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내 인생의 뒷얘기들 (제3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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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중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17 10:28 조회88,427회 댓글8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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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뉴욕 문화원 포기, YTN으로
번듯한 교수로 있는 내게도 실직의 경험과 반년이 넘도록 월급을 못 받은 과거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란다. 1992년 말, 6 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말기에 청와대 공보비서관(부이사관 급)으로 있던 나에게 모교의 통역대학원 원장이 “임기가 끝나면 모교 교수로 오라”고 제의했지만 수포로 돌아간 사연은 이미 서술한 바다.
YS가 청와대를 접수한 후 나는 공보 비서실 경제 문고 담당 비서관으로 앉아 있었고, 다른 <언어>를 쓰는 <민주화 운동 세력> 틈에서 벌쭘한 입장이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다. 당시 YS 초대 공보수석 이경재 씨(존 한나라당 강화 출신 의원)는 “함께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청와대 앞길 개방' 조치로 사무실 가까이서 들리는 택시 엔진 소리에도 적응이 어려웠다.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YS가 취임한 지 두 달이 넘어가던 1993년 5월 5일 어린이 날, 관례대로 청와대 경내 녹지원에는 어린이 들이 초청돼 대통령 부부와 기념 행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출근하자 말자 공보수석이 불러 가보니 “나는 곽 비서관과 함께 일하려 했으나 나보다 센 사람이 대기 발령을 낼 것”이라고 통고하면서 답답한 듯 사무실 천정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때는 그 센 사람이 인사담당 홍XX 총무 수석인 줄 짐작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것이 대통령 아들 XX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 아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람은 솎아내고 자기 사람들로 청와대를 채우고 있었다. YS 말기 그가 구속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하면 자기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실감했다.
내 사무실을 대신 차지한 사람은 YS의 통역을 맡을 박진(현 한나라당 종로구 의원)이었고, 나는 짐을 챙겨 청와대를 나왔다. 집에 오니 가족들 볼 낯이 없고, 바깥으로 나와도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자주 가는 작은 호텔 사우나에 가니, 바쁠 때는 좀 더 있고 싶었던 그 곳에 한 시간이 지나니 할 일이 없었다. 실직자들이 산을 찾는다지만 등산도 해 본 놈이나 하지…선배들 중에 뜻하지 않게 몇 년 놀아본 사람들은 “다시 자리를 얻으면 절대 불평하지 않고 24시간 일하겠다” 라고들 한다. 그만큼 남자들은 실직의 고통이 크고 무료함의 공포가 크다는 것을 안다.
갈 곳을 수소문해 보니 정권 초기에 대충 인사가 끝나 내 직급에 맞는 자리는 없었다. 이경재 공보수석이 주선해 준 유선방송위원회의 관리국장 자리는 서기관 급이었지만 집에서 허송세월 하는 게 싫어 출근을 시작했다. 약 2 주일의 백수 생활도 일중독자에게는 길었다. 경찰청 앞 순화동 사무실에 나가니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궁궐에서 저자 거리로 쫓겨난 기분이랄까.
그 와중에 내 소식을 들은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선배는 나한데 뉴욕의 공보관 자리로 갈 것을 권유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무엇보다 노태우 씨와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반골 정신 때문이었을까?
퇴근 길에 사무실 근처 저자 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는 나날을 보내던 중 "석사 학위나 하나 더 하라"는 가족의 권유로 가까운 연세대의 야간 언론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2년 후 취득한 석사 학위가 후일 모교에 임용돼 <언론학 박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관리국은 처음 시작된 케이블 TV를 위한 프로그램 공급업자(PP)를 심사하는 일이 주무였고 나는 12월까지 그 업무를 총괄해 아무 문제없이 끝내고, 1994년 1월 PP 중 하나로 선정했던 뉴스 채널 YTN으로 또 자리를 옮겼다.
11. 유선방송위원회 떠나 YTN으로
1997년 7월 28일 각 신문의 인사난에는 YTN국제부장으로 곽중철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게 뭐 대수냐고? 나한테는 큰 일(Big deal)이었다. 1994년 1월 기자 아닌 공보관 출신으로 입사해 부장 대우로 일하다가 3년 만만에 대우 자를 뗀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알아주지도 인정하지도 읺을 때 나는 윌드뉴스부에서 위성통역실을 만들어 통대 출신 8명을 선발, 훈련시켰다. 24시간 뉴스에 필수인 CNN 통역 뉴스를 매일 10분씩 몇 차례 내보냈다. 통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밤새 통역해 녹음한 후배들을 채근했다. 미국 대선 TV토론을 제자들과 함께 직접 두시간 넘게 동시통역했다. 도중에는 영국 황태자 비 레이디 다이Lady Di의 장례식을 두시간 꼬박 혼자서 통역 겸 해설을 했다.
