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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실패한 웅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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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7-02-21 14:01 조회4,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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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언론학자 박성희 교수가 다시 오늘 모 일간지에 명칼럼을 올렸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말에 관한 것인데 지난 4년간  ‘막간다’ ‘깽판’ ‘썩는다’ ‘양아치’ ‘죽치고 앉아’ ‘별들 달고 거들먹거린다’는 등의 비속어가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왔다는 거다. 박교수가 놓친 말 중에는 <방귀 질 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는, 옛날 시골에서 썼던 속어까지 있었다. 여기서 뜻을 설명하기도 좀 민망한 말이다.

前 대통령을 오래 모신 경험이 있는 나도 그의 집권 초기부터 저건 아닌데...하고 느꼈던 바다. 탈 권위는 좋지만 최고 권력자가 시정잡배같은 비속어를 써서는 안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거다. 그런 대통령을 통역해야하는 통역사는 얼마나 괴로을까?

권위적인 색채가 짙었던 과거 대통령들의 발언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그의 말은 국민들을 불안하고 부담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집권세력이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간주하는 비주류(minor)의 화법을 선택했다는 건데 최고 권력자이면서 언론같은 기존 권력에 <난 힘이 없다. 왜 날 무시하나?>고 했다. 가장인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면 가족들은 황당할 것이다. 자기가 제일 힘이 세면서...

나같으면 취임 직후 유력 일간지 사장들을 한사람씩 불러 <어쩌다보니 내가 대통령이 됐다. 열심히 해볼테니 과거를 모두 잊고 나라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 애로 사항이 뭐냐? 최대한 해결해 주겠다>고 했을 거다. 대통령이 그러는데 <필요없어, 넌 안될거야>라고 할 언론사가 어디 있겠는가? 다짜고짜 <유력 언론은 나빠>라고 하니 튀지 않을 언론사가 있는가?

포퓰리스트(Populist·대중영합주의자)를 지향하면서 계층을 나누는 당파적인(partisan) 단어를 즐겨 쓴 것은 부자 친구의 비싼 가방을 부러워하다 못해 칼로 찢었다는 그의 어릴 적 일화를 상기시킨다. 단순하고 공격적이며 설득의 대상을 적대시하는 것도 유분수다. 대통령이 남의 재산을 훼손하면 일반 국민은?

그는 인권 변호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고서도 운동가의 화법, 수세에 몰린 피고를 변호하는 율사(律士)의 화법을 고수했다는 거다. 내가 통역한 대통령은 권위주의적이었을 지는 몰라도 국민의 한 사람인 통역사의 마음을 아프게하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통역 직전에 내 팔을 붙들며 신중하게 통역해 줄 것을 주문했다.  나는 그런 대통령을 존경하며 최선을 다해 통역했다.

내가 국민들이 부담스러워하고, 사회 통합은커녕 편 가르기의 주범이라는 혐의를 받는 대통령의 통역사가 아니었다는 것이 다행이다. 차기 대통령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밑으로 기어들어간 대통령의 언사를 다시 국민들 머리 위로 올리는 작업을 먼저 해야할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일단 말을 적게하는 거다. 침묵은 금이란 말이 바로 그 의미일 터다. 힘있는 사람이 자기 말에 귀기울이게 하려면 말을 적게하면서 목소리를 낮추면 된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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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월 23일 밤 10시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노 대통령 통역의 고충을 직접 경험했다. 그 며칠 전 1995-1999년까지 YTN에서 같이 일했던 후배가 영어 케이블 방송 아리랑 TV의 국장이 되어 전화를 했는데 대통령 신년 특별 연설을 영어로 동시통역할 제자를 구해달라고 했다. 통번역원에 희망자를 수배시켰는데 며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TV 생동시통역이 아주 어렵고 위험부담이 많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노 대통령의 악명 높은 말버릇을 통역사들도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 국장에게 <희망자가 없다>고 했더니 <선배님이 해주신다면 연설 몇 시간 전 연설문을 확보해 드리겠다>고 하면서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순발력이 많이 떨어진 55살 나이에도 과거의 객기를 죽이지 못하고 승낙을 해버렸고,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신문을 보니 1시간 연설에 원고를 보지않고 즉흥으로 하신단다. 무슨 대통령의 연설이 1시간이나 걸리며 즉흥연설이라니? 잘못 걸렸다. 통역을 어떻게 하나?

23일 학교에 나와 청와대 홈페지 영어판을 보고 있는데 저녁 7시쯤 후배가 청와대에서 배포한 연설문을 이메일로 부쳐주었다.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났다. 1시간 연설이라는데 급속도로 읽어도 2시간이 넘을 분량이었다. 이 내용을 1시간에 즉흥으로 연설한다고? 참 이상한 대통령이었다. 대충이라도 번역을 시도해보니 방송시간인 10시까지는 1/4도 못할 것으로 보였다. 난감했다. 25년 통역 경력에 오점을 남길 것인가?

난 번역을 포기하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통역이란 이상해 준비하느라 체력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맑은 정신으로 임하는 것이 낫다는 평소 소신을 지켰다. 방송국에서도 우려가 태산같았다. 역시 YTN에서 같이 일했던 메인 앵커 안착희의 안내로 통역실로 들어가 맨 땅에 헤딩을 시도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우리 말로나마 읽어 본 첫 부분을 즉흥 연설하는데 35분을 소모했고 그 다음부터는 <시간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 별로 통역할 내용이 없었다. <수고 하셨다>는 방송 관계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11시 넘어 양재대로로 걸어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노 대통령 통역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자위했지만 다음 날부터 치통을 동반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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