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면 증후군 My Imposter Synd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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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5-13 22:37 조회1,54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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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면증후군 My Imposter Syndrome
가면증후군이란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다. 가면증후군에 걸리면 성공의 요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 귀인(attribution)하고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 혹은 사기꾼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어를 직역해 ‘사기꾼(imposter)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이는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Pauline Clance)와 수잔 임스(Suzanne Imes)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1978년 미국 조지아 주립 대학 교수였던 두 학자는 이 증후군이 성공한 여성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가 2021년 5월, 제93회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 발표 때 봉준호 감독의 통역을 맡았던 샤론 최(한국명 최성재)이다.
그는 2019년 4월 봉준호 감독을 처음 만나 그의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그를 수행했다. 제77회 골든 글로브상, 제72회 미국 작가 조합상, 제92회 아카데미상을 포함하여 2019~2020년 영화 수상식에서 봉 감독의 통역을 계속 맡았다. 그 과정에서 봉준호 만큼이나 유명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가면증후군을 느꼈고, 국제적인 무대에서 각광을 받는 것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존경하는 봉 감독의 발언을 잘못 전달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겠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무대 뒤에서 짧은 명상을 하고, 통역할 때는 “내가 잘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날 칭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모시는 봉감독을 칭송하는 것뿐”이라고 계속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단다.
그 자신도 영화인이고 그런 철학과 자기 성찰 덕분에 그의 통역은 더욱 깊이가 있어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이고 가면증후군의 순작용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통역을 배운 적이 없는 그가 수 10년 경력의 전문통역사도 이르기 어려운 자각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가면증후군처럼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무대공포증(stage fright)이라 한다. 통역사들은 보통 외부와 격리된 통역부스 안에서 동시를 할 때보다 연사와 같은 무대에서, 청중 앞에서 순차통역을 할 때 공포증을 느낀다. 필자는 다행히도 그 공포를 즐기는 체질이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계기가 된 것이 대학시절의 연극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당시 서울의 유일한 연극 무대였던 남산의 드라마센터에서 대학 4학년이던 1975년 봄의 이틀동안 나는 싱글 캐스트로 영어연극 4회 공연을 다 소화했고 그것이 내 인생의 큰 추억으로 남았다. 그 경험은 누구보다 Bill Ryan이라는 미국인 교수 감독 덕분이었다. 1975년 1월 겨울방학 중 캐스팅에서 날 주인공으로 뽑은 후 내 영어대사를 자신의 목소리로 감정을 넣어 카세트 녹음기에 녹음해주었다. 연극배우 출신이었던 그의 대사를 그의 억양과 함께 며칠 만에 다 외워 갔을 때 그는 흐뭇해 더 열심히 지도해주었다. 처음해보는 연극이고, 서울에서 제일 큰 무대였지만 무서워하지 않고 그 순간들을 즐긴 것이 아직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 후 군복무를 하고, 유학을 다녀와 한국 보도방송 처음으로 TV 동시통역을 하고, 올림픽에서 서울을 대변하고, 대통령을 통역하는 수많은 무대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의 연극 경험 덕분이었다. 인생은 어차피 한판 연극이라고 했던가. 내가 만물박사라서, 내가 잘 나서 대통령을 통역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맡은 역을 하는 것일 뿐, 내가 쓴 가면은 사기꾼이 아니라 배우의 분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태어나 대학 들어가서야 미국인과 첫 대화를 하고, 27살에 처음 국제선 비행기로 파리로 건너간 사람이 어떻게 그 어려운 영어/불어 통역을 하고 일가를 이루었냐고 물으면 나는 연극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내게는 가면 증후군이 없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통역을 가르치며 나는 강변한다. “연극을 하듯 미친 척하고 통역하라. 이 통역을 마치고 ‘주여, 정말 내가 이 통역을 했습니까?’ 하면서 기진해 쓰러져버리겠다는 각오로 통역하라. 어차피 인생이 한 판의 연극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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