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종을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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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4-10-26 14:01 조회230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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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 7월 4일 목요일 새벽 두시 반 경, 잠은 안 오고 싱가폴에 있다는 모윤종이 생각이 자꾸 나 다음과 같이 그와의 추억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지금도 내 홈피에 올라있다(www.jckwak.com, 자유게시판)
모윤종은 초등학교부터 친구였다. 경대사대부국을 같이 나와 그는 대구 중학을 나왔지만 경북고에서 다시 만나 우정을 쌓았다. 그와의 우정이 특별한 것은 대학 4학년 때 휘경동에서 자취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울공대 기숙사는 공릉동, 내가 다니던 외대는 이문동에 있어 자주 만났는데 3학년 2학기 때 새삼스레 나를 찾아왔다. 4학년이 되면 같이 자취를 하자는 것이었다. 곧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내 친동생과 함께 같이 하자는 다소 엉뚱하고 놀라운 제안이었다. 하숙비가 비싸니 생활비도 줄일 겸 3인의 하숙비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자고 어렵지 않게 합의를 하고 그의 계획을 들어보니 우선 두 학교의 중간지점인 휘경동 쯤에 자취방을 구하고 입식 생활을 위해 침대 3개는 서울 공대 기숙사의 목수아저씨께 부탁해 나무 침대를 만들어 오겠다는 것이었다. 침대뿐 아니라 자취방 계약 등 모든 일을 거의 윤종이 다했다. 내가 3학년 1학기부터 학군 ROTC에 입단해 바쁜 가운데 서강대 전자 공학과에 합격한 내 동생을 특히 귀여워 했음 인 지 그는 자취 준비에 신이 나 있었다.
외대와 경희대 중간에 있는 2층 상가의 2층에 맥주를 팔던 술집이 비어 계약을 했던 모양인데 쥐가 출몰하는 건 둘째 치고, 첫 문제는 침대에서 터졌다. 공대 기숙사에서 실비로 만들어온 침대의 길이가 모두 180 cm였던 것이다. 윤종의 키는 165? 내 동생의 키는 175였는데 내 키가 180에 가까워 내게는 침대 길이가 안 맞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 때부터 나는 잔뜩 움츠리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이 침대 스토리는 자취방에 놀러 오는 모든 친구들에게 윤종의 무모함을 폭로하는 주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꿈처럼 1년 간의 자취 경험을 끝내고 나는 군대로 내 동생은 서강대 가까운 신촌 하숙집으로 옮겨가 동거 기간은 끝났다. 그 젊고 꽃 같던 시절 1년 동안 우리 세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 후 나는 군 장교 생활에 이어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길을 걸었고, 그는 졸업 후 현대 자동차에 입사해 기업인의 길을 걸었기에 더 이상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같은 기업인의 길을 간 정은택, 박문규와 친해져 나는 질투심도 느꼈지만 어쩌랴, 다 갈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를 나오면 그의 약혼녀인 박주향 여사와 함께 만나 삼계탕을 먹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주향 씨가 친척누나라고 구라를 치기도 했다.
내가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개포동 주공 단지에 살게 되었을 때, 그와 박문규, 정은택도 근처에 살고 있어 가끔씩 교류했는데 주말에는 그의 잘 생긴 두 아들 영종과 영창을 만나기도 했다.
아는 친구는 다 알지만 그는 작은 거인 (a little great man: 모순어법oxymoron)이었다. 모든 이에게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리더십과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외대 영어과의 서울 친구들도 그에게 빠져 "모상, 모상"하면서 그를 찾았다. 그는 또 작은 한량(閑良)이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도 잘했다. 남의 일팔 번 노래도 잘 기억해 노래방에 가면 “니 잘하는 그 X나게 슬픈 노래를 해보라”고 김상배의 [몇 미터 앞에 두고]를 신청하기도 했다. 술 한잔 하고 나면 옛 시조에서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고려 말 문인 이조년 작)를 인용하고는 흐뭇해 했다. 영어에도 조예가 있어 “I miss you”는 “네가 그립다”는 뜻이라고 번데기 앞에 주름을 잡기도 했다.
서로 바빠 자주 못 만나다가 1999년 내가 모교 교수로 가게 됐을 때 그는 특유의 오지랖으로 나를 도와준 교수들을 불러 한 요정에서 거하게 만찬을 베풀기도 했는데 나는 충분히 고맙다는 말도 못한 체 8년 전 20일팔 년에 교수직을 퇴임했다. 다시 감사의 말을 올린다.
작년에 통화했을 때 건강과 쾌유를 빌자 그는 “이건 낫는 병이 아니다”라고 쓸쓸히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쾌유는 아니더라도 "오래 살아 자주 만나자. 노래방도 같이 가고" 라고 했는데…
PS: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와 특히 친했던 허상, 영우, 윤종 등을 먼저 불러 가신 이유가 야속할 뿐이다.
댓글목록
장명섭님의 댓글
장명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종심(從心)을 지나 떠올리는 20대 앳된 홍안의 우정.
언 땅 속에 차갑지만 보드라운 봄흙 같은 20대. 풋풋함 속의 곰삭은 인정과 의리.
세월은 마술사처럼 얼굴에 주름도 긋고 흰 머리도 그려도 지나온 세월 자국 위에 더
또렷해지는 옛 기억. 한 편의 연극인가, 한바탕 꿈인가!
이 가을이 가고 다시 와도 새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것은 언젠가는 영영
두 번 다시 맞이하지 못할 날이, 순명(順命) 순천(順天)하는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리라..
친구는 떠나도 우정은 남는다.
**옛날 역관은 시인이요 문장가였는데 곽중철 교수님의 이야기는 한 편의 수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