그 동안 후배들과의 위성통역실 제작 경험을 모아 출판사 다락원에서 98년 10월에는 [CNN 리스님], 2003년에는 [영어 리스닝 CNN 직청직해로 끝낸다]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각 저서가 만 부가량 팔렸으나 IMF 로 상처입은 가계에 큰 모음은 되지 못했다.
나는 방송뿐 아니라 해외 방송의 발췌권excerpting 등 구입을 위해 일본과 홍콩으로 출장 갔으며 CNN 등 선진방송 견학을 위해 바다를 건넜다. 칸 영화제가 열리기 전 프랑스로 가서 최신 TV 프로그램을 구입하기도 했다. 나 외에 누가 그런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새 월드뉴스부 부장자리를 놓고는 경쟁이 심했다. 내 나이 또래의 공중파방송 출신들이 기자 출신도 아닌
나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안되면 그만 둔다는 각오로 있을 때 보도상무가 “월드뉴스 부장만큼은 능력위주로
공중파 출신이 아닌 곽중철로 한다”는 소신을 괁철시켜 내가 부장이 되었다. 난 정말 기뻤다. 올림픽 시절 통역안
내과가 생겼을 때 외무부 출신들이 그 자리를 노렸음에도 체육부에서 파견된 총무국장이 “올림픽 조직위 과장은
사계의 최고 전문가로 채운다”는 원칙으로 몇 달을 끌면서 나를 과정으로 발령했던 때와 같이 감사했다.
기분이 좋았다. 인생의 고비마다 그런 선배들을 움직이신 하늘에 영광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98년 IMF 구제금융의 위기가 닥쳤고, 다시 시련의 세월이 닥쳤다. 1995년 취약한 재정으로
방송을 시작한 YTN은 금융위기가 찾아오자 광고 수익금 등의 격감으로 직원들 봉급마저 주지 못하게 되었다. 나이
50이 다되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24시간 뉴스 방송에 들어와 밤낮으로 뛴 결과가 기본급마저 못 받는 처지라니, 믿
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설마 하면서 하루하루 보내다 보니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사람이 부수입이 줄어들면 일부 지출을 줄이면 되지만 본봉이 나오지 않으면 한 마디로 <밥 지을 쌀을 살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가족들 보기가 민망해지는 단계를 지나 자신을 책망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왔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출근을 하면 오전 근무 후 부원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부장의 판공비는커녕 월급조차 받지 못하니 점심이 공포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애써 들었던 적금을 해지하고 얼마간 사 모은 주식을 헐값에 판 돈 중 일부를 얻어 몇 달은 용돈으로 썼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마저 바닥이 났다. 외환위기 전 5,000원하던 회사 앞 대구탕 값이 4,000원으로 내려갔지만 매일 열 명 가까운 국제부 근무 기자들 점심 값 대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필자는 마침내 사업을 하는 친구들에게 전화로 구조요청을 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정이니 광화문에 나와 우리 부원들 점심이나 한 번 사주고 가라…” 다행히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찾아와 일주일에 며칠은 직원들 점심을 먹일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저녁에 찾아와 야근하는 부원들 모두를 근처 고기집으로 초대해 오랜만에 고기와 소주를 배불리 먹여 주기도 했다.
이제는 사업하는 친구들 명단도 동이 날 무렵, 또 다른 독지가를 찾던 필자에게 근처 경복궁 복원 사업을 하는 현대건설의 현장 소장으로 있던 친구가 생각났다. 전화를 하니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고 하며 건설 현장에 있는 함바 집에 추가로 점심을 준비해 놓을 테니 직원들을 데리고 오란다. 옳다구나 여성 앵커를 포함한 부원들을 데리고 경복궁 안 건설 현장으로 가니 함바집 아주머니가 특별히 과외로 도마질 한 따뜻한 밑반찬의 달디단 점심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불리 먹은 직원들과 함께 친구와 아주머니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 후 가까이 있어도 찾지 못했던 경복궁을 산책하면서 우리는 “곧 봄이 찾아오겠지…”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건설 현장의 그 점심 맛과 친구의 따뜻한 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2. 모교 대학원장 되기 위해 투쟁
YTN 국제부장으로 일하던 1999년 2월이 되어도 모교에서 오라는 연락이 없었다. 2월 28일까지도 발령이 나지 않았다. .알아 보니 모교 제 3대 이사장 변형윤(1998.08.17 - 2001.12.31)이 내 임용서류에 서명을 안 한다고 했다.
