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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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10-28 09:36 조회43,940회 댓글7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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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함
곽중철 전 공보비서관
필자 나이도 70이 가까워오니 별세하는 주위 친지들이 늘어간다. 내 인생 중 가장 오래 상관으로 모셨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오늘 돌아가셨다. 공교롭게도 1979년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10월 26일에… 27일 그의 상가에 다녀왔다.
필자가 노태우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하반기였다. 나는 당시 새파란 24세의 육군 중위로 청와대 경호실 정보처의 영어번역 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국방부의 청와대 요원으로 근무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으로 나가는 당시 전두환 경호실 작전차장보의 후임으로 그분이 청와대에 온 것이다. 그 후 약 1년 동안 같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고등학교 21년 선배라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자주 뵙지는 못했다. 1978년 6월 내가 군복무를 마치면서 청와대를 떠날 때, 후일 청와대에서 그분을 다시 모시게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약 5년 후 그분과의 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3년의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3년에 귀국한 내가 1984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수석통역으로 스카우트되어, 위원장으로 있던 그분의 통역을 맡은 것이다.
“약 5년 전 청와대에서 처음 뵌 적이 있다”라는 신고를 드린 후 을지로 외환은행본점 조직위 위원장실에서 처음 불어로 통역한 사람은 튀니지 IOC 위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약 30분 면담을 통역하고 나자 그가 비서관을 통해 내린 나에 대한 평가는 “잘하는데 좀 덤비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한국 제1기 통역사 중 하나로 해외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와 피가 끓던, 아들 같은 후였으니까 그럴 만 했으리라.
그때부터 그분의 귀와 입이 되어 수시로 통역했다. 1984년 올림픽이 열렸던 LA로 모시고 나가 2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역하는 등 수많은 출장 길에서 외국인들과 만나는 그분의 분신이 되었다. 그분은 외국에 나가면 수행한 비서관과 나에게 “외화를 아껴 쓰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해외에 나가 공식 일정이 끝나면 서울의 가족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범생이었다.
나는 그분의 상대역인 고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도 아주 친숙한 관계가 되었고, 사마란치는 노 대통령 다음으로 내가 많이 통역을 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입을 열기만 하면 무슨 말을 할 지 알 정도였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통역을 시작하면 “You are used to my English” 하며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다 1986년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나간 후에도 그는 당사로 찾아오는 외국 인사들의 통역을 위해 한 달에 몇 번씩 관훈동 당사로 나를 불렀다.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올림픽 통역안내과장으로 일하면서 가끔씩 그분을 위해 출장 통역을 하던 중 1987년 6.29선언을 한 바로 다음 날 그분이 방이동에 있는 올림픽회관에 들러 조직위 직원들을 격려한 후, 마침 방한 중이던 시페르코 IOC 부위원장을 접견할 때 오랜만에 그를 통역하면서 나는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3년 넘게 통역한 사람이 우리나라 민주화 선언을 하다니, 내 어깨가 쭉 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대통령이 된 그는 “곽 군은 일단 올림픽의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라”고 했고, 나는 1988년 9월 17일 메인스타디움에서 그가 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선언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다시 청와대로 출장 통역을 나갔다. 특히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는 국빈 만찬의 통역은 모두 내 차지였다. 혼자서 이른 저녁을 먼저 챙겨 먹고 나비 넥타이의 블랙 타이 차림으로 대통령의 뒤에 앉아 통역을 끝내고 나면 어떤 때는 “수고했어! 배고프지?”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또 해외순방 때에는 대통령 특별기를 함께 타고 나가 통역을 했는데 총 16번의 해외출장 중 14번을 따라 나갔다. 내가 수행하지 않은 출장은 1990년 1차 일본방문과 고르바초프를 만난 샌프란시스코 방문 뿐이다. 요사이도, 당시 해외순방 수행원들을 위해 외무부에서 인쇄한 열 권이 넘는 소책자들을 보며 추억에 젖곤 한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후 나는 비서실 공보비서관으로 발령 받아 다시 한 울타리인 춘추관에서 그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공보비서관으로 대통령이 할 말씀들을 작성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그분을 통역했고, 그 시절이 내 젊은 날의 가장 행복해 보였던 시절이었다고 내 가족들은 증언한다.