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장 ‘김범일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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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3-29 16:32 조회4,3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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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 신문에 다음과 같은 속 시원한 칼럼 기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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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창혁]스포츠외교 ‘김범일 모델’
서울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독일 남서부에 있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의 이름이나 들어 봤을까.
아프리카의 몸바사. 세계 각국의 수도나 도시 이름을 달달 외며 학창시절을 보낸 지금의 40, 50대에게도 그리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지만 몸바사는 엊그제 단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유명 도시’가 됐다. 케냐 몸바사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이사회에서 2011년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지를 놓고 대구와 겨뤘던 러시아 모스크바의 1000만 시민, 호주 브리즈번의 180만 시민도 ‘몸바사’를 되뇌며 결과를 기다렸을 것이다. 스포츠 외교를 통한 도시의 유명세, 브랜드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세계 주요기업들이 투자 및 마케팅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안홀트 도시브랜드 지수(CBI)만 봐도 조사 대상 60개 도시 대부분이 올림픽이나 각종 스포츠 외교로 지구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곳이다. 2011년 8월이면 전 세계 65억 명의 시선이 대구에 쏠릴 것이다.
어제 아침 출근하자마자 이연택 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덴바덴의 신화를 만들어 낸 정부 유치지원단 실무총책임자였다. 국내 ‘도시 서열’이 서울, 부산 다음에서 서울, 부산, 인천 다음으로 밀려난 대구가 ‘몸바사 쾌거’를 이뤄 낸 비결을 듣고 싶었다.
“대구 시민들의 용광로 같은 응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김범일 시장의 ‘준비된 경륜과 자질’도 맞아떨어졌을 겁니다. 그의 국제스포츠마케팅 마인드는 이미 서울올림픽 때 형성된 것입니다.” 이 위원장의 대답은 내 짐작과 맞아떨어졌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옛 총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김 시장은 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휘장사업과장으로 파견된다. 광고수익사업을 담당하는 핵심부서다. ‘흑자 올림픽’은 절대 과제였다. 197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고도 3400만 달러의 투자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대회를 반납해야 했던 우리였다. 당시 그는 연수 때 익힌 영어로 코카콜라나 코닥 같은 세계적 기업들을 직접 공략했다. 그때의 경험이 이번 육상대회 유치전에서 삼성그룹이란 좋은 스폰서를 잡게 했고, IAAF를 상대로 막판 ‘인센티브 히든카드’를 만들어 내게 했다.
지면을 빌려 무슨 논공행상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김 시장의 경우는 세계화(globalism)와 지방화(localism)의 경계가 무너져 가는, 이른바 글로컬리즘(glocalism) 시대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몸바사 쾌거는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국제스포츠대회 유치 전쟁에서 세계화(김범일)와 지방화(대구시민)의 ‘핵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줬다.
그리고 하나 더. 민주화 정권과 평균주의의 세월을 지내면서 잊고 있던 리더십의 몫을 되찾게 해 줬다. 국무총리까지 지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5%의 성장잠재력에 국민의 희망과 사기를 북돋워 1∼2%포인트를 추가할 수 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몫”이라고 했다. 현 정권 사람들은 냉소를 날릴지 모른다. 그러나 김범일과 함께 꿈을 이뤄 낸 대구 시민들은 박 회장의 말뜻을 그제 체험한 셈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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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휘장사업과장으로 파견된다>는 대목이 나와 김 선배의 인연이 시작된 시점을 상기시킨다. 나는 1983년 7월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84년 5월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수석 통역사로 임용되었으니까...
그는 나의 경북고 3년 선배였다. 나보다 몇 달 먼저 조직위에 온 그는 곧 <유능한 과장>으로 소문이 났다. 휘장사업이란게 코카콜라 등의 상품에 해당 올림픽 공식상품이란 로고를 붙여 팔게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인데 그와 담판에 나섰던 코카콜라의 간부들이 그의 협상력에 감동을 받아 <서울 대회가 끝나면 우리 회사에 오라>고 했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경북 예천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언제나 웃음띤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빠른 판단은 빈틈이 없는 공직자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영/불어 통역을 공부한
<프리랜서>의 기질을 보이는 나를 선배의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주었지만 워낙 업무가 달라 가까이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박세직 씨가 조직위원장으로 온 후 1987년 여름인가 위원장을 모시고 유럽 출장을 김 선배와 함께 나갔다. 나는 위원장 불어 통역을 하면서, 당시 위원장 비서실장으로, 김 시장과 같은 총무처에서 파견된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전 관광공사 사장)과 스위스 어느 도시 어느 호텔의 위원장 옆 방을 함께 쓰고 있었다.
