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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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03-09-21 00:00 조회4,0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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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장군의 질책으로부터 나를 구해낸 강 처장을
같은 건물(당시 한독맥주 사장 집을 개조했다함)에서 모시면서
매일 번역을 해올리며, 한달에 한두번 상관 1명과 야근을 하는 날이 아니면
이민용 선배 등을 따라가 저녁을 먹고, 또 술을 마시고,
밤 늦게 경복궁 왼쪽의 BOQ(독신장교 숙소)로 돌아와 자고,
아침은 굶거나 장교식당에서 떼우는 생활이 반복됐습니다.
절약되는 하숙비를 술값에 보탠 거지요.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12시가 넘으면
같이 술마시던 선배들 집에 가 자기도 했습니다.
<초급장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었지요.
매일 <긴장> 속에서 번역을 하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제2의 충정가가 선정됐다는
발표와 함께 매일 출퇴근 직전에 이 노래가 각 사무실에
구내 방송되었습니다.
가사는 몇개월 전 경호실 전체에서 공모했는데,
통신처 모 직원의 국문과 나온 부인이 응모한 것이
뽑혔고, 거기에 누군가가 곡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북악의 우람찬 짙푸름
우리의 슬기 모아 함께 뭉쳤네
너와 나 조국 앞에 두 주먹 쥐고
겨레와 님 위해 다져진 충정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진 우리들
이 생명 이 목숨 님에게 바치리----
대충 이런 가사에 사병들이 부르는
군가같은 곡조였습니다.
그런데 방송 후 한달 쯤 지나자
차 실장이 모든 요원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지시한 모양입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 정문 앞에서
<조례>를 주재하던 강 처장이
<우리 정보처에서 지금 당장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었고, 모두들 주눅이 들어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내가 손을 들며, <처장님,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악보는 잘 못 읽지만 몇번 귀로 들은 곡조는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다.
새파란 초급 장교가 겁도 없이 자기 앞에 서니
강 처장도 약간은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약 50명 선배 요원들 앞에서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대학 다닐 때 연극 주연까지 해 본 끼를 발휘해
그냥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노래 전후의 반주까지 악기 소리를 흉내내며
노래를 불러제꼈습니다.
그 경직된 분위기를 깨는 초급장교의 노래 소리에
선배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댔고,
노래와 반주 흉내까지 끝내자
강 처장은 씨-익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수고했어, 모두들 곽중위처럼 할 수 있도록 연습해!> 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선배들은 딱딱한 조례를 사상 처음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로 끝낸 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평소 전혀 웃지않는 강 처장의 그 백만불짜리 미소는
정보처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몇달 전 나를 구출해 준 은인, 강 처장에 대한
나의 작은 보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날 밤 나는 또, 내 노래를 들은 선배들이 사주는 술에
대취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무교동에 있는 민속주점이나 낙지집에서,
우리는 무교동의 <월드컵>, <양주의 집> 등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산수갑산>이라는 집에서는
야심해지면 술 나르던 남녀종업원들이 무대로 나가
<갑돌이와 갑순이> 등을 합창해주곤 했지요.
통금 시간인 12시가 다 되어
위병소를 지나 연병장을 가로질러
BOQ 숙소로 걸어가면서
나는 또 노래를 흥얼댔습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이슬비 내리는 이 밤도 애닯구려...>
노래방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곽중철
같은 건물(당시 한독맥주 사장 집을 개조했다함)에서 모시면서
매일 번역을 해올리며, 한달에 한두번 상관 1명과 야근을 하는 날이 아니면
이민용 선배 등을 따라가 저녁을 먹고, 또 술을 마시고,
밤 늦게 경복궁 왼쪽의 BOQ(독신장교 숙소)로 돌아와 자고,
아침은 굶거나 장교식당에서 떼우는 생활이 반복됐습니다.
절약되는 하숙비를 술값에 보탠 거지요.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12시가 넘으면
같이 술마시던 선배들 집에 가 자기도 했습니다.
<초급장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었지요.
매일 <긴장> 속에서 번역을 하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제2의 충정가가 선정됐다는
발표와 함께 매일 출퇴근 직전에 이 노래가 각 사무실에
구내 방송되었습니다.
가사는 몇개월 전 경호실 전체에서 공모했는데,
통신처 모 직원의 국문과 나온 부인이 응모한 것이
뽑혔고, 거기에 누군가가 곡을 붙인 것이었습니다.
---보아라 북악의 우람찬 짙푸름
우리의 슬기 모아 함께 뭉쳤네
너와 나 조국 앞에 두 주먹 쥐고
겨레와 님 위해 다져진 충정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진 우리들
이 생명 이 목숨 님에게 바치리----
대충 이런 가사에 사병들이 부르는
군가같은 곡조였습니다.
그런데 방송 후 한달 쯤 지나자
차 실장이 모든 요원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지시한 모양입니다.
매일 아침 사무실 정문 앞에서
<조례>를 주재하던 강 처장이
<우리 정보처에서 지금 당장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었고, 모두들 주눅이 들어
잠시 침묵이 흘렀을 때,
내가 손을 들며, <처장님,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악보는 잘 못 읽지만 몇번 귀로 들은 곡조는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재주가 있습니다.
새파란 초급 장교가 겁도 없이 자기 앞에 서니
강 처장도 약간은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약 50명 선배 요원들 앞에서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대학 다닐 때 연극 주연까지 해 본 끼를 발휘해
그냥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노래 전후의 반주까지 악기 소리를 흉내내며
노래를 불러제꼈습니다.
그 경직된 분위기를 깨는 초급장교의 노래 소리에
선배들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댔고,
노래와 반주 흉내까지 끝내자
강 처장은 씨-익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수고했어, 모두들 곽중위처럼 할 수 있도록 연습해!> 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고 선배들은 딱딱한 조례를 사상 처음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로 끝낸 나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평소 전혀 웃지않는 강 처장의 그 백만불짜리 미소는
정보처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몇달 전 나를 구출해 준 은인, 강 처장에 대한
나의 작은 보은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날 밤 나는 또, 내 노래를 들은 선배들이 사주는 술에
대취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무교동에 있는 민속주점이나 낙지집에서,
우리는 무교동의 <월드컵>, <양주의 집> 등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산수갑산>이라는 집에서는
야심해지면 술 나르던 남녀종업원들이 무대로 나가
<갑돌이와 갑순이> 등을 합창해주곤 했지요.
통금 시간인 12시가 다 되어
위병소를 지나 연병장을 가로질러
BOQ 숙소로 걸어가면서
나는 또 노래를 흥얼댔습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이슬비 내리는 이 밤도 애닯구려...>
노래방도,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곽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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