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내 인생의 뒷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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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17 09:55 조회41,008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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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내 인생의 뒷얘기들
2022년 7월 한국외대 명예교수 곽중철
“열 가지 중에서 아홉 가지를 취하려는 건 욕심이고, 열 가지 중에서 아홉 가지를 버릴 수 있는 건 야심”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 70에 돌이켜 보면 내게도 다음과 같은 고비와 어려운 결정을 내린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 선택들이 타고난 오기 때문이었는지, 운명의 장난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1. 학군 공병 통역장교가 되다
ROTC가 내 인생의 깃발이 되었다. 대학 2학년 2학기, 미팅이다 야유회다 정신없이 놀던 차에 ‘영장’이라는 것을 받고 보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올 것이 왔구나. 고향의 아버님은 고시 공부를 하라고 노래를 부르시는데, 아무 공부도, 아무런 장래 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는데 군대에 가야 한다니,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런 가운데 선배들한테 들은 군대 얘기 중 대학을 가지 않은 어린 병사들이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다니다 입대한 후임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은 내 자존심을 흔들었다. 졸병으로 입대해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연스레 학군단, 즉 ROTC 지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캠퍼스에서 교복에 모자를 쓰고 선배들에게 큰 소리로 “충성!” 하면서 주위 학생들을 놀래키는 ‘바보티시’는 싫었지만 졸병으로 입대해 어린 선임들에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지위했다. 무시무시한 논산훈련소보다는 자유스런 캠퍼스에 2년 더 머물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물론 캠퍼스 내에서의 군사훈련도 쉽지 않았고 학군단 건물 지하에서의 내무 생활도 힘들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 방학 동안 군용 열차를 타고 실무 부대로 가는 야영훈련은 땀이 많은 내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4학년 선배들에게도 많이 맞았고 야영훈련에서는 대위급의 구대장들 한테 빳다도 숱하게 맞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을 만했다. 동료들도, 구대장도 다 같은 장교라는 자부심으로 행동했으므로 자존심의 상처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어서는 여유도 생겨 교내 영어연극의 주인공 역할도 했다. 재미있었다.
장교복무 연한이 사병보다 몇 달 더 길다는 이유만으로 최근 학군단 지원자가 정원 미달이라는 소식은 안타깝다. 윤일병처럼 빨리 제대도 못하고 맞아 죽는 것보다 학군단이라는 길이 얼마나 보람 있고 좋을 수 있는 선택일 수도 있음을 말씀드리려 한다.
4학년 때 치른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해 2월 대학졸업 후 김해의 공병학교로 내려간 나는 첫 한달 동안 후회도 했다. 통신병과냐 공병이나 선택의 기로에서 기계치인 나는 남자다운 공병을 택했고, 그 결과 공병훈련은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학군단 출신 선배 장교들의 구타가 견디기 어려웠다. 덩치가 큰 나는 훈련소의 세끼 식사량이 너무 작아 배가 고프기도 했다.
매일 밤 10 키로를 뛰는 소위 3천리 구보를 한 지 석 달이 지나자 내 몸은 날듯이 가벼워졌고, 주말 휴가 때는 부산의 남포동 거리를 호기롭게 누비고 다녔다. 넉 달이 지나고 나는 몇몇 대학 동기들과 함께 서울 근처 성남의 육군행정학교의 영어교관으로 배치되어 휘파람 불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서 전투복 아닌 정복을 입고 군용 출퇴근 버스를 타고 모교가 있는 동네 하숙집에서 출퇴근했고 퇴근 후에는 모교의 연수원에서 불어를 배우기도 했다.
2. 대통령경호실 떠나기
6개월 후 영어교관 생활이 지루해졌을 때쯤 청와대 경호실에서 시행한 번역요원 시험에 붙어 24세의 나이에 청와대에 근무하게 된다. 물론 그 때는 내가 통번역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1년 반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는 동안 한국관련 외신기사를 1주에 토요일까지 엿새 번역했고, 그것이 통번역사가 되는 기초를 닦아주었다. 자, 1년 반이 지나고 군 복무기간이 끝나가자 드는 의문은 계속 청와대에서 근무할 것이냐는 것. 나와 함께 전입한 일어번역 담당 동기는 일찌감치 군 제대 후 계속 근무한다고 선언했다. 정반대로 나는 일요일 빼고는 종일 번역만 하는 일이 지겨웠고,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경호실장 한 사람을 위해, 볼 지 안 볼 지도 모르는 번역을 올리는데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바깥세상으로 나가 다시 승부를 걸자. 정보처의 선배들은 깜짝 놀라면서 별난 놈이라는 눈치였다. “청와대 근무하다 장가도 가고 하지 왜 그만 둘라고?”