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후 1992년 9월 22일, 노 대통령은 뉴욕 유엔본부 총회장의 연단에서 제47차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을 하고 있었고, 필자는 2층의 어두운 통역부스에서 연설문에 맞춰 영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약 20분의 연설 후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차례였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연설을 중단했다. 연단을 내려다보니 대통령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바로 앞 페이지에 붙어 넘어간 마지막 페이지를 놓친 것이다. 육사 생도시절 럭비선수로 뛰면서 삔 그의 손가락 탓이었을까? 약 10초의 침묵이 흐르고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결론을 말했다. 내가 들고 있던 번역본보다 짧은 말이었다. 필자는 번역본의 내용을 반으로 줄여 빠른 속도로 통역한 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라며 통역을 마쳤고, 참석자들은 힘차게 박수를 보냈다. 연단을 내려온 대통령은 통역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고, 의전수석은 “곽 비서관이 잘 처리했다”라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의 주된 업적이 이 나라 민주화를 열고 북방외교로 한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드높인 것이라면, 나는 그분의 외교활동에 조그만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노 대통령은 만나는 외국 고위인사들에게 신중하고 세련되고 점잖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사전에 준비된 말씀자료를 바탕으로 자료의 취지에 맞춰 노련한 배우처럼 대화를 풀어가는 그분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도, 영국 여왕이나 필립 공을 만날 때도 중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도 그랬다. 가끔씩 막 통역을 시작하려는 내 팔을 붙들고 자신의 발언내용을 확인하며 신중한 통역을 당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통역을 끝내고 힘에 부칠 때 그분이 던지는 “오늘 곽 군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에도 나는 그를 계속 통역했다. 연희동 집으로 찾아오는 해외인사들을 통역하러 가면 집 앞에서 경찰이 신원조사를 했는데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서울을 찾은 사마란치 위원장을 만나러 그가 투숙한 신라 호텔의 방으로 갔을 때 대통령 재임 시와는 달리 조금 늦게 나타나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는 사마란치를 보고 짓던 그의 씁쓸한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1920년생인 사마란치는 11년 전인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금년 2월 동시대를 살았던 하워드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을 때도 연희동 비서실의 당부로 어른 명의의 영어 조전을 썼다. 당사자는 병상에서 의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물태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물처럼 좋은 게 어디에 있는가?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지 않고 주위의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며 적응했기에 이 나라의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또 북방정책으로 불리는 노 대통령의 외교 업적은 두고두고 역사의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하며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
댓글목록
장명섭님의 댓글
장명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2022년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통역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실향민 기업가 빈대 철학 기업보국
일곱 넘는 조간신문 다 훑어보고
사업상 먹고 또 먹는 여러 끼 아침 밥
그 바지런함 누가 알고 따르리오
소떼와 함께한 금의환향 묵은 빚 갚기
황소같은 뚝심은 최고의 장사 밑천
잠결에 부르는 신나는 노래 한 소절
아버지 맨주먹 대장부 철학 자식교육
시절 탓에 못 다한 아버지 꿈 배고픔
돈독한 형제애로 얼싸안고 보답하고
자식 대에 못 맞춘 아버지 눈높이
배움앓이 한 여러 손주가 풀어줘도
해가 갈수록 타오르는 아버지의 분노
그 무엇, 아차 외로움 때문 이였을까
나는 전생에 궁 안 어전역관 이였를까
해질녘 궁궐 밖 지키는 문지기였을까
아버지뻘 학교 선배와의 인연 운명일까
뚜벅뚜벅 걸어온 외길 한 우물 파기
일가를 이루고 대가의 반열에 올라도
다 내려놓고 돌아보니 문득 스며드는
그 무엇, 아쉬움일까 후련함일까
****
장명섭님의 댓글
장명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1.외로움 때문 이였을까(X)--->이었을까(바로 잡음)
2.궁 안 어전역관 이였을까(X)--->이었을까(바로 잡음)
3.문지기였을까(O):~이었다-->축약형 ~였다(맞음)
장명섭님의 댓글
장명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
통역의 시작은 겁먹고 물속에 가라앉느냐
스스로 헤엄쳐 나오느냐 둘 중 어느 한 쪽
통역은 수표처럼 가짜일 때 세상에 드러난다
통역은 신의 영역 순간의 예술 재능은 타고나는 것
스스로 담금질 하지 않고 피땀 없는 재능은
풍랑 앞의 돛단배 모래밭의 누각일 뿐이요
그림자 화려해도 감동이 없는 통역은 죽은 통역
종이 신문을 읽어라 세상을 읽고 교양을 쌓아라
신문은 최고의 교과서 캄캄한 동굴 눈 밝은 길잡이
모국어 밭을 김 매고 쟁기질해 옥돌처럼 다듬어라
가치와 철학 전략이 담긴 말뜻을 이해하고
말귀를 옮겨라. 모국어 실력이 통역을 가른다.