안 하는 이유는 그 때까지 나를 비난하는 투서가 계속 들어와 나라는 인간의 정체를 확신 못한다는 것. 통대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서명하시라고 독촉했더니 2월 28일 내가 근무하던 YTN의 장명국 사장에게 확인 전화를 했단다. 장사장은 서울 상태 재학시절 진보파인 변형윤을 사사했단다. 장 사장은 “은사님, 염려 마세요. 유능한 사람이고 사생활도 깨끗합니다. 외대에 인재를 뺏기고 싶지 않지만 본인이 모교 임용을 원하니 양보하겠습니다. 절 믿으세요. 염려 말고 임용하세요”라고 했고 그제서야 변이사장은 내 임용서류에 서명했단다.
학교에 와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통대의 교수진, 졸업생, 재학생,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반목, 갈등하고 있었다. 파면된 교수의 폐해는 너무도 컸다. 나는 24시간 뉴스채널의 부장 답게 하루 종일 학교 일과 강의에 매달렸다. 그 교수를 비난하는 연판장을 돌린 졸업생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일단 문제교수가 실각하고 새 교수가 들어온 건 좋지만 아마 결국에는 문제교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루하루 얼음장을 딛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 임용 6년 만인 2006년 2월 나는 13대 통대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세계통역대학원협회(CIUTI)를 주최하고 모교의 국제무대 진출을 시작했다.
13. CIUTI 거쳐 FIT 이사로 APTIF9 주최
지난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세계통번역대학원협회(CIUTI)의 연차총회가 열렸다. CIUTI란 불어 이름의 약자로서 1964년 세계 최고 수준의 통번역 전문 교육 기관들이 결성한 연구 및 교육 교류 단체다. 전세계 수백 개 통번역 학교 중, 엄정한 통번역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16개국의 33개교 만이 엄격한 가입 심사를 거쳐 회원교로 가입되어 있고 이 가운데 레바논을 포함한 유럽 13개국의 30개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이 역시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아시아 최초로 정회원교가 되었고, 신입 회원교 자격으로 이번 연차 총회를 주최했다. CIUTI는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장을 아시아 최초로 임기 3년의 이사직에 선임하며 동서양의 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해 주었다
14. 국제교류 40년의 마지막 임무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큰 예산을 들여 해외 통역사와 번역사 각 50명을 초빙해 일을 시켰고 행사가 끝나자 말자 그들의 추천으로 나는 한국 최초의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이 되었다. 그 때의 외국인 수석통역사(Bernard Ponette)는 그 후에도 한국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회의에서 동료 통역사들과 함께 와서 나를 도와 성공적인 통역을 가능하게 했다.
20년에 가까운 통역 현업 이후 모교인 통역대학원에 와서는 통번역 학자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2000년부터 5년간 우리 교육부 자금으로 미국의 몬트레이와 호주의 맥쿼리 대학원에 제자들을 보냈고 2005년 국제통번역학교협회(CIUTI)의 회원교가 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교수들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6년 내가 통역대학원 원장이 되어 서울에서 동 협회의 총회를 주최하였다. 50명이 넘는 유럽 중심의 세계통역학교 대표들을 초청한 행사는 아주 힘들었지만 이후 국제협력의 계기가 되었다. 서울 총회에서 나는 협회의 이사라는 감투도 썼다.
어찌 보면 국제협력은 성가신 일이다. 그냥 국내에서 통번역을 하고 통번역을 가르치면 쉽게 살 수 있는데 국제협력을 하려면 예산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통번역으로 생활비에 보태고 논문 쓰고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들은 사실 시간이 모자란다. 또 해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출장비도 받기 어렵다. 그래서 가장 선배인 내가 200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연례총회에 참석했다. 프랑스, 벨기에, 이태리, 독일, 중국, 스페인, 러시아의 통번역학교로 출장을 다녔다. 논문발표가 있어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도 항공기 승급에 내 돈을 보태가면서 비행기를 탔다.