박 위원장은 서울 올림픽 파크의 조각 공원을 만들기 위해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들과의 면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콧대 높은 조각가들과 일일이 통화해 면담 약속을 확인하고 면담 일시를 확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위원장이 김 실장을 통해 면담 일시를 다 바꾸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그 방에 김 선배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이 와있었는데 나는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기고
<대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의 일정이 이렇게 미친 년 널 뛰듯 할 수 있는가?>라고 일갈했다. 난 분위기를 몰랐지만 나중에 김 선배가 <너 정말 대단하다. 모 간부가 "저 친구가 누구길래 서슬 퍼런 위원장을 두고 그런 바른 말을 하는가?"라고 하더라>며 귀띰해 주었다. 그 일로 김 선배와 더 가까와졌다.
올림픽이 끝나고 김 선배는 총무처로 돌아가 공보관, 조직국장, 기획관리 실장을 거쳐 산림청장이 될 때까지 승승장구 했고, 몇 년에 한 번씩 날 만나면 그 때 스위스 호텔 방 사건 얘기를 했다. 산림청장을 끝으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대구 시 정무 부시장을 할 때 우리는 그의 관운이 다한 줄 알았으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2006년에 불어닥친 한나라당 바람으로 그는 고향 대구의 31대 민선 시장이 된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그의 둥근 달덩이 같은 분홍색 얼굴은 그의 운명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두어라, 흙이라 한들 흙일 줄이 있으랴?
지난 2월 22일, 외대 동계 교수 회의 차 대구에 내려간 나는 회의가 열린 대구 최고의 호텔 인터불고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마침 세계육상연맹의 심사단이 같은 호텔에 투숙해 그들을 찾아온 선배를 로비에서 만났을 때 내 손을 따뜻이 잡으며 반겨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그는 우리 총장과도 만났다.
위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그가 대회유치에 성공할 줄 알았다. 영어도 능청맞게 구사하는 그가 <한 방>을 날릴 줄 알았다. 기사 내용처럼 그런 유능한 공직자가 있기에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대구 대회를 위해 외국어 서비스가 필요하다면 나는 천리 길도 마다지 않고 제자들을 이끌고 버선 발(?)로 달려가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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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창혁]스포츠외교 ‘김범일 모델’
서울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독일 남서부에 있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의 이름이나 들어 봤을까.
아프리카의 몸바사. 세계 각국의 수도나 도시 이름을 달달 외며 학창시절을 보낸 지금의 40, 50대에게도 그리 익숙하지 않은 지명이지만 몸바사는 엊그제 단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유명 도시’가 됐다. 케냐 몸바사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이사회에서 2011년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지를 놓고 대구와 겨뤘던 러시아 모스크바의 1000만 시민, 호주 브리즈번의 180만 시민도 ‘몸바사’를 되뇌며 결과를 기다렸을 것이다. 스포츠 외교를 통한 도시의 유명세, 브랜드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세계 주요기업들이 투자 및 마케팅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안홀트 도시브랜드 지수(CBI)만 봐도 조사 대상 60개 도시 대부분이 올림픽이나 각종 스포츠 외교로 지구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곳이다. 2011년 8월이면 전 세계 65억 명의 시선이 대구에 쏠릴 것이다.
어제 아침 출근하자마자 이연택 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바덴바덴의 신화를 만들어 낸 정부 유치지원단 실무총책임자였다. 국내 ‘도시 서열’이 서울, 부산 다음에서 서울, 부산, 인천 다음으로 밀려난 대구가 ‘몸바사 쾌거’를 이뤄 낸 비결을 듣고 싶었다.
“대구 시민들의 용광로 같은 응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김범일 시장의 ‘준비된 경륜과 자질’도 맞아떨어졌을 겁니다. 그의 국제스포츠마케팅 마인드는 이미 서울올림픽 때 형성된 것입니다.” 이 위원장의 대답은 내 짐작과 맞아떨어졌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옛 총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김 시장은 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휘장사업과장으로 파견된다. 광고수익사업을 담당하는 핵심부서다. ‘흑자 올림픽’은 절대 과제였다. 197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고도 3400만 달러의 투자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대회를 반납해야 했던 우리였다. 당시 그는 연수 때 익힌 영어로 코카콜라나 코닥 같은 세계적 기업들을 직접 공략했다. 그때의 경험이 이번 육상대회 유치전에서 삼성그룹이란 좋은 스폰서를 잡게 했고, IAAF를 상대로 막판 ‘인센티브 히든카드’를 만들어 내게 했다.
