약해 비지니스 클래스 좌석을 싸게 얻어탔다. 브뤼셀 공항에 밤 10시쯤 도착하니 기차를 탈 힘이 없어 50유로쯤 나온다는 택시를 탔는데 공항 택시 운전사가 지방 도시인 Ghent의 일방통행 투성이 지리를 몰라 시내에서 헤매다가 겨우 찾고보니 택시비는 140유로, 기사의 요청대로 팁까지 150유로를 주고 계산해보니 1:1600의 환율로 택시비가 24만원!! 가슴이 쓰렸다. 50유로 밖에 안나온다고 했는데...
작년의 이태리 총회 숙소는 수도원이었다는데 이번의 호텔은 수녀원이었단다. CIUTI 총회는 왜 모두 금욕의 터전만 찾아다니는지... 큰 방이지만 역사가 잠겨있는 구식 시설의 숙소에 여장을 풀고 낡은 침대에 누우니 <내일부터 또 어떤 일정이 펼쳐질 지> 궁금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후기를 쓰려한다.
곽중철 (2008-07-11 15:26:50)
시간이 날때마다 후기를 쓰겠다 해놓고 두 달이 흘렀다. 방학한 지도 보름이 넘었는데...
이번 여행은 암스테르 담 경유, 브뤼셀로 가 기차로 겐트(Ghent의 영어식 발음)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출, 귀국 시 암 공항 라운지에서 각각 3시간 이상 머물며 시간을 보내면서 베넬룩스 3국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작은 나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더치, 플랑드르, 불어, 둑어, 영어를 함께 쓰며 나라를 유지해 온 비결이 무엇일까...?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사람이란 자주 보면 정든다는 것... 2005년부터 4년 째 만난 CIUTI 회원들이 이제는 진짜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들과 나누는 뺨 인사(bisou)를 오랫만에 진심으로 나눌 수 있었다.
주최교인 겐트의 통번역학교는 화려하진 않지만 진심어린 환대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2006년 서울 총회 때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초대하는 등으로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서울만한 융숭한 총회는 없을 것"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이번 출장을 앞두고 나는 교수회관 1층 기념품 점에서 사비로 7,000원짜리 몽블랑 형 볼펜을 15개 구입해 갖고가 주최측과 이사진에게 돌렸더니 뜻밖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회의 기간 내내 감사 인사를 들었다.
이번 회의에도 AIIC 회장(Benoit KREMER)이 출장와 특별 발표를 한 틈을 타 볼펜을 하나 건네면서 "나는 1989년 이래 한국 최초의 AIIC 회원이고 GSIT는 2004년 이래 한국 최초, 최고의 CIUTI 회원교다. 그런데 AIIC 사이트를 보면 아시아 통번역학교 명단에 이름이 없다. 시정하라" 고 했다. 그는 "조치하겠다. 안 되면 내 후임 회장에 전하겠다"고 해놓고 아직 소식이 없다.
EU의 통번역담당관도 특별 발표를 했는데 EU의 26개 언어를 통번번역하는 고충과 각국의 퉁번역학교 졸업생을 선발하기 위한 유럽 통번역석사제도(European Master of Translation)를 설명했다. 그가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서울에서 이메일로 받아 통역입문, 모의회의 시간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유럽 냄새가 물씬 나는 살아있는 교재'가 아닐 수 없었다.
곽중철 (2008-07-11 16:36:54)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참석자는 베이루트 통역학교의 Gina였다. 약 35세인 그는 아랍어와 불어를 구사했고, 상관인 Awad 교수 대신 출장을 왔는데 마르고 착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염려했던 대로 레바논의 내전이 재발하여 베이루트 공항이 폐쇄돼 귀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밤을 세워 고국의 남편과 통화하다가 수척한 얼굴로 회의에 참석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마지막날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브뤼셀 공항에서 파리로 떠났는데 공항이 재개될 때까지 무작정 파리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시리아를 통해 귀국할 수도 있지만 그 루트도 위험하다 했다. 안전하게 돌아갈 조국이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서울로 돌아 온 며칠 후 공항이 다시 운행돼 무사히 귀국했다며 불어 이메일을 보내와 축하해 주었다. 브뤼셀 공항으로 가는 콜 택시 안에서 자신과 재혼한 60 가까운 남편이 보고 싶다며 울던 그 녀의 검은 눈망울이 기억난다. 부디 행복하기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