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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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8-12-18 20:18 조회3,84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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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경제위기는 필자에게도 90년대 말 IMF 구제금융 당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필자는 광화문에 있었던 신생 Y 방송국의 국제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95년 취약한 재정으로 방송을 시작한 Y 방송은 금융위기가 찾아오자 광고 수익금 등의 격감으로 직원들 봉급마저 주지 못하게 되었다.
나이 50이 다되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24시간 뉴스 방송에 들어와 밤낮으로 뛴 결과가 기본급마저 못 받는 처지라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사람이 부수입이 줄어들면 일부 지출을 줄이면 되지만 본봉이 나오지 않으면 한 마디로 <밥 지을 쌀을 살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가족들 보기가 민망해지는 단계를 지나 자신을 책망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면 오전 근무 후 부원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부장의 판공비는커녕 월급을 받지 못하니 점심시간이 공포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애써 들었던 적금을 해지하고 얼마간 사 모은 주식을 헐값에 판 돈 중 일부를 얻어 몇 달은 용돈으로 썼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마저 바닥이 났다. 위기 전 5,000원하던 회사 앞 대구탕 값이 4,000원으로 내려갔지만 매일 열 명 가까운 국제부 근무 기자들 점심 값 대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필자는 마침내 사업을 하는 친구들에게 전화로 구조요청을 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정이니 광화문에 나와 우리 부원들 점심이나 한 번 사주고 가라…” 다행히 친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찾아와 일주일에 며칠은 직원들 점심을 먹일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저녁에 찾아와 야근하는 부원들 모두를 근처 고기집으로 초대해 오랜만에 고기와 소주를 배불리 먹여주기도 했다.
이제는 사업하는 친구들 명단도 동이 날 무렵, 또 다른 독지가를 찾던 필자에게 근처 경복궁 복원 사업을 하는 모 건설사의 현장 소장으로 있던 친구가 생각났다. 전화를 하니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며 건설 현장에 있는 함바 집에 추가로 점심을 준비해 놓을 테니 직원들을 데리고 오란다. 옳다구나 여기자를 포함한 부원들을 데리고 경복궁 안 건설 현장으로 데리고 가니 함바집 아주머니가 특별히 과외로 도마질을 한 따뜻한 밑반찬의 달디단 점심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불리 먹은 직원들과 함께 친구와 아주머니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후 가까이 있어도 찾지 못했던 경복궁을 산책하면서 우리는 “곧 봄이 찾아 오겠지…”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건설 현장의 그 점심 맛과 친구의 따뜻한 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는 법, Y 방송사는 1999년 초부터 적으나마 다시 직원들 월급을 주기 시작했고, 필자는 3월에 모교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꼬박 5년을 같이 고생했던 동료들을 떠나는 것이 미안했지만 월급이 나오지 않을 때 함께 했다가 월급이 다시 나오자마자 다른 직장으로 가는 필자를 보는 직원들도 필자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리라…
새 직장에 근무하면서 나이가 들어 퇴직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기꺼이 밥을 사주는데 이번 위기로 더 많은 친구가 내게 연락해 주기를 기다린다. (끝)
나이 50이 다되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24시간 뉴스 방송에 들어와 밤낮으로 뛴 결과가 기본급마저 못 받는 처지라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설마 하면서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사람이 부수입이 줄어들면 일부 지출을 줄이면 되지만 본봉이 나오지 않으면 한 마디로 <밥 지을 쌀을 살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가족들 보기가 민망해지는 단계를 지나 자신을 책망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면 오전 근무 후 부원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부장의 판공비는커녕 월급을 받지 못하니 점심시간이 공포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애써 들었던 적금을 해지하고 얼마간 사 모은 주식을 헐값에 판 돈 중 일부를 얻어 몇 달은 용돈으로 썼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마저 바닥이 났다. 위기 전 5,000원하던 회사 앞 대구탕 값이 4,000원으로 내려갔지만 매일 열 명 가까운 국제부 근무 기자들 점심 값 대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필자는 마침내 사업을 하는 친구들에게 전화로 구조요청을 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정이니 광화문에 나와 우리 부원들 점심이나 한 번 사주고 가라…” 다행히 친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찾아와 일주일에 며칠은 직원들 점심을 먹일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저녁에 찾아와 야근하는 부원들 모두를 근처 고기집으로 초대해 오랜만에 고기와 소주를 배불리 먹여주기도 했다.
이제는 사업하는 친구들 명단도 동이 날 무렵, 또 다른 독지가를 찾던 필자에게 근처 경복궁 복원 사업을 하는 모 건설사의 현장 소장으로 있던 친구가 생각났다. 전화를 하니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며 건설 현장에 있는 함바 집에 추가로 점심을 준비해 놓을 테니 직원들을 데리고 오란다. 옳다구나 여기자를 포함한 부원들을 데리고 경복궁 안 건설 현장으로 데리고 가니 함바집 아주머니가 특별히 과외로 도마질을 한 따뜻한 밑반찬의 달디단 점심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불리 먹은 직원들과 함께 친구와 아주머니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후 가까이 있어도 찾지 못했던 경복궁을 산책하면서 우리는 “곧 봄이 찾아 오겠지…”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건설 현장의 그 점심 맛과 친구의 따뜻한 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는 법, Y 방송사는 1999년 초부터 적으나마 다시 직원들 월급을 주기 시작했고, 필자는 3월에 모교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꼬박 5년을 같이 고생했던 동료들을 떠나는 것이 미안했지만 월급이 나오지 않을 때 함께 했다가 월급이 다시 나오자마자 다른 직장으로 가는 필자를 보는 직원들도 필자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리라…
새 직장에 근무하면서 나이가 들어 퇴직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기꺼이 밥을 사주는데 이번 위기로 더 많은 친구가 내게 연락해 주기를 기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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