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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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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9-17 00:00 조회2,4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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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74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당시 여의도 광장에서 매년 거행되던 기념 행사에
학군단(ROTC) 대표로 참가한 열병/분열 행사에서
 박정희라는 실물을 처음 봤습니다.

키가 커 맨 앞줄에 서있던 저는
<우로 봐>라는 구령에 얼굴을 돌렸고
 열병 차를 타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를
 처음 본 것입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의 조그만 얼굴은 인자해보여
 아버지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후 1977년 1월 19일 육군 소위의 신분으로
<국방부 파견 청와대 요원>이란 명령을 받고
 대통령 경호실로 첫 출근을 했습니다.
아침 일찍 설래는 맘으로 촌닭같이 육군장교 정복에
 미군 외투, 국방색 마후라까지 두르고,
한창 유행하던 007 백을 들고 효자동 쪽
 경복궁 담길을 올라 청와대 경내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사복경찰인듯 사람이 다가와
<조용히 뒤로 돌아서 왔던 길을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며 걸어내려가라>고
 명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돌아서 몇발자욱 걷다보니
 검은 차량 행렬이 60km 정도 속도로 지나가는데
 맨 앞에는 추운 날씨에도 무개 차량 위에
M16 소총을 든 검은 특수복 병력 8명 가량이
 온 방향으로 사주경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행차였고,
나중에 알아보니 <연두순시>였습니다.
그 경찰관이 불러 다시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니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고 초소를 몇개나 지나
3층에 있던 경호실장 부속실을 찾아가니
6개월 전 우리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던
 이민용 선배(후 행정처정 역임)가 맞아 주면서
 내일부터는 군복을 벗고 어두운 양복차림으로 나오고
 머리는 민간인처럼 길러라.
며칠 후 새 양복이 지급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와대 사무실은 군대의 사무실보다
 훨씬 화려하고, 따뜻했습니다.
제 나이 만 24살이었습니다.

그 6개월 전 성남에 있는 <육군종합행정학교>의 어학처
 영어교관으로 있을 때 3명의 동료 교관과 함께
 학교장 실로 불려가 까만 지프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는데 그 곳이 당시만해도 무시무시했던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의 부속실이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깨끗하고 푹신한 붉은 카페트가 쫙 깔려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영어 주간지의 사설을 번역하는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는데 제가 선발된 것 입니다.

어린 마음에 너무 좋아 그 전날 밤 이문동의 하숙집에서
 잠을 설쳤습니다. 당시에는 청와대에 근무한다고 해도
 대통령이나 비서/경호실장의 얼굴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청와대 경내에서는 직원들이 언제나 긴장해
 발을 맞추어 걸어야하는 정도였으니까요.

분위기가 하도 경직돼 새벽에 청소원들이 경내를 빗질하다가
 대통령이 산보를 나오는 것을 보고도 감히 인사를 못드리고
 뒤로 돌아서 벽을 보고 서있을 정도여서
<각하 조우시 행동 요령>이라는 지침이 하달될 정도였습니다.

저는 지금은 벌써 헐려버린 효자동 쪽 주택 건물에 차려진
<경호실 정보처>에서 영어 주간지 등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언론 검열이 극심해 타임 등 주간지의 한국 관련 기사는
 모두 찢기거나 검은 색으로 지워져 배포되고 있었습니다.
경호실에는 원문 그대로 배달돼 당일 중요기사를
 저희가 번역을 해 경호실장 방에 올리면
 실장은 시간이 나는 대로 그 번역을 읽고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해
 대통령과의 회의나 면담에서 언급했답니다.

저는 직속상관이었던 외대 영어과 선배 이민용 씨께
 번역을 참 많이 배웠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제가
 통번역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대통령이나 실장을 일절 볼 수 없고,
서슬퍼런 경호실장이 만드는 공포 분위기가 싫어,
매일 번역만 하는 일상이 지겨워,
정보처장의 협박성 만류를 뿌리치고
 군 복무 기간이 끝나는 1978년 6월말
 저는 청와대를 떠났고, 그 것이
1979년 9월 설립된 외대 통역대학원 입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26살의 어린 나이에, 누구나 <출세>라고 생각하는 청와대를,
만류를 뿌리치고 나온 것이 용기였을까,
오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반골 기질이었을까
 아직도 모릅니다. 그 후 인생에서 나는 몇 번 더
 주위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좋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통대와 ESIT 졸업 후 서울 올림픽으로
 노태우 씨와 인연을 맺어 33살에 다시 청와대에,
이번엔 경호실이 아닌 비서실의 공보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물태우라는 지도자를 모신 경험과
 현 노무현 대통령의 지도력을 보면서
 자유는 없었지만 박정희라는 사심없는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 뛰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박통 시절의 수많은 얘기는
 차차 보따리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곽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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