2015년 5월 모스크바 CIUTI 총회에서 초대 손님으로 온 국제번역사연맹(FIT) 회장(Henry Liu)을 우연히 만나 내가 한국통번역사협회(KATI)의 회장이라고 했더니 연맹 가입을 권유했다. 학교는 FIT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해 KATI 요원들과 준비를 시작해 그 해 말 KATI는 한국 제2의 회원 단체가 되었다. 2016년 말 아태지역번역사포럼(APTIF)을 이끄는 중국번역사협회(TAC)로부터 2019년 제9회 APTIF 행사를 주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고민에 빠졌다. 출범한 지 얼마 안된 KATI가 그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2019년이라면 내가 정년을 이미 1년 넘긴 시점이어서 더욱 문제였다.
며칠 생각해보니 2019년은 우리학교가 개원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어떤 식으로든 기념행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APTIF 만한 행사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중국 측에 “KATI와 우리 학교가 공동주최 하겠다”고 조건을 걸었고 승인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동료교수들의 동의를 받는 일이 큰 과제였다. 중국 등지에서 번역관련 인사 수 백 명이 오는 행사를 치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동주최라는 동업이 가져올 혼란도 예상되었다.
그렇지만 결심을 굳힌 나는 교수들을 설득했다.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통역대학원인 우리가 개원 40주년을 맞아 그 동안 소홀히 해온 국제협력을 본격화할 수 있는 최적의 행사다. 금년(2018) 8월 은퇴할 내가 사심 없이 힘을 보탤 테니 용단을 내려 달라”. 교수들은 다수결로 어렵사리 동의를 했고, 나는 교수 두 명과 KATI 요원 1명과 함께 2016년 여름 중국 산시성(山西省, Shanxi) 성도 시안(西安, Xian)에서 열리는 8회 APTIF 출장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서울 시로부터 국제행사 준비금 일부를 지원받아 4명의 출장비를 마련하고 포럼 유치 지원 팸플릿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이 있는 천 년의 고도 시안은 내가 자주 간 베이징과 상하이과는 다른 아름다운 도시였다. 시내의 고급호텔에서 열린 포럼은 중국의 힘과 부를 보여주는 화려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특히 호텔 그랜드 볼룸 전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인상적이었다. 3년 후 2019년 여름 우리학교 강당인 오바마홀에도 저런 스크린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포럼 마지막 날 스크린 밑에서 대회기를 넘겨받고, 폐회식에서 준비해간 슬라이드로 서울과 우리 학교, 그리고 KATI를 소개했다. 맺음 말에서 “행사 주최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정한 이상 대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 박수를 받았다. 그 연설이 강한 인상을 주었던지 2017년 8월 초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린 FIT 총회 결산 이사회에서 나는 뜻밖에도 17명 이사 중 신임으로 선출되었다.
2017년 APTIF는중국이 FIT의 후원으로 주도해온 행사이니만큼 중국의 참여와 적극적인 지원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2017년에 벌어진 사드 사태로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를 급감시키자 나는 고민에 빠져 TAC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그들은 변함없는 협조를 다짐했다. 2017년 12월 초 시진핑 주석의 방침에 맞춰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번역 포럼에 나를 초대해 논문을 발표할 기회도 주었다.