당시에 일어전공 동기와 함께 청와대에 남았다면? 우선 1년 후에 10/26과 12/12 사태를 겪었겠지. 말리는 경호원
들의 팔을 뿌리치고 전역해 광화문 현 현 대해상 빌딩에서 정주영 회장 면접을 거쳐 취직한 현대건설도 통 재미가
없었다.내게는 번역이 더 재밌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만류하는 현대 상관들의 제지를 다시 뿌리치고 모교에 설
립된 통역대학원의 1기로 입학했다.
돌이켜보니 군대가 내 직업을 정해준 것이요, 나라가 학군단이라는 제도를 통해 나의 인생 방향을 잡아준 것이다.
내 군 생활은 너무 특별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병으로 군대 가 인간 이하의 대접은 받지 않겠다”는
약간은 비겁하지만 정당할 수 있는 자존심이 나를 살린 것이다. 군대 생활을 오래하지
않겠다고 사병으로 갔다가 변을 당하거나 노무현의 표현대로 “뺑이 치는” 후진들이 내 얘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
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3. 현대건설을 떠나 대학원 입학
현대건설에서 일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었다. 출근해 9층 해외업무부 맨 앞자리 신입 자리에 앉아 뒤돌
아보면 창문 가 차장석까지 층층 시하였다. 하 는 일은 해외 텔렉스 받아 번역하고 종일 입찰서류 복사하고…. 월
급은 특별 수당을 받았던 청와대에서 받던 금액보다 많지 않았고 하숙비까지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점심
시간 지하 구내식당에서 얼론 밥을 먹고 바깥 야구 타격장에서 30분 배트를 휘두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1년도
되지 않아 난 또 싫증을 느꼈다. 그해 1978년 입사 두 달 만에 맞은 추석 때 부서 회의가 열렸다. 직원들
에게는 보너스 지급을 알리고 회사의 지시는 신입사원 모두가 중동 현장에 나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약 30분의 회의가 끝날 무렵 질문 있으면 하라고 했다. 내가 일어섰다.
“굴지의 건설사 현대건설이 추석을 맞아 신입들에게 조금이나마 떡값도 주지 않으면서 열사의 사막에 무조건 나가
라고 두 달 밖에 안된 신입들을 내모는 건 부당하다. 나는 가겠다고 자원하지 못하겠다.”
장내는 충격의 도가니였다. 저 놈이 도대체 누구냐? 새파란 신입이 어찌 저리 당돌 할 수 있나? 난리가 났다. 그 후
나는 사내 영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하고 1979년 8월 통대 시험에 최종 합격해 9월 1일 현대건설을 떠났다. 13개월
동안 쥐꼬리 월급을 받고 근무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4. 결혼과 파리 유학
내가 울던 파리
“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able feast.” --- Ernest Hemingway, to a friend, 1950
“귀하가 운이 좋아 젊은 시절에 파리에 살았다면 여생에 어디를 가든 파리가 귀하와 함께 할 것이다.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다.”
‘노인과 바다’로 잘 알려진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61년 62세의 나이에 미 아이다호 주에서 엽총으로 자살한 후 1964년에 그의 비소설 [파리는 날마다 축제다 A Moveable Feast]가 출간되었다. Movable feast는 엄밀히 말하면 가변可變 혹은 이동 축제로, 부활절처럼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축제다. 추수감사절 같은 '이동축제일(moveable feast)'처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당신의 삶 속에 불쑥 나타나 생각나게 될 거라는 의미다. 위 문장은 이 책 표지의 소개 글 중 일부다. “Never go on trips with anyone you do not love.”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여행을 떠나지 마라)라는 말도 나온다. 헤밍웨이는 젊은 날의 파리 시절을 추억하며 카페와 바 이야기를 유난히 많이 늘어놓는다. 1953년생인 필자가 27-30세 이던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파리에 살았으니 헤밍웨이가 정의한 “젊은 시절 파리에 산 행운아”에 해당된다.
필자는 1979년 한국최초로 설립된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 1기로 입학해 꼭 1년만인 1980년 9월 정부장학생으로 며칠 전 결혼한 아내와 함께 파리로 갔다. 난생 첫 해외여행으로 앵커리지를 경유해 23시간 만에 도착한 파리는 모든 게 낯설었고 모든 게 문화 충격이었다. 1년 전 먼저 파리를 다녀온 불어전공 아내가 아니었으면 길 잃은 나그네가 될 뻔했고 평생 공처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3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눈물과 땀으로 농축된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다. 이 기간이 내 나머지 삶을 정의했던 것이다. 불어와 영어를 함께 익히면서 한국에서는 불모지였던 통역 공부를 끝내기에는 최단의 기간이었다. 다른 학문과는 달리 유럽 학생들에게도 대학원 2년 과정을 최장 3년 내에 끝내야 하는 스파르타식 훈련과정이었다.