지면을 빌려 무슨 논공행상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김 시장의 경우는 세계화(globalism)와 지방화(localism)의 경계가 무너져 가는, 이른바 글로컬리즘(glocalism) 시대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몸바사 쾌거는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국제스포츠대회 유치 전쟁에서 세계화(김범일)와 지방화(대구시민)의 ‘핵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줬다.
그리고 하나 더. 민주화 정권과 평균주의의 세월을 지내면서 잊고 있던 리더십의 몫을 되찾게 해 줬다. 국무총리까지 지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5%의 성장잠재력에 국민의 희망과 사기를 북돋워 1∼2%포인트를 추가할 수 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몫”이라고 했다. 현 정권 사람들은 냉소를 날릴지 모른다. 그러나 김범일과 함께 꿈을 이뤄 낸 대구 시민들은 박 회장의 말뜻을 그제 체험한 셈이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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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휘장사업과장으로 파견된다>는 대목이 나와 김 선배의 인연이 시작된 시점을 상기시킨다. 나는 1983년 7월 파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84년 5월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수석 통역사로 임용되었으니까...
그는 나의 경북고 3년 선배였다. 나보다 몇 달 먼저 조직위에 온 그는 곧 <유능한 과장>으로 소문이 났다. 휘장사업이란게 코카콜라 등의 상품에 해당 올림픽 공식상품이란 로고를 붙여 팔게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인데 그와 담판에 나섰던 코카콜라의 간부들이 그의 협상력에 감동을 받아 <서울 대회가 끝나면 우리 회사에 오라>고 했다는 전설아닌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경북 예천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언제나 웃음띤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빠른 판단은 빈틈이 없는 공직자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영/불어 통역을 공부한
<프리랜서>의 기질을 보이는 나를 선배의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주었지만 워낙 업무가 달라 가까이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박세직 씨가 조직위원장으로 온 후 1987년 여름인가 위원장을 모시고 유럽 출장을 김 선배와 함께 나갔다. 나는 위원장 불어 통역을 하면서, 당시 위원장 비서실장으로, 김 시장과 같은 총무처에서 파견된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전 관광공사 사장)과 스위스 어느 도시 어느 호텔의 위원장 옆 방을 함께 쓰고 있었다.
박 위원장은 서울 올림픽 파크의 조각 공원을 만들기 위해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들과의 면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콧대 높은 조각가들과 일일이 통화해 면담 약속을 확인하고 면담 일시를 확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위원장이 김 실장을 통해 면담 일시를 다 바꾸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그 방에 김 선배를 비롯한 일부 간부들이 와있었는데 나는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기고
<대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의 일정이 이렇게 미친 년 널 뛰듯 할 수 있는가?>라고 일갈했다. 난 분위기를 몰랐지만 나중에 김 선배가 <너 정말 대단하다. 모 간부가 "저 친구가 누구길래 서슬 퍼런 위원장을 두고 그런 바른 말을 하는가?"라고 하더라>며 귀띰해 주었다. 그 일로 김 선배와 더 가까와졌다.
올림픽이 끝나고 김 선배는 총무처로 돌아가 공보관, 조직국장, 기획관리 실장을 거쳐 산림청장이 될 때까지 승승장구 했고, 몇 년에 한 번씩 날 만나면 그 때 스위스 호텔 방 사건 얘기를 했다. 산림청장을 끝으로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대구 시 정무 부시장을 할 때 우리는 그의 관운이 다한 줄 알았으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2006년에 불어닥친 한나라당 바람으로 그는 고향 대구의 31대 민선 시장이 된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그의 둥근 달덩이 같은 분홍색 얼굴은 그의 운명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두어라, 흙이라 한들 흙일 줄이 있으랴?
지난 2월 22일, 외대 동계 교수 회의 차 대구에 내려간 나는 회의가 열린 대구 최고의 호텔 인터불고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마침 세계육상연맹의 심사단이 같은 호텔에 투숙해 그들을 찾아온 선배를 로비에서 만났을 때 내 손을 따뜻이 잡으며 반겨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그는 우리 총장과도 만났다.
위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그가 대회유치에 성공할 줄 알았다. 영어도 능청맞게 구사하는 그가 <한 방>을 날릴 줄 알았다. 기사 내용처럼 그런 유능한 공직자가 있기에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대구 대회를 위해 외국어 서비스가 필요하다면 나는 천리 길도 마다지 않고 제자들을 이끌고 버선 발(?)로 달려가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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