이제 한국의 1세대 통역사인 나에게 남은 과제이자 마지막 임무는 2019년 행사를 준비할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외국인과 내국인 참석자에게 적지 않은 행사 참가비를 받고 서울 시 등에서도 지원금을 받겠지만 개원 40주년인 만큼 그보다 앞서 학교 당국의 예산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예외 없이 우리 대학도 재정난에 빠져 있어 일절 예산 지원을 받자 못했다. 그래서 나는 4천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에게 읍소해 개인당 10만원 이상의 찬조금을 받았고, 우리를 사지로 내몬 중국번역사협회로부터 한화 2천만원에 해당하는 송금도 받아 넉넉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포럼 참가자들은 특히 풍성하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칭찬하면 돌아갔다. “뭘 많이 멕여야지…”
15. 내가 당한 사고
기억하기도 싫지만 나는 국제협력이랍시고 1년에 한두 번 학교 예산으로 해외 출장을 다녔다. 20년 동안 약 30번의 출장을 다니면서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다. 첫 사고는 2010년 제네바에서 터졌다. 그 해 CIUTI 총회가 제네바 대학에서 열렸는데 마침 대학 설립 100주년이었다. 1980년 통대 동기생 2명을 만나러 처음 갔다가 귀국 후 올림픽 관련 회의를 위해 매년 자주 출장 간 제네바, 올림픽 위원회가 있는 로잔느Lausanne가 가까웠고, 생수로 유명한 에비앙Evian은 제네바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총회를 앞두고 전야제가 열렸는데 제네바 근교로 대절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걸리는 숲 속이었다. 100주년 기념이라 국내외 귀빈들이 운집했는데 나도 버스를 같이 타고 가 맛있는 샴페인에 취해버렸다. 오후 9시경 행사가 끝나고 다시 버스로 제네바 시에 들어왔고, 버스에서 내려 온자 호수를 따라 호텔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번지 없는 주막”을 부르면서…
그 여행을 위해 산 작은 손가방을 왼쪽 손목에 걸고 홀로 걷고 있었는데 가방 속에는 여권과 현금 5,000 스위스 프랑이 들어있었다. 2008년 제주에서 열린 국제걸스카우트연맹 회의를 사흘 통역하고 제네바 연맹본부로부터 받은 돈이었다. 스위스로 가면서 딸의 시계나 하나 사다 줄까 하고 500만원이 넘는 현금을 들고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어두워진 호수가를 호기롭게 걸어가는데 젊은 괴한 하나가 내 왼손의 손가방을 탈취해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쓰리 꾼이다, 큰일 났다”고 판단하고 도둑을 쫓았다. 입으로는 불어로 도둑이야(Au voleur!)를 외치면서…하지만 와인에 취한 50대 후반의 한국 교수가 그 빠른 젊은 도둑을 잡을 수는 없었다. 한 500미터를 따라갔으나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출소에 가서 불어로 절도피해 신고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스위스라는 치안이 최고라는 선진국 도시에도 도둑이 들끓고 경찰이 도둑과 한 패가 된 듯한 느낌을 받고 좌절했다. 호텔 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세고 다음 날 회의에서 이태리 대표에게 200 프랑을 빌려 기차를 타고 독일의 수도 뮌헨으로 갔다. 돈이야 잃었다 해도 임시여권이라도 만들어야 귀국하지. 중립국 스위스에는 영사관도 없어 독일로 갔던 것이다. 분하고 창피한 마음으로 출장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사랑하고 동경했던 스위스라는 나라와 제네바라는 국제도시는 그렇게 나를 모욕했다. 강도를 당한 트라우마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두 번째 사고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일어났다. 서울 올림픽 때부터 세계승마협회 회장이었던 영국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경 (Duke of Edinburgh)을 통역했는데 30년 후 에든버러에서 오른쪽 발목의 3중 골절을 당했다. 그 때도 에든버러 대학 주최로 CIUTI 총회가 열렸고, 나는 5박 6일 동안 스코틀랜드 관광을 가미하면서 출장을 무리 없이 마감하고 있었다. 정년을 두 달 앞둔 20일팔년 6월 1일 오전 보람찬 마음으로 에든버러 공항 1분 탑승구에서 귀국 후 일정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약 30분의 대기 시간 후 탑승구가 열렸을 때 어서 런던 히스로 공항을 가사 국적 비행기를 타야지 하고 탑승구 입구를 통과해 10마터나 걸었을까 작은 계단 두개를 내려가다 쓰려졌고, 발목을 보니 복숭아 뼈가 크게 어긋나 있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려 했으나 발목이 아팠고, 항공사 직원이 체크인 된 가방을 내려주면서 현지에서 응급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 발목으로는 비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황당무계한 마음으로 공항 측이 마련해준 휠체어를 타고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응급병원으로 가서 처치를 받고 시내 병원에 입원했다. 의료진은 친절했지만 스코틀랜드 노인 3명과 함께 병실에 누워 있자니 또 서글프고 창피할 뿐이었다. 아, 이래서 은퇴를 앞두고는 떨어지는 낙엽조차 조심하라는 거였구나. 낯선 이국 땅 병실에서 급한대로 서울에 전화해 가족과 학교에 비보를 전하고 뒷일을 부탁했다. 이튿날 담당의를 만나보니 현지에서 수술을 하면 2주 후 귀국할 수 있다고 해 당장 귀국을 결정하고 항공일정을 바꿔 3일째 되던 날 다시 공항으로 갔다. 휠체어와 보행 보조기와 함께... 친절한 의료진에 치료비를 물어보니 영국에서는 그런 사고를 당한 여행객에는 치료가 무료라 했고, 그것이 영국 국가보험(National Insurance) 제도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 이번에는 여행자보험도 들지 들아 걱정했는데… 영국 만세!