나의 파리 생활 3년은 개선문에서 동북 쪽으로 지하철 두 정거장인 파리 3대학의 통번역대학원(ESIT)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학교는 돌이켜 생각하면 참 고마운 학교다. 그 학교에 다닐 때는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고 내게 더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원망했지만 그건 지나친 이기적 기대였다. 우리정부나 우리학교에서 그 학교에 주는 대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학교에 매 학기 낸 것이라곤 우리 돈 5만원가량의 학생자치회비 뿐. 우리 정부는 내게 한달 500달러의 장학금만 보내주면서 그 학교에 “국제협력의 정신으로 후진국 학생을 공부시켜 달라”고 배짱으로 요청한 셈이었다.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 개도국에서 온 학생실력이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데도 퇴학시키지 않고 3년이나 무료로 공부시켜 수준에 이르게 하고 졸업시켜 국제회의 통역 자격증까지 준 것은 프랑스라는 대국이 표방한 박애정신(fraternity)의 실천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
그래도 나는 귀국 후 1년만에 서울 올림픽 조직위의 통역안내과장이 되어 후배들 10명을 그 학교에 유학 보내면서 내가 힘껏 확보한 넉넉한 체육부의 예산으로 보은했다. 재정난에 빠져 있던 그 학교 운영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원장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20세기 최고의 번역학자 다니카 셀레스코비치Danielle Selescovitch였다. 1985년 파리로 출장 가 유학생 파견 협력각서 서명을 위해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니 “무슈 곽, 당신의 빛나는 출세brilliant career를 축하한다. 내 부친의 조국 세르비아 산 위스키로 계약 서명기념 축배를 들자”고 여장부다운 감사를 했다.
Salle 7 (쌀르 쎄뜨)란 불어로 <7호 교실>이라는 말로 ESIT의 입구에 있는 약 50평 크기의 제일 큰 교실이다. 2001년 별세한, 20여년 에지트 원장을 역임한 그의 이름을 붙여 Danica Seleskovitch Hall로 불리고 있다.
그 건물이 옛 NATO 본부여서 Salle 7는 기존 동시통역 부스 3개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 방은 특히 입학 초부터 졸업까지, 에지트의 통역학부 학장이 통역부 학생 100명 전체를 모아 놓고 통역을 강의했던 교실이다.
당시 학장은 Christopher Thiery라는 나보다 큰 프랑스인 교수로 영어와 불어의 Bilingual이었는데 2년동안 통역입문 과정부터 동시통역까지 가르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악명높았다. 그 시간만 되면 모든 학생이 공포에 떨었다. 당시 모국어인 한국어를 인정받지 못하고 불어를 영어로 순차 통역하는 C-B 통역으로만 평가받아야 하는 별난 학생(Special-case student)이었던 나도 그 수업에 참석해 몇 달에 한 번쯤 통역 평가를 받았다. 학기말이 가까워 오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들 중앙에 통역자 책상과 걸상을 놓아 거기에 앉혀 놓고 수강생 100명 환시리에 통역을 시켰기에 무대 공포증은 더 컸다. 졸업시험 한달 전 나를 지명해 중간 좌석에서 그가 읽어준 캐나다 연사의 불어 연설을 죽을 힘 다해 영어로 통역했더니 수강생들의 의견을 물은 후 “그냥 잘한 게 아니라 매우 잘했다. 귀하가 그렇게 발전할 줄은 몰랐다. 졸업시험 잘 쳐라”고 격려해 준 교실이다.
나는 1983년 6월 13일 동시통역 졸업시험 장소이기도 한 이 교실 맨 오른쪽 부스에 홀로 앉아 티에리 학장을 비롯한 파리의 내로라하는 4명의 현직통역사 시험관 앞에서 한영 동시 졸업시험 (제목: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순방 출국성명)을 쳤고, 20점 만점에 18점을 받아 총 3개 시험 평균 16점으로 천신만고 끝에 졸업할 수 있었다. 기적같은 결과였다. 그날 밤 고향에서는 어머니가 “폭포수 밑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 꿈을 꾸셨다고 했다.
2005년 6월, 세계통대협회(CIUTI) 총회 참석 차 파리에 갔을 때 첫 회의에서 내가 <한국의 통번역 시장>을 소개한 것도 바로 이 교실이었고, 총회 기념 학술 대회에서 <한국의 TV 통역>이란 주제 발표를 한 것도 이 교실이었다. 특히 발표 때는 1983년 6월 같이 졸업한 에지트 통역부 학장 Clare Donovan이 좌장을 맡아 나를 소개해 주었다.
22년만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처음으로 참석한 CIUTI 총회 장소가 이 교실이었고, 그 기념으로 열린 학술대회의 워크샵 4개 중 내가 주제발표를 한 통역관련 워크샵 장소가 또 이 교실이었고, 그 좌장이 나와 동기생이라는 사실이 꼭 우연 같지는 않았다.
