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는 타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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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6-10-24 12:01 조회5,5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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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는 타고나는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장 곽중철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장관과 나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 고교 시절에 학교에서 영어를 제일 잘 했다는 점이다.
내게는 영어가 제일 쉽고, 제일 재미있어 학부에서도 영어를 전공한 후, 1977년 초 24살 먹은 육군 소위로 국방부에서 청와대 요원으로 파견돼 번역을 시작하였다. 서슬 퍼렇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위해 매일 외신의 한국관련 기사를 번역해 올렸다. 당시는 외신이 모두 엄격한 검열을 받아 일반 독자는 한국관련 기사를 읽기 힘든 시절이었다. 국가가 나를 번역사로 키워준 셈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던 내가 어려운 외신을 낑낑대며 번역해 올리면 대학 선배였던 상관이 교정을 봐주었는데 신기한 것은 그 선배가 원문을 보지 않고도 귀신같이 내 오역을 집어 내는 것이었다. 그 비결을 궁금해 했더니 “나는 너보다 세상을 많이 알거든” 이라고 하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하는 번역 일이 지겨워 선배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위로 만기 제대하면서도 내가 통역사가 될 줄은 몰랐다.
호기롭게 제대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못돼 나의 경쟁력은 외국어 뿐임을 깨닫고 1979년 9월 설립된 모교 한국외대의 통역대학원에 입학하였다. 통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니 정말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인지 숙명인지 나는 1년 후 실시된 국비장학생 선발시험에 1등으로 합격해 파리 제3대학의 통역대학원, 에지트(ESIT)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 때는 선발 위원들이 “너는 통역사로 태어났다”고 하는 말이 근거 없는 과찬으로만 들렸다.
천신만고 끝에 3년 만에 한국어-영어-불어 국제회의 통역 자격증을 따 귀국해 전문 통역사 생활을 시작했다. TV 생중계 동시통역을 하는 등 프리랜서를 거쳐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수석 통역 겸 통역안내과장을 역임한 후, 대통령 비서실 공보 비서관으로 대통령 통역도 지겹도록 했다. YTN 국제부장을 하면서는 위성 수신 뉴스 동시통역도 신물이 나게 했다.
1999년 다시 운명적으로 모교의 교수로 와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니 그제서야 원문을 보지 않고도 내 오역을 잡아내던 그 선배의 비결을 나도 체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까만 후배들보다는 내가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공부를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많이 아는 놈이 이긴다”고 선문답을 한다.
세상에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학교에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해 2년 동안 죽어라 통, 번역을 공부하는 학생은 많지만 정말 두각을 드러내는 제자는 많지 않다. 교편을 잡은 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통역사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느낌이 점점 더 짙어진다. 1년에 한두 명이라도 “아, 통역사로 타고 났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제자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건만 그 수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언어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던 제자들이 몇 번의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한 후 국제회의장에서, 여러 직장에서 어엿한 전문 통, 번역사로 사회에 기여하는 일꾼이 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통, 번역사로 태어나지 못했어도 교육과 훈련으로 모자라게 타고 난 재능을 보완할 수 있다”고 자위하며 오늘도 교안을 준비한다. (끝)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장 곽중철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장관과 나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 고교 시절에 학교에서 영어를 제일 잘 했다는 점이다.
내게는 영어가 제일 쉽고, 제일 재미있어 학부에서도 영어를 전공한 후, 1977년 초 24살 먹은 육군 소위로 국방부에서 청와대 요원으로 파견돼 번역을 시작하였다. 서슬 퍼렇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위해 매일 외신의 한국관련 기사를 번역해 올렸다. 당시는 외신이 모두 엄격한 검열을 받아 일반 독자는 한국관련 기사를 읽기 힘든 시절이었다. 국가가 나를 번역사로 키워준 셈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던 내가 어려운 외신을 낑낑대며 번역해 올리면 대학 선배였던 상관이 교정을 봐주었는데 신기한 것은 그 선배가 원문을 보지 않고도 귀신같이 내 오역을 집어 내는 것이었다. 그 비결을 궁금해 했더니 “나는 너보다 세상을 많이 알거든” 이라고 하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하는 번역 일이 지겨워 선배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위로 만기 제대하면서도 내가 통역사가 될 줄은 몰랐다.
호기롭게 제대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못돼 나의 경쟁력은 외국어 뿐임을 깨닫고 1979년 9월 설립된 모교 한국외대의 통역대학원에 입학하였다. 통역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니 정말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인지 숙명인지 나는 1년 후 실시된 국비장학생 선발시험에 1등으로 합격해 파리 제3대학의 통역대학원, 에지트(ESIT)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 때는 선발 위원들이 “너는 통역사로 태어났다”고 하는 말이 근거 없는 과찬으로만 들렸다.
천신만고 끝에 3년 만에 한국어-영어-불어 국제회의 통역 자격증을 따 귀국해 전문 통역사 생활을 시작했다. TV 생중계 동시통역을 하는 등 프리랜서를 거쳐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수석 통역 겸 통역안내과장을 역임한 후, 대통령 비서실 공보 비서관으로 대통령 통역도 지겹도록 했다. YTN 국제부장을 하면서는 위성 수신 뉴스 동시통역도 신물이 나게 했다.
1999년 다시 운명적으로 모교의 교수로 와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니 그제서야 원문을 보지 않고도 내 오역을 잡아내던 그 선배의 비결을 나도 체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까만 후배들보다는 내가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공부를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많이 아는 놈이 이긴다”고 선문답을 한다.
세상에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학교에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해 2년 동안 죽어라 통, 번역을 공부하는 학생은 많지만 정말 두각을 드러내는 제자는 많지 않다. 교편을 잡은 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통역사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느낌이 점점 더 짙어진다. 1년에 한두 명이라도 “아, 통역사로 타고 났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제자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건만 그 수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언어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던 제자들이 몇 번의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한 후 국제회의장에서, 여러 직장에서 어엿한 전문 통, 번역사로 사회에 기여하는 일꾼이 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통, 번역사로 태어나지 못했어도 교육과 훈련으로 모자라게 타고 난 재능을 보완할 수 있다”고 자위하며 오늘도 교안을 준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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