은퇴 전 마지막 여행을 사고로 마감하고 귀국한 나는 곧 서울 경찰병원에서 전신 마취 발목 수술을 하고 약 2주간 입원 후 발목을 짚고 귀가했고, 며칠 후 다시 학교로 나갔다. 1년 후 학교 4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9월 15일에는 학교 교수식당에서 정년 기념연을 열었는데 20일팔년 초 펴낸 회고록 [인간통역 40년을 돌아보다]를 판매 헤 행사 비용으로 썼다. 약 300명의 친지와 제자들이 와 주었지만, 지금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보우 타이를 맨 얼굴이 부어 있어 그 때까지 수술로부터 완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내 오른 발목에는 아직 수술 때 박아 놓은 쇠 조각들이 남아 있다. 나의 발목 훈장이다.
참고로 나는 일 중독의 대가로 1989년에는 체육훈장 백마장(올림픽 유공)을, 1992년에는 홍조 근정 훈장(북방외교 유공)을 받았다. (끝)
댓글목록
장명섭님의 댓글
장명섭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작품평>2:시인과 역관:옛날 이야기
**옛날에 경상도 도련님이 역과(譯科)에 합격했다. 그 시절 글도 알고 외국어를 알면 비단 위에 꽃을 보탠 격,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사역원의 공부 역관이 되기 위한 혹독한 연습과 훈련은 필설(筆舌)로 모자란다. 역관 선발 시험에 온 힘을 쏟으며 극적으로 합격한 도련님은
선계(仙界) 선경(仙境) 꿈의 궁전에서 세상에 단 하나 뿐이 인생극을 시작한다.
채홍사(궁궐에 사람을 들일 때 가문 문벌 실력 인물 등을 보던 관직)의 눈에 띈 도련님은 임금님 앞 어전역관으로 발탁되어 승승장구 한다.
국가적 국제적 행사 국빈급 사신 접대에 정궁과 별궁을 오가며 밤낮없이 힘든 줄 모르며 임금님 행차에는 최측근으로 수행하며 역관이
천직임을 새삼 깨닫는다.
*<왕권 교체>:천리 길 가는 잔칫상 접는 날 온다
궁 안 선계(仙界)에서 궁 밖 속세로 돌아오니 밥벌이 고달픔에 체통 구기고 솜씨좋은 새색시 쌀 없이 밥 못 짓는 현실
때론 가난 때문에 벼슬길 나갈 수 있지만 원칙과 소신을 접고 적당히 타협해서 실리를 챙길 수 없는 내 안의 반골 기질
그러나 세상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따뜻한 우정은 통 큰 내 빈 곳 허전함을 채워주고, 참다운 우정은 뜨거운 불 속에서 드러나는
순금(純金) 같은 것. 세상 이치가 그렇듯 우리네 인생 마작판 화투판에서 서로 선 잡았다 뺏고 뺏기며 돌아 가면서 선 잡는 법..
어디를 가나 치열한 자리 경쟁. 나를 시샘하는 진골 성골 무리들 그때마다 나를 믿고 밀어준 선학에게 오로지 실력으로 증명하다.
교육자의 길 모교에서 후학 지도. 주경야독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해 둔 석사 공부 더 큰 학문으로 나가는 길잡이 되고
성(城)을 쌓는 자 스스로 고립되고 다리(橋)를 놓는 자 흥(興) 한다. 모교와 통번역 발전 후학을 위한 해외 교류. 발로 뛰며
숨가쁘게 걸어온 길. 이제는 삶이 곧 수행이요 순례요 기도가 되는 하루 하루. 내가 남긴 발자국 뒤에 오는 후학에게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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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읽는 수학자
종이 신문 읽는 피아니스트
책 읽고 글 쓰는 통역사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는다. 故 박완서(소설가)
우리 시대의 풍류! 풍류객! 정말 근사하지 않은가!
throng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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