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를 추모함 경대사대부국, 경북고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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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0-21 16:53 조회1,6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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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를 추모함
경대사대부국, 경북고 동기 곽중철 씀
내 전화번호부의 한영우 란은 [한영우 물건]으로 되어있다. 초등 때부터 60여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물건, 모노]였다. 여러동기들이 증언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맞았다. 반면, 차순도 원장이 증언하는 촤순용은 내 번호부에 [최순용 으이?]로 돼있으니 참고하시라.
영우는 초교동기들에게 한마디로 [나쁜 친구]였다. 그로부터 술, 담배를 배운 동기들 중 1차대학에 붙은 친구는 권기영이 유일했으리라. 기영 모친의 치맛바람만이 영우의 집요한 공격을 자식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었으리라….
고3때, 입시 공부 한답시고 시내 한석동 변호사 댁에 모여 밤새 라면 끓여 먹으며 술 담배를 탐닉했다. 공부는 딴전이었다. 1차 입시를 앞두고 상경했더니 서울역에서 나를 마중 나온 영우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자그마치 워커힐 호텔 볼링장. 여관방에서 내일 입시 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서울의 한량들이 모이는 호텔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1차시험에 붙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둘 다 보기 좋게 낙방한 얼마 후 나는 다시 그와 함께 2차 외대 시험을 보러 서울 동대문 너머 이문동의 한 한식 여관에 방을 잡았다. 그러나 역시 공부는 커녕 이문동의 술집에서 정종을 마시고 불콰해서 들어와 다음 날 아침 시험을 보러갔다. 내가 보기에 2차 대학인 외대의 시험문제는 서을대 입시문제에 비해 단순히 1차적이었고, 훨씬 쉬웠다. 결과는 나는 합격, 영우는 떨어져 그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영우는 그 유명한 종로의 대성학원을 다녔는데 숙소는 교사였던 엄마의 제자가 사는 삼청동 언덕의 깨끗한 한옥이었다. 그 제자 아줌마는 지극 정성으로 영우와 친구들을 맞았는데, 우리가 좋아하던 일그러진 영웅 박창국은 통금시간 전에 겨우 돌아온 하숙방에 아줌마가 깔아준 비단 한식 새 이불에 거나하게 토를 했고,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영우 모친에게 전달되었을 지 지금도 알 수 없다.
1972년, 나는 2차대학에서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느라 정신 없었고 영우는 학원을 댕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대구 영대에 입학했을 것이다. 73년에는 우리가 귀향하면 통술집 등에서 만나고 영우가 서울 오면 대성학원 옆 삼겹살 집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1973년 나는 병역문제 해결을 위해 ROTC를 지원해 바빠졌고, 영우는 서울을 오가며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빴다. 1975년 내가 휘경동에서 부국 동기인 서울공대 모윤종과 자치 생활을 할 때 자주 박창국과 함께 와 자취생의 쌀독을 축냈다. 근처 경희대 치대에 다니던 임성수도 한 번씩 자리를 빛내 주었고 가끔씩 안종태, 백봉한이 조연으로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1975년 봄, 내가 남산의 드라마센터에서 외대 영어연극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을 때 그도 상경해 자기가 출연한 것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 무렵 자신의 사촌 여학생을 소개시켜줘 그 여학생은 내가 김해에서 공병장교 훈련을 받는 4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예쁜 위문 편지를 보내주었다…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1980년 내가 파리 유학 출국을 1주일 앞두고 결혼했을 때도 그는 내 곁을 지켰고 나와 떨어진 것은 내 유학 3년과 그의 코트라 재직 시 미국에 있었던 기간 뿐이었다. 귀국해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여동생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뜬금없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니 때문에 1차 대학 떨어진 놈팽이가 됐는데 왜 니가 밉지가 않을까?” 하면 그는 웃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그를 두고 “자유의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공범일 뿐이었다. 내일 대구로 찾아갈 그의 빈소에서는 본인이 조의금을 받지 말라고 했다는데 지는 친구들 경조사에 2-3배의 금액을 쾌척했음을 나는 안다.
영우는 언제부턴가 대구 친구들 사이에서 “매일 밤 새 술 마시는 영혼”으로 찍혀 일종의 기피인물이 된 것으로 안다. 이제 모두 늙어서 12시만 되면 그의 곁을 떠나는 친구가 많아진 것은 당연하다. 그는 몇 년 전만해도 서울에 평균 한달에 한번은 올라와 술을 마시고 청담동 리베라 호텔에서 자고 익일 늦게 下邱하곤 했다. 12시가 넘도록 그의 수발 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린 날 우리들의 영웅을 서을 밤거리에 내팽겨 칠 수는 없잖은가? 그러고도 나는 결코 밉지 않았고, 그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영혼이었다.
지난 여름, 우리가 같이 아는 후배가 팬션을 운영하는 진도에 함께 가서 후배의 18번인 ‘Wonderful tonight’를 듣자고 약속했는데 공염불이 되었구나. 평생을 괴롭힌 척추 협착증을 떨쳐버리고 니 영혼처럼 자유롭게 피안에서 놀고 있어라. 다시 만나는 날, 급히 이세상을 떠나느라 다하지 못했던 얘기를 다 하자, 정말로… 삼겹살 값은 누가 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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