현장에서 이 설명을 들은 역시 에지트 번역반 졸업생인 이화여대 통대 최미경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종의 숙명(fatality)>이라고 해석했다. 과연 그런 숙명이란 것이 있을까? 22년 만에 들어가 본 Salle 7는 개보수로 더 깨끗해졌지만 공포에 떨었던 22년 전보다는 어쩐지 좀 작아진 느낌이었다.
3년 파리유학을 했다고 하면 모두들 좋은데 여행 많이 했겠다, 고급 포도주와 프랑스 요리 많이 즐겼겠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월 500달러 장학금으로 차도 없이 지하철로 파리를 누볐고, 하루 세끼도 눈치 밥이었다.
1983년 7월, 파리에서 귀국하면서 “이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했는데 서울 올림픽을 하다 보니 몇 달에 한번씩, 1년에 4번 파리에 가기도 했다.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우리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수행하면서는 모터케이드로 샹젤리제를 지났고 그날 밤 묵었던 샹젤리제의 최고급 호텔 식당으로 파리에 주재하는 동기들을 불러 고급 프랑스 와인을 곁들인 값비싼 만찬을 쏘기도 했다. 헤밍웨이 말처럼 파리는 내 나이 60까지 내 삶의 움직이는 축제가 되었다. 파리의 축제는 내 삶을 바꿔 놓았지만 잃은 것이 더 많지 않나 느끼기도 하는 것이 나의 최근 심경이다.
5. 파리 통역학교 1년 수학 연장
내가 파리 통역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가족 덕분이었다. 2년 예정으로 한 달에 체재비만 500 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유학 첫해 통역반 시험에 떨어져 2년 과정인 통역반을 졸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가 죽어 귀국하려 했더니 같이 갔던 가족이 “졸업 전에는 못 들어간다. 서울 학교에 나머지 1년을 자비로 공부하고 가겠다고 하자고 했다. 그 때부터 배수의 진을 치고 정말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1983년 6월 13일 기적적으로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귀국 준비를 하는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대한항공 간부직원이 파리에 남아 고 조중훈 회장 통역을 하라고 해 잠깐 망설였지만 더 큰 통역을 위해 7월 말 귀국길에 올랐다. 유학기간 1년 연장은 ‘신의 한 수’였지만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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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섭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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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한 편의 영화같은 이야기
새 물길 새 물꼬 통역장교의 길 나를 부르는 청와대 기운 전설이 된 기업가 짧은 인연, 인생의 모든 점은 이어진다
신혼의 단꿈 청운의 꿈을 품고 향한 아름다운 파리, 파리에 반할새도 파리의 연인도 잠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고된 유학생활 공포의 7호 교실 옥의 티도 찾아내는 악명 높은 지도교수
지나고 보니 후기본(厚基本):바탕을 두텁게 다지라는 물과 거름이었고, 나를 웃고 울게한 파리, 내가 사랑한 파리는 이야기꾼의 두둑한 밑천
뛰어난 기억력 타고난 기질 뼈속까지 통역사, 내 삶의 버팀목 고향집 어머니의 길몽(吉夢):
<자루 속의 송곳은 뚫고 나오는 법>
꿈을 이루고 천하 제일 복지(福地):옛 고려의 남경터(한양:지금의 청와대 인근)**서경(평양), 개경(개성)**에서
큰 복을 누리고 도달한 그 어떤 경지 후덕함과 소탈함. 남부러울 것 없는 딸사랑 아빠, 노경의 외로움 그것은 태초의 고독에서 나오는 것...
*케렌시아:나만의 아늑한 쉼터(종로):문 닫으면 깊은 산, 책 읽고 글 쓰는 곳 정토세상 일지언정 찾아오는 길손 뜸할수록
바깥소리에 나도 모르게 문 내다보는 한적한 오후, 코로나 탓이렷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文如其人):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고, 사람은 그 글을 보면 알 수 있는 법.
Write the true sentence in the world. Write the truest sentence in your heart.(헤밍웨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이야기를 써라. 혼을 담은 진실한 이야기는 잠들지 않는다. 버려져도 여전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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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음과 양 두기운은 변화무쌍하다
양이 다하면 음이 되고 음이 다하면 양이 된다.
저마다의 삶은 음과 양 순리와 역행으로 빚이진다
서로 다른 듯 닮은 듯 어긋나도 실은 같은 이치다.
**소설 <홍루몽>중에서
곽중철 교수님,
내 작품평이 주제넘을 수도 있어도 좋은 마음으로 쓴 글이 좋은 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 줄수는 없을지라도 모란의 고운 자태 더 빛나게 받쳐주는 푸른잎의 마음으로 남깁니다.
장명섭 올림
asdf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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