그 주제를 잘 알아야 통역이 신 들린 듯 신이 난다
훌륭한 통역은 국익을 다투는 외교의 장 화룡점정
총성 없는 전쟁터 대국의 허를 찌르는 비밀 병기...
세상은 나를 물 같다 비웃어도
물은 평지에서 냇물이 되고
웅덩이를 만나면 연못이 되고
벼랑 끝에서 세찬 폭포가 된다
절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이치다
형세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이치다.**
**(위 문장 출처: 한양대 정민 교수님 책: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만 냥짜리 논어 김도련 선생님편)
(정민 교수님께 위 문장을 인용 사용해도 좋다는 사전 동의를 구했음을 밝혀 둡니다)
토두화님의 댓글
토두화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안녕하세요~
곽중철 교수님 글을(책과 신문 기사 포함) 20년 넘게 읽어온 평범한 직장인 입니다.
1992년 철부지 스무 살 대학 입학 후 중국어를 처음 배웠는데 그해 8월 24일 한중 수교가 됐습니다. 벌써 30년 강산이 세 번 변했습니다.
20대 후반에는 통번역사의 꿈이 있었고 30대에는 시인이 꿈이 있었지만 학교 졸업후 쭉 중국 관련 일을 했으며 지금은 중국인 투자 회사 한국 지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20대 부터 교수님 이 홈페이 사이트의 글 <통역 그리고 인생 이야기> 읽고 또 읽으며 많은 생각도 하고 또 덕분에 생각의 힘도
키웠습니다. 우리말 공부도 틈틈이 짬나는대로 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며 댓글 달기는 처음 입니다. 쑥스럽기도 하고 무척 떨립니다.
올해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해 이 뜻깊은 해를 맞아 나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여한이 남겠다 싶어 내가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고 슬그머니 용기를 냈습니다. 1992년 시대 상황 분위기 북방 외교를 떠올리며 그 혜택과 열매를 두루 두루 누린 한 사람으로서 음수사원(우물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이의 고마움을 생각하다) 마음도 있습니다. 나무는 쓰러진 다음에 그 키를 잴 수 있고 사람도 나무와 같이 관두껑 덮은 후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사실대로 객관적으로 인물평을 해야하나 반드시 공을 통해서 그 허물을 들여다 봐야함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통역과 인생 이야기>에 홀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가 얼마나 교수님 <글> 열혈 독자인지는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유인 즉, <문장은 글을 잘 엮는 것보다 뜻을 새롭게 하는 것이 어렵고, 뜻을 새롭게 하는 것보다 이치를 담아 전달 하기가 어렵다. 문장은 알면서
이치에 힘쓰지 않는 경우란 세상에 없다>:**출처:만 냥짜리 논어:김도련 선생님
그러나 나는 교수님을 통역사 문장가보다는 <이야기꾼>으로 소개하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젖줄 <고향> <아버지 그리고 가난> 그 이야기는 내 고향과 아버지 이야기를 보는 듯 겹쳐 내 정서와 잘 맞습니다. 나는 교수님의 그 정서를 녹여내 교수님의 문장을 키로 까불리고 체로 쳐서 <노랫말>로 건져 올렸습니다. 나 혼자 신나서 교수님께 선물이 될까 싶어서 <통역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를 남깁니다. 먼저 교수님의 동의 하에 작곡가를 섭외해서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고 싶어서 내 꿈을 이루고 싶어서 노래로 내 안의 울분과 알 수 없는 분노를 삭이고 잠재우고 싶어서 입니다. 작사:곽중철, 작곡가를 못 만나면 그냥 이야기를 담은 노랫말로 남아도 좋습니다. 하나의 기념으로 하나의 인연으로 추억으로 남아도 좋습니다. 뜬금없지요?
<통역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교수님께서 한 글자 짚어주는 비평 품평 및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장명섭 올림(73년생/소띠/고향:강원도 철원) E-mail:taesanshipping.naver.com
zxcv님의 댓글
zxcv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xcvb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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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gh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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