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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날개 편 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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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Q.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2-01-05 00:00 조회2,4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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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날개 편 앵무새


 책 제목이 주인공의 생애나 인간됨과 잘 어울린다 싶은 이영희(한양대 대우교수)씨의 자서전 『역정(歷程)』에는 6.25 발발 후 7년에 걸친 李씨의 군대 시절 이야기가 소상히 소개돼 있다. 청년 통역장교가 꼿꼿한 자세로 험난한 전장을 헤쳐나가는 기록이 때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자서전에서 李씨는 통역장교 병과 배지에 대한 씁쓸한 기억도 털어놓았다. 전쟁 중 급히 제정된 배지는 소총 위에 올라 앉은 앵무새 모양이었다.

 "육군본부 어딘가에 있는 무식한 전투병과 장교들의 악의에 찬 발상인 것 같았다. 어쩌면 군대 내의 허약한 인텔리 집단을 모욕하려는 기막히게 교활한 자의 창작이었는지도 모른다."-李씨는 앵무새 디자인을 `주견 없이 남의 말을 따라하는 행위`의 상징으로 여겨 심한 거부감을 느꼈던 듯하다.

그러나 통역자를 앵무새에 비유하는 일은 의외로 고대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9세기께의 카르타고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여서 각국 상인들간 통역 수요가 많았다. 이에 따라 일종의 통역전문 계급이 카르타고를 무대로 활동했는데, 이들은 일체의 노역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통역계급은 머리를 박박 밀고 통역가임을 나타내는 앵무새 문신을 하고 다녔다. 한가지 언어만 통역할 줄 알면 날개를 접은 앵무새, 두가지 언어 이상이면 날개를 편 앵무새 그림을 문신했다는 것이다.

물론 통역 내지 번역은 카르타고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됐다. 기원전 3천년께 이집트 고왕국시대 파피루스 기록에도 이집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통역이라면 문자가 없어도 가능하니까 역사가 더 길 것이다.

월드컵 대회를 불과 6개월 앞두고 우리의 `외국어 인프라`를 점검한 결과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은 경기장 나들이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국민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오랫동안 외국어와 담을 쌓고 지냈더라도 월드컵 개최국 시민으로서 실용영어 공부 정도는 새로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우리가 상 펴놓고 초청한 외국손님들 아닌가.

마침 새해 벽두라 뭐든 작심하고 시작하기 좋은 때다. 한국어만 고집하기엔 한국과 세계의 거리가 너무 좁아졌다. 기왕 시작할 바에야 제2외국어까지 더해 `날개를 편 앵무새`를 목표로 한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co.kr>

 ▶ 게 재 일 : 2002년 01월 04일 중앙일보 06面
▶ 글 쓴 이 : 노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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